‘눈먼 자들의 도시’ 속 시간을 겪은 소설의 시민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눈뜬 자들의 도시’ 속 시간이다.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펼쳐지는 닮은 듯 동시에 완전히 또 다른 한 편의 이야기다.
여러 가지 매력으로 가득한 책이다. 예리하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회 면모, 독특한 상황 설정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때때로 스산하게 풍기는 분위기,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문체, 나아가 이전 작 ‘눈먼 자들의 도시’와 비교하며 대칭 혹은 비대칭 요소를 찾아내는 재미까지, 다양한 매력으로 가득한 책이다.
적지 않은 분량과 빽빽하게 지면을 채운 문장들 탓에 선뜻 이 책을 집어들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상기 매력들을 내세워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뜬 자들의 도시’를 소개 및 추천 드려본다. 리뷰 작성 기회를 빌려 주제 사라마구가 선사하는 독특한 도시 속으로의 여정을 소개 및 추천 드려본다.
주제 사라마구의 글을 매우 독특하고 주제면에 있어서도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는지 대단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를 먼저 읽었는데, 그 못지 않게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용은 눈을 뜬 채로 시력이 상실하는 실명 전염병이 도시에 퍼지게 되고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한 권력자들이 함구령을 내리게 된다. 이후 선거일이 도래하자 유권자 대부분이 백지투표를 하게 되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한다. 죽음의 중지에서도 느꼈지만 정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념과 이데올로기, 권력과 인간의 군상에 대한 표현으로는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사라마구의 글이 읽기 어려운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나는 읽는데 큰 문제는 없었고 매우 만족스럽다.
제목만으로도 《눈먼 자들의 도시》의 후속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눈이 멀었던 이들이 눈을 뜨는 장면에서 끝난 《눈먼 자들의 도시》에 이어 《눈뜬 자들의 도시》는 그렇게 눈이 뜨여진 이들의 이야기다. 아니 좀 더 분명하게 하자면 눈을 떴지만 애써 눈을 감는 자들의 이야기다.
그 사건 이후 4년 후의 어느 날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방 선거 투표일. 수도에서는 70퍼센트가 넘는 백지 투표가 나온다. 일주일 후 다시 치러진 선거에서는 백지 투표가 이전보다 더 많아진 80퍼센트에 이른다(왜 시민들이 백지 투표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정부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라는 일반적인 해석을 할 수 있는 단서도, 소설에서는 하나도 제공되지 않는다. 그냥 그들이 그렇게 투표를 했다는 것이고, 그게 어쩌면 ‘눈뜬 자들’의 행동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색 실명의 사태에서 무능하기 그지없던(사실 무능이 문제라기보다는 잔인함과 무책임이 더 문제였다고 생각하지만) 정부는 일제히 몰래 수도를 빠져나가고 도시를 봉쇄한다. 그들은 정부의 기능이 사라진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백지 투표라는 전염병에 감염된 시민들이 항복을 선언하고 제발 좀 돌아와 달라고 애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도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평화로웠다. 시민들을 두고 내뺀 정부가 오히려 혼란에 빠진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소설의 절반에 이르기까지 4년 전의 백색 실명 사태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던 소설은, 이 소설이 그 이야기의 연속이라는 것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한 협정 같은 건 없었고, 하물며 국가적 협정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나는 사 년 전에도 성인이었는데, 우리 모두 몇 주 동안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 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양피지에 국민이 서명을 했다는 기억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겪었던 무시무시한 시련은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해 끔찍한 악몽으로 치부하는 게 좋다고 우리 모두 생각했소. 현실이라기보다는 꿈에서 보았던 일이라고 생각하자는 거지.”
그 치욕스런 기억은 그냥 잊혀질 수 있는 게 아니었음에도 모두가, 특히 그 사태에 조금이라도 책임을 졌어야 하는 이들은 절대 언급하지 않는 금기였던 것이다. 마치 잠시도 눈이 멀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안 되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한 말은 우리가 사 년 전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쩌면 지금도 눈이 먼 것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들은 희생양을 찾아야 했다. 그들에게 날아온 편지 한 통. 거기에는 사 년 전에 눈이 멀지 않았던 여인이 있었음을 밝힌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한 무리를 이끌었던 바로 그 안과의사의 아내였고, 맨 처음 눈이 먼 자가 쓴 편지였다. 그 사실과 백지 투표가 관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눈을 감은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냥 조금이라도 이상한 자가 있다면 그가 용의자이고, 범인인 것이다.
몰래 잠입한 경찰 세 명. 그러나 그들도 그 여인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감화되고 만다. 그렇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고, 안과의사 아내를 포함한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녀와 함께 살아남은 이들의 사진이 공개되고, 도시를 혼란에 빠뜨린 주동자로 지목된다. 도시는 하나도 혼란스럽지 않음에도. 혼란스러운 것은 혼란스럽지 않은 도시, 이성적인 시민들에 당황한 장관들 밖에 없었음에도.
결과는 비극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이 비극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구조였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그 희망으로 살아남은 이들이 비극으로 끝나는 구조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쓰면서 《눈뜬 자들의 도시》의 이야기까지 구상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의 세계와 《눈뜬 자들의 도시》의 세계가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4년 동안 그의 세계관이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혹은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 다음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럴 수 밖에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소설은 많은 사람이 원치 않았을 방식으로 끝난다. 세상이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 특이한 점은, 《눈먼 자들의 도시》나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 직업이나 특징으로만 불려진다. 주인공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그러나 단 하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건 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의사 아내의 눈물을 핥아주던 개. 이름은 콘스탄테. 스페인어로 ‘항구적인’, ‘불변의 것’으로 해석된다고 한다(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작가지만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방금 완독했는데, 좀 얼떨떨하다. 눈뜬자들의 도시에서 희망을 이야기했던 작가가 후속편에서는 그 희망을 무참히 앗아가버렸다.
- 전편에서도 그랬지만 남편은 무조건 반말, 부인은 무조건 존대말을 쓰게만드는 번역은 참아주기 힘들다. 이번 책에서는 심지어 경찰과 여성 인물 사이에서도 존대말의 불균형이 매우 거슬린다. 경찰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게다가 경외할만한 여성에게 '~하오.'체로 말을 하는거냐. 세상사람 모두 멀쩡히 쓰는 하십시오, 또는 하세요를 안 쓰게만드는 이유는 뭐냐라고 번역가에게 묻고싶다. 대체 요즘 세상에 하오, 하시오, 그렇소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있단 말이오!!
눈먼자들의 도시에 이어 눈뜬 자들의 도시입니다. 시기가 시기니 만큼 이 작품들이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이 전 작품에서 눈 이 멀었을때의 인간들의 모습에서 치가 떨릴 정도의 본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버려서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이번에 주제 사라마구 의 대표작 중 눈먼자들의 도시와 눈뜬자들의 도시 이 두 작품을 구매하였습니다. 보이지 않을 때의 인간과 보일 때의 인간의 모습. 과연 어떠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모습이 저 치졸하고 잔인하고 사악할지...여러 상황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들을 보고 참 많은 생각을 갖게 해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