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이미예 저
델리아 오언스 저/김선형 역
천선란 저
박완서 저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개인의 생각이 독자로 하여금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내 생각이 타인의 생각으로 침식될 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요즈음은 생각한다. 세상의 이슈를 무시하고 사랑과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읽는 이로 하여금 좋은 인상을 주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글이 주는 힘을 알기에 글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강약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다. 아마추어인 나도 이럴진대 작가들은 더 많은 생각을 하며 글을 쓰지 않을까? 그래서 나와 취향이 맞는 작가를 만나는 걸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한때는 열심히 찾아 읽었던 기리노 나쓰오의 책. 시들해졌고 무시했던 시간이 제법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녀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아니 독자에게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은 무엇인지. 그런 기준은 과연 누가 나누는 것인지.
성애 소설을 쓰던 작가가 문예윤리위원회라고 칭하는 조직의 소환장을 받고 그곳에 찾아간다. 금방 풀려날 거라고 믿었던 작가. 그곳은 핸드폰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곳으로, 바닷가의 격리된 건물이다. 위원회의 요구는 단 하나.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것. 즉 누가 읽어도 이상하지 않을 올바른 글을 쓰라는 것. 외설, 폭력, 범죄 등이 담긴 글을 쓰면 거지 취급을 받지만, 위원회가 원하는 글을 쓰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 위원회. 과연 이곳에서 작가들은 나갈 수 있는 것일까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 자유로운 글을 쓰는 게 자유민주주의 국가일까? 얼마나 자유로운 글을 써야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노래나 영화 혹은 드라마도 심의위원회가 있어, 타당하지 않은 것은 방송되지 않았다. 그 타당한 이유가 누구에게든 납득 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규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아닐까? 나는 예술에 진지한 사람도 아니고, 예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할지 정확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예술의 범위가 예술인지 외설인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애 장면을 묘사하더라도 그게 성애를 위한 성애인지, 과정을 위한 성애인지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 자체가 매일 희망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으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라고 강요하는 게 맞는 것일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가진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이 책에서처럼 어느 날 작가들이 고립된 바닷가 어느 곳으로 끌려(?)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얼마만큼 저항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으며 불의를 보면 되도록 참으라고, 어떻게든 못 본 척하라는 말을 한다. 나선다고 달라지지 않는 세상임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의 아이들이 피해 입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인생이, 삶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신념이 어느 순간 변절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 주는 부모일까? 신념을 가진 채 움직이고 행동하라 말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읽은 기리노 나쓰오의 책. 반짝이는, 신박한 재치가 숨어있는 건 아니지만, 작가이기에 가질 수 있는 창작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을 고민하게 되는 책이다. 우린 창작이나 표현의 자유에 얼마나 유연한 사회에 살고 있는지, 우리는 속박이 전혀 없는 것인지,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의 구분은 대체 누가 만드는 것인지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마쓰 유메이 (본명 마쓰시게 간나)가 쓰는 소설은 흔히 성애 소설이라고 부를만한 장르의 것이다. 마쓰 유메이, 나는 작년에도 한 권의 소설을 냈는데 ‘세상 사람들의 금기나 양식 따위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지점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믿고 독자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고’ 싶다는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다. 나는 ‘강간, 페도필리아, 페티시’를 모두 포함시킬 정도로 공을 들여 소설을 썼다.
“... 우매한 자들이 소설을 샅샅이 뒤져서 편향 혹은 변태라 판정하고 작가의 성격을 뜯어고치려고 한다. 요양소, 그리고 정신감정. 그다음에는 또 뭐가 있을까. 붕붕 소리를 내며 도는 풍력발전 터빈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는 느낌이 들며 신경이 마비될 것 같았다.” (pp.72~73)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총무성 문화국 문화문예윤리향상위원회’가 보낸 소환장을 받게 된다. 내용인즉슨 내 소설을 읽은 독자 중 누군가가 내 소설에 문제를 제기하였고, 출석을 요구하였으나 내가 회답을 하지 않아 다시 아래의 기일에 요청한 장소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출두 장소인 바닷가 도시에서 ‘약간의 강습’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숙박 준비물도 부탁한다는 내용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배가 고프다. 화장지가 줄어들고 있다. 전화통화가 안 된다. 메일도 라인도 안 된다. 인터넷도 쓸 수 없다. 감시당하고 있다. 동료와 이야기도 못 한다. 밖에 나가고 싶지만 못 나간다. 이렇게 모든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알고 나면 사람은 순종적이 되는 걸까. 어제는 명치를 얻어맞고 구속복에 갇힌 여자를 보며 그토록 격분했는데 오늘의 나는 이미 활력을 잃은 상태다.” (p.158)
그리고 이렇게 해서 나는 바닷가 도시에 있는, 외부와 단절된 장소의 요양소에 감금당하게 된다. 거기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다른 작가들도 존재하는데, 그들과의 교류는 철저히 막혀 있다. 식사 시간에도 겨우 눈만 맞출 수 있을 뿐이고, 샤워 시간도 개별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다만 절벽의 숨겨진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A45와 (나는 이곳에서 이름이 아닌 B98로 불린다) 몇 마디의 말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뇌 과학자 소마를 달갑게 않게 여기는 다다는 아키미와 불륜 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다다의 아내에 대한 질투를 숨기지 못하는 아키미. 휴일이면 성인업소에 드나드는 니시모리. 아무리 봐도 시골 아줌마로 보이는 가니에가 숨은 실력자이며, 난폭한 오치는 문학적인 인간 같다는 뜻밖의 결말. 여의사 소마는 무려 ‘시치후쿠진하마의 멩겔레’란다. 우리 가운데 누구를 실험 재료로 삼을지를 선별한다고.” (p.234)
요양소의 소장은 다다이고, 다다와 비슷한 힘을 가진 것은 정신과 의사인 소마이다. 입소 후 몇 차례 직원들과의 대립으로 벌점을 받은 나는 특별한 관리 대상이 된다. 나는 또한 베갯잇 안에서 이 방을 사용한 전임자의 메모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인간들의 성향을 파악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만약 작위적인 것이라면, 누군가가 내게 제공되기를 원하는 정보일 뿐이라면...
“이때에 이르러서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뇌를 산산이 부숴 버리면 스튜에 어울릴지 어떨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p.351)
소설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만, 그 논쟁의 한가운데로 (새로운 우파의 득세에 일조하였다고 여겨지는) PC함, 정치적 올바름을 끌어들이는 것이 적당한지는 의문이다. 소환장을 보내고 요양소를 운영하는 총무성 문화국 문화문예윤리향상위원회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혐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PC함까지를 억압의 선상에 놓는 것에 동조할 수도 없으니...
기리노 나쓰오 / 이규원 역 / 일몰의 저편 (日?) / 북스피어 / 367쪽 / 2021 (2020)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알게된 작가인데 이로서 두번째 작품이네요. 처음 읽은건 절판된 로즈가든이었고, 이런 류의 소설을 별로 많이 읽어보진 않았는데 장르소설? 작년에 사놓은건 무지 많은데 거의 안읽고...
일몰의 저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었고 앞으로도 팬 될것 같아요. 절판되었던 로즈 가든도 이북으로 다시 나왔으면 좋겠어요.
작가의 나이가 현재 칠순?정도라고 들었는데 이런 감각이 나온다는거에 감탄했고 너무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