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국 저
허유선 저
이준형 저
이관호 저
필리프 J. 뒤부아,엘리즈 루소 공저/맹슬기 역
종이책은 예전에 선물받아서 읽었는데(어디서 받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구독하고 있는 전자책 서비스에도 있길래
종이책이랑 전자책을 상황에 맞게 골라가며 다시 읽었다
요새 걷기랑 명상 산책등에 취미를 가지면서 이런류의 책들이
마음과 눈에 더 들어 오는 것 같다
걷기나 명상은 내가 좋아하는 정적인 장르의 힐링법인데
오히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그냥 그때그때 즐거운 영화나 드라마 예능등에 치중해서
정신없는 여가시간을 보낸것만 같아서 이제라도
시간과 틈을 내어 고요한 비움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래서 이날 고른책이 <니체와 함께 산책을>이였는데
책이 막 두껍지도 않고 내용도 복잡하지 않아서 읽기에 좋다
형광펜 표시해놓은 부분이 진짜 많은데 그중에
몇페이지의 몇 글귀만 소개해보자면
138P
앤서니 드 멜로의 책에 등장하는 스승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통은 조용히 앉아 혼자가 될 수 없는 곳에서 생겨난다'
138P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명상을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잡념을 없애는 일이다
단지 그만한 일로도 우리의 영혼은 치유된다
명상을 뜻하는 영어 'meditation'의 어원은 라틴어'mederi'인데
여기에는'의료' '치유' 의 의미가 있다
고대인들은 명상에 사람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41P
앤서니 드 멜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을 미리 앞질러 생각하지 말고
보상받거나 피하려는 생각도 떨쳐버려라
마음을 굳게 먹고 현재의 상황에 부딪혀보려는 자에게는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순환으로서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88P
좌선하려면 조용한 곳이 좋다
몸이 있는 곳을 소중히 여겨라
앉는 곳을 밝게 하라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한 것이 이롭다
주위의 일은 모두 잊고 심신을 쉬게 하라
부처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좌선은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부처의 완성된 행위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수행 자체가 깨달음이다
75P
불교의 중요한 경전 가운데<법구경>이 있다
그 369번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구여
배 안에 스며든 물을 퍼내어라
물을 퍼내면
그대의 배가 가벼워지리니
탐욕과 분노를 버리면
그대는 마침내 열반에 이를 것이다
'비구'란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를 뜻하고
'배'는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이 글은 한 사람을 배에 비유한 것이다
배에 고인 물을 떠내 밖으로 버리라는 것은 배에 실은
짐을 버리고 텅 비우라는 의미다
51P
가톨릭 신부인 앤서니 드 멜로는
'경험이 투명해질 정도로 집중'하는 일을 강조한다
그는 식기 닦는 방법을 사례로 들어 이야기한다
식기를 닦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식기를 깨끗하게 할 목적으로 닦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닦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닦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은 죽어 있다
몸이 식기를 닦는 동안 마음은 깨끗이 하려는 목적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번째 방법은 살아 있다
마음과 몸이 공통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23P
니체는 이곳뿐 아니라 자신이 머물던 여러 고장에서 매번 오랜 시간 산책했다
산책이란 니체에게 현실적인 구원이었다
14P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니체-
명상이나 좌선을 어렵지 않게
말그대로 마음편하게 시작해보고자 하는 분들
그냥 생각없이 편안하게 산책하고 걷고 앉아서
걱정없이 힐링하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퇴직 하시는 분이 근무 마지막 날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며 나에게 이런 인사말을 건넨다. "행복하십시오." 그 말에 "부장님이 나가셔서 행복하셔야죠." 라고 응했다가 그 분의 다음 말에 내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순간 깨달았다. "저야 행복해지려고 나가는 거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퇴사하는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재단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 경험 덕분에 퇴사하는 사람도, 남아서 일하는 사람도 각자의 행복을 좇아 가는 중이란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
생각지도 못한 생각을 만날 때, 나는 인생을 정말 모르고 산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우리는 어른이 되면, 나이가 들면 다 알게 된다고 여기지만 알고 보면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시야는 좁아지고, 자기 생각 안에 갖힌 편견 뭉치가 된다. 살면서 경험한 게 전부라는 믿음의 돌덩이가 내면에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세상 전부가 된다. 그렇게 일어나는 생각에 어떤 이견도 달지 않는다면 자기 안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천하무적 꼰대가 된다.
진정한 나로 살고 싶다면, 삶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내가 어떤 철벽 속에 갇혀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선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지 않을까? 정신 없이 살다보면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데 무의식이 선택한 대로 살고 있는 순간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깨어나는 순간에 무게를 주지 못하면 다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잠든 것처럼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 버린다.
나는 언제 깨어있는가? 그 시간을 찾아야 한다. 어떤 자극이 있을 때만 정신을 차릴 게 아니라 내가 의도해서 깨어나는 기회를 일상에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지 점검하고 삶을 더 깊이 경험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책을 읽는 것일 수 있고, 사람을 만나는 것일 수 있고, 놀이를 하는 것일 수 있고, 조용히 명상을 하는 것일 수 있고,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움직임일 수 있다. 어떤 게 됐던 평소와 다른 것을 체험할 기회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산책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한 시간 정도 집 근처를 느긋하게 거니는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 당시 독일인이 생각하던 산책이다. ... 니체는 비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산책하러 나갔다. (026쪽)
<니체와 함께 산책을>을 읽고, 매일 남산 산책을 다니는 나를 '니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왕복 4~5킬로미터 거리를 (가능하면) 빠른 걸음으로 걷고, 비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간다는 억지스러운 공통점 때문에. 니체는 산책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작은 수첩이나 메모지에 적었(033쪽)는데, 나도 걷다가 떠올린 생각을 스마트폰 메모지에 적고 나중에 블로그에 내용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쓴 글에 격언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고, 내가 아침마다 짧은 글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니체가 체험한 신기한 일을 다른 사상가, 예술가들도 똑같이 겪었다. ... 일단 여기서는 니체의 삶에서 명상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만 기억하자. (035쪽)
니체가 구체적으로 명상을 실천한 행위가 바로 산책이다. 덕분에 나의 남산 산책을 명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됐다.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 이유는 혼자 산책하며 나와 내 주변 일상, 그리고 삶에 대해서만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는 데 있다. 많은 생각이 떠올라 메모할 게 많을 때가 있고, 아무 생각 없이 돌아 내려와 뭘 써야 되지? 이럴 때도 있다. 그런 순간 조차도 나의 내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바뀌는 게 없어도 마음가짐과 태도는 바뀐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노을을 보며 오늘 하루를 후회하고 내일을 걱정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같은 풍경을 보며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기쁨과 환희를 느낍니다. 어떤 삶이 더 행복할까요? 앞서 살펴본 일곱 명의 사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명상을 통해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는 편견을 없애고 우리 앞에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194쪽)
똑같은 현실의 그림을 보고도 사람마다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 깨달음이란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보게 되는 순간인 셈이다. 없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이미 내게 와 있는 행복을 찾아낼 눈만 가지면 되지 않을까? 결국 나만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충격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누가 행복한지는 누가 깨어있느냐의 차이. 내 걱정과는 달리 퇴사하는 그 분이 훨씬 더 행복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니체는 자연에서 찾아낸 광대함, 고요함, 햇빛을 사랑하였다. 그는 하루에 8시간 동안 혼자 자연 속에 있다 보면 15분간의 깊은 침잠이 몇 번 찾아온다고 말하였다. 니체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 특별한 15분이 바로 명상의 심층부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 산책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 이르는 길, 한마디로 ‘자연 속 명상’ 이었다.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시간도, 생각하는 데 필요한 정적도 잃어버렸다. 명상하는 삶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본래 명상 생활을 하려면 여유로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체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곧 명상하는 시간이었다.
괴테는 친화력이 탁월하였다. 자연과 사람 모두와 어우러지는 능력이 있었다. 평소에도 곧잘 명상 상태에 들어가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고 녹아들 수 있었다. `자신을 잊는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게 강하게 이끌렸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그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고독하게 있으려 했다. 고독 속에서 세상의 번잡함에 휘둘리지 않았다. 혼잡한 장소에 있을 때도 혼잡한 광경에서 자기 자신을 구해냈다. 명상을 통해 어떤 순간에도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심을 찾은 것이다.
릴케는 사교성 있고 활달한 성격이 아니었다. 시인답게 소박하고, 고독한 모습으로 늘 평온하게 지냈다. 시의 소재를 찾기 위해 인간과 동식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시인 릴케의 관찰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일찍부터 觀照의 수준에 있었다. 릴케도 관조와 명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관조란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상태로, 관조할 때는 무의식 중에 깊은 명상 상태로 옮겨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