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규 저
정창권 저
홍지혜 저
한양으로 천도한 후 해마다 비가 많이 와서 홍수 피해가 심해지자 태종은 보다 근원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또 이러한 자신의 의지를 신하들에게 공표했다. 1411년 윤12월 1일 태종은 "해마다 장맛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 지금 이 개천을 파는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능가> 아직 후년을 기다리거나 혹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아직 후년을 기다리거나 혹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면서 개천 공사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이것이 백성들에게 부담아 되지 않을지 염려했다. 태조의 대표적 참모 하륜은"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의 도입니다. 만일 의리에 합한다면, 비록 칼날에 죽더라도 또한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29-)
불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만큼 세조에게는 늘 정통성 시비가 따라 붙었다. 1456년 (세조 2년)에는 성삼문, 박팽년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세조에게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세조는 문종, 단종 이후 추락한 왕권 회복을 정치적 목표로 삼고 육조직계체를 부활시키는가 하며 <경국대전>,<동국통감. 과 같은 편찬사업을 주도하여 왕조의 기틀을 잡아갔다. (-55-)
"왕비 윤씨는 후궁으로부터 드디어 중전의 자리에 올랐으나, 내조하는 공은 없고, 도리어 투기하는 마음만 가지어, 지난 정유년(1477) 에는 몰래 독약을 품고서 궁인을 해치고자 하다가 음모가 분명히 드러났으므로, 내가 이를 폐하고자 했다. 그러니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청하여 개과천선하기를 바랐으며,나도 폐출하는 것은 큰일이고 허물은 또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여겨, 감히 결단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뉘우쳐 고칠 마음은 가지지 않하고, 덕을 잃음이 더욱 심해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결단코 위로는 종묘를 이어 받들고 , 아래로는 국가에 모범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에 성화 15년(1479) 6월 2일에 윤씨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다. 아, 법에 칠거지악이 있는데,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사사로움이 있겠는가? 일은 반드시 여러 번 생각하는 것이니, 만세를 위해 염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72-)
일견 광해군은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연목대비를 거궁에 유폐하면서 정통성 시비를 없앤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이 두 사건은 오히려 광해군을 반대하는 정치 세력을 결집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서인과 남인이 비밀 회합을 하면서, 정권 타도에 나섰고, 마침내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134-)
16세기 이래로 재야의 사림파 학자들은 사육신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의 정신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국가에서 이를 공인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육신의 복권은 노산군이 단종으로 명에를 회복하는 길과 맞물려 있었다. 사육신을 국가적으로 포상해야 한다는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어느 왕도 사육신을 '국가의 충신'으로 공인하는데는 주저했다. 그런데 230여 년이 지난 후, 숙종 스스로가 총대를 맸다. 숙종은 1691년(숙종 17) 사육신의 관직을 회복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230-)
조선의 왕은 태조 이성계에서 시작하여, 순조 순조 (純祖) 이공(李?)에 이르기까지 27 대 임금을 모셔왔다.이 중에서, 세 명의 왕 , 단종(노산군) 과 연산군, 그리고 광해군을 주목해 보았다. 성리학, 유교의 나라 조선은 이 세 임금을 왕으로서 자격을 박탈하였고, 노산군, 연산군,광해군으로 명명하였으며, 그들의 업적은 노산군 일기, 연산군 일기, 광해군 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들이 사화에 연루되었던 이유는 세 임금이 살았던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가정환경과 연결되고 있다. 단종복위 운동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금성군이 이끄는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며, 순흥도호부가 불타버린다. 연산군은 어머니 윤씨의 칠거지악에 의해 폐위되었고, 윤씨가 폐위 된 사실을 연산군에겐 함구를 지시했다.하지만 권력의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연산군에게 윤씨 폐위를 발설하였고, 조선 시대 4대 사화중 무오사화(1498), 갑자사화(1504) 를 일으켜 피비린내 나는 연산군의 폭정이 조선시대에 일어났으며, 연산군은 곧 폐위되고 말았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종식하였고, 탁월한 외교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왕이 된 이후 ,자신이 해오던 일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는 상황에 놓여지게 되는데, 광해군에게 왕으로서의 자격을 물은 것에 대한 정치적 부담감으로 인해,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연목대비를 거궁에 유폐하기에 이르렀다.즉 역사적으로 볼 때, 광해군은 연산군과 다르다. 단 자신이 왕으로서, 서열 2위에 해당된다는 것은 재임 내내 골칫거리가 될 수 있었다. 태종 이방원이 두번의 왕자의 난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조선시대의 성군이 되었던 것처럼,광해군도 비슷한 방식으로 영창대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1623년) 성공으로 인해 폐위되었다. 역사는 아이러니 하다.유투브를 볼 때, 억울하고 ,최악의 역사적 사건들이 있을 때, 어느 한 순간을 잘 넘어갔더라면, 역사의 큰 물줄기가 바뀔 수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 속에서, 지혜와 성찰을 얻기 위함이다..과거의 잘잘못을 답습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의 줄기를 만들어 나가기 함이다. 그것이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 속에서 , 우리가 할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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