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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글판+영문판)

한글판+영문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온스토리 | 2014년 1월 15일 한줄평 총점 8.0 (1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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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독일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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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한글판+영문판)

책 소개

온스토리 세계문학 컬렉션, 그 여덟 번째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40년이 넘도록 식지 않는 열병 같은 청춘의 사랑 고백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감동과 교훈을 주면서도 미학적인 완성도까지 갖춘 명작만을 엄선하여 펴내는 온스토리 세계문학 시리즈. 《데미안》 《노인과 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 이은 여덟 번째 작품으로,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의 대표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선보인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괴테의 연보를 권말에 실었으며 영문판도 함께 수록하여 한글판과 비교하며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했다.
괴테의 이 소설은 1774년에 출간되자마자 젊은 층의 공감을 얻으며 유럽 전역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지금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즐겨 입던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은 당시에 유행이 되었고,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 신드롬(베르테르 효과)까지 생겨났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 괴테가 7주 동안 폭풍처럼 써내려간 이 작품은 동료의 약혼녀인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한 괴테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강한 흡인력을 지닌다.

그의 정열의 불이 그를 불태워버리지는 않을까 하고 모두 겁내고 있다. - 괴테의 친구
내 처량한 존재는 응고하여 불모의 바위가 된다.
나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체험한 것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감정과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 예술은 참된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 괴테
후세 사람들은 일찍이 이와 같은 인간이 있었다는 데 놀랄 것이다. - 극작가 F. 클링거
내면에서 이러한 정신 체험을 발견한 일과, 감정의 힘이 이처럼 격렬하게 사람을 비운으로 몰고 간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 - 문학평론가 F. 마르티니
괴테는 유일하게 독일적인 예외다. 괴테는 하나의 문화다. - 프리드리히 니체

목차

제1부 1771년 5월 4일
제2부 1771년 10월 20일
편집자가 독자에게
옮긴이의 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연보

저자 소개 (1명)

저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출판사 리뷰

<어느 날 닥쳐온 열병 같은 사랑>

사랑은 열병을 앓는 것과 같다. 스물다섯 살 청년 베르테르가 친구의 약혼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듯이.
“때때로 이해할 수가 없다네. 난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네. 진심으로 벅차게 사랑하네. 그녀 외에는 알지도 갖지도 못한다네. 그런데 어떻게 다른 남자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된단 말인가!”
베르테르가 가까운 친구 빌헬름에게 쓴 편지들을 엮은 형식의 이 서간체 소설은 너무나 절절하고 열렬한 목소리로 7주 만에 폭풍에 휩싸이듯 쓰였다. 간혹 2주 만에 쓰였다고도 전해진다.


<모든 청춘의 눈물을 닦아주는 힐링 편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자 그 반향은 대단했다. 젊은이들은 작품 속에 나오는 베르테르처럼 푸른 연미복에 노란 바지를 입었으며, 젊은 여인들은 로테와 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부인들이 자신들에게 쏟는 사랑이 부족하다며 남편들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심지어 종교적으로 용서받지 못했던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자 일각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나폴레옹이 전장에까지 이 책을 지니고 갔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이처럼 커다란 인기를 얻었음에도 이 소설은 한낱 비극적인 연애담으로 폄하되는 수난도 겪었다. 이 작품을 통해 괴테가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고뇌를 세밀히 기술하면서 청춘의 폭넓은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는데도 말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 괴테>

괴테는 어려서부터 문학 신동으로서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면서도 과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진정한 르네상스인이었다. 평생 동안 식지 않는 열정을 품고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탐구했다. 게다가 일흔셋의 나이에도 열아홉 살의 울리케에게 사랑 고백을 할 정도로 사랑을 항상 갈구했던 대문호 괴테에게 사랑은 ‘사람이 태어난 곳이자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을 울리면서 항상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청춘을 뒤흔들고 사로잡은 사랑은 ‘자기를 해방시키는 창작’이라는 고백을 통해 지금까지도 청춘과 함께 웃고 울며 위로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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