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저자의 이력을 아니 읽는다곤 하나 1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난 작가를 여전히 살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뒤늦게 작가를 알게 된 통에 끊임없이 읽을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핑계만으론 가려지지 아니할 정도로 나의 무지는 실로 크다.
주제 사라마구의 유고작이라고 하기에 대체 이분이 언제 돌아가셨나 싶어 일단 당황했다. 작품이 쓰여진 시기를 알고는 더 놀랐음은 물론이다. 스카이라이트는 최근에서야 세상에 알려졌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초판 1쇄가 2021년 7월 14일에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 작품을 썼다.
정확히 어느 시기라 단정하긴 힘드나 작품의 배경이 194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194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격동의 시기라 칭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갓 벗어나 대혼란의 시기를 관통 중이었고, 합법적 선거로 당선시킨 히틀러와 나치당에 선동 당했던 지난날의 충격에서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를 두고 신음하기 바빴다. 도시 리스본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살라자르’라는 이름의 독재자가 여전히 건재했다. 이 인물(안토니오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지배는 1932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1940년대 후반은 이제 겨우 1/3 정도가 경과했을 뿐인 시기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을 품자니 어디에서도 근거를 발견할 길이 없을 듯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라니,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에 앞서 이미 암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에는 고전했다. 다분히 속도 내어 책을 읽는 편인데, 아무래도 입에 달라붙지 않는 외국 이름을 지닌 인물이 꽤 여럿 동시에 등장하다 보니 이를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이들은 각기 독립된 가구를 이루었으며, 마치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는 것처럼 등장인물 간의 마찰 지점 또한 쉬이 발견되지가 않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도시, 같은 주택가에 거주한다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대체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추었고, 인물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오랜 기간 알려지지 않았던 소설이 늦게나마 출판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얼지가 난 궁금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아마 많은 이들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대는 영웅 외에도 다양한 존재를 만든다. 어떤 시대에 태어날 것인가를 정할 수 있었더라면 등장인물들은 굳이 격동의 시기를 택하지 않았을 거 같다. 각자의 처한 상황, 살아가는 모양새는 달랐지만 경제적인 사정은 고만고만해 보였다. 딱 한 가정, 실베스트르와 마리아나 부부를 제외한다면 안정이 없었다. 저마다 자신이 속한 가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했고, 가정을 불행의 근원인양 여기고 있었다. 상대를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급기야 금기를 향해 손을 뻗는 일이 발생한다. 부정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나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제 엄마에게 강탈당하다시피하는 인물도 있었으며, 그를 탐탁찮아 하는 게 분명함에도 제 딸의 안위를 위한다며 직장소개를 부탁하는 부모도 있었다. 하나뿐이던 딸을 잃고는 당장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형태의 가족 또한 등장했으니, 비록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제3 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나였음에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왠지 모를 불행의 기운이 나에게까지도 미치는 듯했고, 이런 상황에서 홀로 행복을 느끼는 건 혹 죄가 아닐까를 묻고픈 마음까지 들었다.
모든 걸 스스로 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아벨의 입장이 어쩌면 나와는 가장 유사했다. 그는 정처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며 모든 걸 경험으로 익혔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했으나 실상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실베스트르와의 대화는 그에게 깨달음보다는 공허함을 안겨다 주었으며, 왜 그리고 어찌하면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등에 대해 결코 눈뜨지 못한 채 작품 밖으로 사라지고야 만다.
스카이라이트(skylight)는 천장에 난 채광창이다. 채광창은 빛이 오가는 통로로, 그 곳을 통과한 빛은 주변이 어두울수록 더욱 환함을 뽐낸다. 시대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퍽퍽한 삶 또한 어둠에 가까웠다. 실베스트르의 말처럼 그들의 인생 중 스스로 택한 건 거의 없으며, 오히려 떠밀림을 연속 겪은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서도 하늘은 빛을 흩뿌린다. 지금 당장 획기적으로 삶이 나아질 리는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 터이나 그래도 희망을 품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지금은 사랑이라는 기초를 하나씩 쌓아 올려야만 하는 시기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인 무언가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이 표현이야말로 저자의 이번 작품을 가장 잘 말해주는 표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꼭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삶이 나름 풍족하고, 일상에서 부족이나 불안을 느끼지 아니하더라도. 그래도 사랑을 향하여 더 다가가기 위하여 애써야 한다고.
1952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배경이다. 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3층짜리 낡은 아파트.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이 아파트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그 아파트가 세상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처럼.
구두장이 실베스트르와 마리아나 부부는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태고자 세입자를 들인다.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에밀리우는 스페인 출신의 카르멘과 사랑스런 여섯 살짜리 아들을 두었지만 갈등이 깊어간다. 신문사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는 카에타노와 주스티나 부부는 2년 전 딸을 잃었고, 아내는 당뇨병에 걸려 뼈만 앙상한 채 겨우 살아간다. 그 옆집의 아름다운 리디아는 사업가인 파울리누의 내연녀로 풍족하게 살아가지만, 엄마는 매달 수금하듯 그녀의 돈을 받아간다. 3층에는 칸디다와 동생 아멜리아, 그리고 칸디다의 딸 아드리아나와 이자우라가 산다. 그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사랑하며 얼핏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셀무와 로잘리아 부부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열아홉살의 매력적인 딸 마리아 클라우디아가 있다. 그들 역시 쪼들리며 살아가면서 딸의 취직 자리를 리디아에게 부탁할 정도다.
소설은 이 여섯 가족의 모습을 돌아가면서 비춘다. 평범한 듯 보였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불화의 씨를 안고 있거나, 붕괴 직전이다(실베스트르의 가족을 제외하고). 카르멘도, 에밀리우도 서로에게 벗어나려 애쓰고, 카에타노와 주스티나는 서로를 빈정거리며 살아간다. 아멜리아는 조카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열쇠를 복제하고 일기를 몰래 들춰본다. 내연녀로 살아가는 딸의 돈을 뜯어가는 엄마는 어떤가? 그런 엄마를 벌레 취급하는 딸은 어떤가? 가족이 따뜻함을 표상한다는 것은 그저 먼 얘기일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가족의 비루한 모습을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면서 사회를 냉철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비루한 삶을 냉철하게 보여주면서도 주제 사라마구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는다. 실베스트르와 아벨의 대화는 이상 사회를 꿈꾸다 좌절하는 이야기이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베스트르가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을 했었다는 설정은 주제 사라마구의 정치적 배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런 정치적 성향은 이 소설에서 매우 희미해 보인다. 이 소설은 이 소설의 쓰여진 시기를 감안했을 때 여성의 주체적인 발언이 매우 두드러진다. 비록 사회적 흐름의 주체로 그려지진 않지만, 폭력적인 남편(아마도 사회를 표상하리라)에 힘없이 굴복하지 않는 여성상은 당시에 그리 흔하게 그려지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이 소설은 주제 사라마구가 죽은 후 출판되었다. 그러니까 유고작인 셈이다. 하지만 죽기 직전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아주 초기의 작품이다. 첫 장편소설 『죄악의 땅(Terra do pecado)』 이후 바로 다음 작품으로 출판사에 투고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출판을 거절당하고 어느 서랍에서 썩고 있었다. 36년 뒤 우연히 찾게 되었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이 소설의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걸 말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라고 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했던 얘기를 다른 소설에서 많이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무리 그가 여기의 얘기를 많이 했더라도 의미가 있다. 그의 소설을 모두 다 읽은 독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그의 발언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궁금한 이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소설에서의 목소리와 이 소설의 목소리가 동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서라도 이 소설 자체가 무척 매력적이다. 그가 죽은 후에라도 이 소설에 이렇게 출판된 것을 반가워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