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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기획한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 전집에서는 표지에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담았습니다. 마그리트의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는 꽤나 당혹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인상과 언어, 사물 사이의 관계를 다룬 작품과 사물의 미묘한 부분을 뒤틀어 표현한 작품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분류는 하지만 살바도르 달리나 호안 미로 등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생각의 미술관>은 박홍순 작가의 작품입니다. 박홍순 작가는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사람들을 미술과 인문학으로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앞만 보고 전력 질주하느라 성찰의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고전과 미술 등을 매개로 인문학을 벗 삼을 수 있도록 하는데 애착을 가지고 있다’라고 소개됩니다. 그의작품으로는 <생각의 미술관>을 처음 만났는데,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잠든 사유를 깨우는 한 폭의 그림’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처럼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사실 철학은 살아가는 방도를 알려주는 깨닫게 만들어주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철학은 배워서 얻어진다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생각하다보면 저절로 깨닫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미술작품은 아주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데 있어 훌륭한 안내자라고 합니다. 특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애초에 화가의 의도가 여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안성맞춤이라고 했습니다.
<생각의 미술관>에서 저자는 모두 열 점의 마그리트 작품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림,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하여 철학적 화두를 이끌어갑니다.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모두 열 가지 유형의 사람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고 있는데, 1장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다리>를, 2장 ‘무지를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금지된 재현>을, 3장 ‘기호를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를, 4장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골콘다>를, 5장 ‘모순을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빛의 지배>를, 6장 ‘개별성을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개인적 가치>를, 7장 ‘욕망을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음울한 마법>을, 8장 ‘비정상을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새를 먹는 소녀>를, 9장 ‘예술을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붉은 모델>을, 그리고 10장 ‘세계를 생각하는 사람’에서는 <꿰뚫린 시간>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각 장은 세 꼭지의 글로 구성되었습니다. 첫 번째 꼭지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철학적 이야기 거리를 가져옵니다. 두 번째 꼭지에서는 해당 주제와 관련된 그림, 영화, 소설 등을 인용하여 이야기 거리에 의미를 더하고 세 번째 꼭지에서는 결론으로 이끌어갑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이야기꾼을 만났구나 싶었습니다.
열 점의 작품들 가운데 <골콘다>와 <꿰뚫린 시간> 등 두 작품만이 본 기억이 있고 나머지 작품들은 이 책을 통하여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그리트가 남긴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볼 수 없었지만 2020년 인사동에 있는 인사 센트럴 뮤지엄에서 열린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에서 회화, 사진, 다큐멘터리 등 총 160여점에 달하는 작품을 멀티미디어를 통해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다음 대목을 인용하고 있어 남겨놓습니다. “살짝 열린 좁은 문틈으로 깊숙이 원경이 보이는 호흐의 그림에서처럼, 아주 멀리에서 다른 색조를 띠고 스며든 비단빛 같은 질감으로 소악절이 춤을 추는 목가풍 삽화 같은 모습으로, 다른 세계에 속하듯 끼어들었다. (…) 소악절에서 지성으로 내려 갈 수 없는 의미를 찾고 있었으므로, 가장 내밀한 영혼으로부터 모든 논리적인 장치를 벗겨내고 영혼을 홀로 복도로 보내 음의 모호한 여과기를 통과하게 하면서 얼마나 낮선 도취감을 느꼈던가!” 저자는 이 대목이 네덜란드 화가 피터 데 호흐의 <여인 앞에서 편지를 들고 있는 남자>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예진이 쓴 <프루스트의 화가들>에서 나오지 않은 대목이라서 찾아보려 합니다.
본질상으로는 구분될 수 없는, 같은 체계 안에 존재하는 의식의 상태를 우리가 감성과 이성이라는 인위적 개념으로 구분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매개로 하는 철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에 대한 책이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초년생의 철학세미나 용도에 적합하다(오히려 서양철학사를 기반으로 한 책보다는 이런 책이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단 그말은 철학적인 화두에 대한 소개와 요약만 있을 뿐, 깊이는 없다는 말이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느냐고 물어볼라치면, 보다보면 가슴에 뭔가 울림이 있을 것이라는 답을 듣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에 뭔가 울림이 오는 그런 그림을 만나보지 못한 것을 보면 저는 여전히 미술작품을 감상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초보 축에도 들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 같은 것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방법은 없는지 찾아 헤매고는 있습니다.
<생각의 미술관>은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적 소양을 쌓는 방법으로의 그림감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미술은 철학에 대한 일정 수준의 배경지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애초에 그림을 통하여 철학을 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목적의 그림감상에 안성맞춤이라고 합니다. 미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숫자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기로는 민음사에서 내놓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 전집을 구성하는 소설마다 마그리트의 그림을 표지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유심히 보았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저자는 그림을 통하여 변화, 무지, 기호, 관계, 모순, 개별성, 욕망, 비정상, 예술, 세계 등 ‘열 가지의 주제를 생각하는 사람’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큰 제목이 적힌 쪽을 넘기면 그 다음 장에는 해당 주제에 관한 문제제기를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보다 깊이 있는 내용으로 주제를 심화시키거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하여 다른 화가의 작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흔히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배경지식의 암기보다는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즉,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어떤 발상이 필요한지, 생각을 어떤 방향으로 향하도록 해야 하는 지 등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저자의 이런 기획의도가 잘 드러나는 글쓰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끔은 충돌하는 개념도 없지 않은 듯하며, 특별히 거론하지 않아도 될 듯한 점을 일부러 짚어낸 듯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무지를 생각하는 사람’편에서 고야의 ‘마녀의 집회’와 ‘산 이시드로 순례행렬’을 인용하여 당시 스페인 사회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지배하고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무지가 강제되던 시절이라고 설명합니다. 일종의 우민화 정책으로 일반인을 문맹 상태에 머물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문맹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어 무지에서 벗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듯이 넘쳐나는 정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문맹보다 나을게 없는 세상이 아닐까요? 이런 상황을 디지털 문맹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어서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편에서는 현대사회가 경쟁을 강제하는 사회라는 비판적 시선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경쟁을 회피하는 사회는 결국은 또다른 우민화정책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부터인가 경쟁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경쟁은 나쁜 것이라고 단정지어야 하나요? 긍정적인 면은 없을까요? 따지고 보면 모든 생명체, 동물은 물론 식물까지도,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숙명을 가진 것인데, 경쟁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을 굳힌 것이 과연 잘 한 것일까요? 요즈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니, 그런 주장이 나온 배경에는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은 의혹까지도 생기는 판입니다. 경쟁은 필요하지만, 다만 자족할 수 있다면 불필요한 경쟁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는 교육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