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만 철저하게 무관심할 뿐인 자연의 여신 앞에서
―장경렬 서울대 명예교수, 스티븐 크레인의 ?구명정?이 말해 주는 것
만 29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생애를 보냈지만, 스티븐 크레인(Stephen Crane, 1871.11.1.~1900.6.5.)은 미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장?단편소설과 시를 창작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다. 일찍이 윌리엄 포크너는 마크 트웨인을 현대 미국문학의 할아버지라고 한다면 크레인은 아버지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바로 이 말에서 우리는 크레인의 문학사적 존재 의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규적인 학교 교육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크레인은 1891년 6월 만 20세가 되기 전의 나이에 대학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신문 기자와 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1893년 장편소설 ??거리의 소녀 매기 Maggie: A Girl of the Streets??를 발표했는데, 비록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 작품은 오늘날 미국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어서 1895년 또 한 편의 장편 소설 ??붉은 무공 훈장 The Red Badge of Courage??을 발표함으로써, 크레인은 대서양 양안―즉, 미국과 영국―에서 주목받는 저명한 작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저명한 작가가 된 크레인은 1896년 12월말 한 신문사의 요청에 따라 그 무렵 스페인의 압제에 항거하여 진행되고 있던 쿠바 독립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플로리다로 떠난다. 쿠바에 잠입할 목적으로 그는 12월 31일 저녁 선원 자격으로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출항하는 증기선 커머도어(Commodore)에 승선한다. 전쟁 물자 및 쿠바 독립군 자원자를 싣고 출항한 이 배는 항구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모래톱에 얹히고 만다. 모래톱에서 끌어내어 물에 띄우려고 하는 가운데 배는 부분적으로 파손을 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틀 후에 마침내 침몰하고 만다. 배에 있던 모든 구명정이 동원되었으며, 크레인은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작은 구명정에 오른다. 파도와 힘겨운 싸움을 하던 네 사람을 태운 채 대략 30여 시간 동안 바다에 떠 있던 이 구명정은 마침내 데이터나 비치의 해안 가까이(약 800미터 전방)에 이르러 파도에 뒤집히고 만다. 마지막 사투 끝에 네 사람 가운데 세 사람은 살아남고 한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크레인은 이때의 경험을 기록하여 1897년 1월 6일 ?스티븐 크레인 자신의 이야기 “Stephen Crane's Own Story”?라는 제목으로 신문사에 보낸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단편소설 ?구명정 “The Open Boat”?을 창작한 다음 이를 ??스크리브너즈 매거진 Scribner's Magazine??에 발표한다. 크레인의 단편소설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위기에 직면하여 인간과 인간이 서로에게 느끼는 진정한 동지애와 신뢰감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울러, 이 소설은 자연이란 인간에게 잔인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으며, 그를 배반하거나 그의 앞에서 현자인 척하지도 않은 채 다만 무관심할 존재라는 깨달음으로 독자를 이끌기도 한다. 물론 자그마한 구명정에 몸을 싣고 있는 네 사람은 때때로 절망하기도 하고 때때로 자연의 여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힘을 합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자연과의 싸움에서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인내력과 잠재력이 얼마나 무한한가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신문사 특파원은 크레인 자신의 소설적 형상화로 추정되며, 기관사와 함께 구명정의 노를 젓는 일을 맡아 한다. 그는 또한 많이 생각하고 깊이 느끼는 그런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신문사 특파원이라는 직업의 영향으로 그는 인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배 안에서 싹튼 동지애를 감지하고 이로 인해 인간에 대한 따뜻한 감정을 일깨워나가게 된다. 구명정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낸 고난의 시간이 그에게 “생애 최고”의 경험으로 이해됨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또한 여러 번 자연에 대한 원망과 비난을 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자연이란 인간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한 존재임을 생생하게 깨닫는다.
증기선 커머도어가 침몰할 때 부상을 당한 선장은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로,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 신중하고 주의 깊은 그에게 절대적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보인다. 이야기 속 대화의 분위기로 보아 그는 배에 함께 있는 다른 세 사람보다 나이와 경륜이 한결 높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그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나머지 세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고, 또 배의 항로를 결정하기도 한다. 비록 배의 안전을 위해 육체적으로 기여하는 바는 없지만, 그는 결코 잠에 빠져들지 않은 채 항상 배의 안위에 주의를 기울인다.
기관사인 빌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바의 일을 끈기 있고 성실하게 하는 사람이다. 커머도어가 침몰하기 전 기관실에서 이중 당직 근무를 했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그는 누구보다도 피로에 지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인 노 젓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묵묵히 주어진 바의 일에 충실했지만, 그는 해안에 거의 다 이르러 죽음의 길을 걷는다. 이처럼 자연은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요리사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소설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면에서 볼 때 ‘어린아이답다(childish)’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항상 모든 일이 밝은 쪽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런 생각을 수다스럽게 입 밖으로 표현한다. 모든 사람들이 위기감에 젖어 긴장해 있지만 그런 순간 엉뚱하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파이에 대해 생각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모자라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배 안으로 들이닥치는 바닷물을 퍼내는 일이다.
어찌 보면, 위의 네 사람은 서로 다른 개성의 소유자로,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험난한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은 단순한 모험담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아울러, 인간과 자연과의 싸움을 냉정하고 절제된 필체로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빌리의 죽음을 통해 인간사란 결코 교과서적인 해답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실 광포한 바다로 대표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대결을 다룬 이 소설에는 두드러진 플롯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극적인 반전을 통해 읽는 사람들을 특별히 긴장케 하는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절한 문학적 비유와 상징 및 생생한 정황 묘사를 통해 이야기의 생동감과 현장감을 잘 살리고 있다. 아울러,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자연과의 대결 속에서 절망에 빠져들기도 하고 희망을 갖기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깊고도 뛰어난 문학적 호소력은 결코 소홀히 여겨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역자는 이 소설을 해양 전도와 온갖 해양학 표본이 있는 서울대학교 해양학 실험실에서 번역을 시작했으며 또 그곳에서 번역을 마쳤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건물 개축 공사로 인해 잠시 연구실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자연대학 교수 한 분의 배려로 해양학 실험실 가운데 하나를 연구실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 도중 미국으로 건너가 태평양 연안에서 얼마 동안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때 역자는 자주 들르던 바닷가 어느 주점의 발코니에서 파도와 갈매기와 펠리컨에 우두커니 눈길을 주다가 숙소로 돌아와서 이 소설의 번역을 계속하기도 했다. 우연이긴 했지만, 이처럼 역자는 광포한 바다와 인간 사이의 싸움을 다룬 이 소설에 대한 번역을 바다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곳 또는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진행했다. 해양학 실험실의 분위기와 태평양 연안의 바다는 이 소설을 번역하는 역자에게 실로 각별한 감흥을 불러일으켰으니, 번역을 하는 동안 내내 역자는 소설 속의 정경이 시시각각으로 현재화되어 역자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끝으로 제목 번역과 관련하여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짤막한 소개의 글을 마치기로 한다. 이는 너무도 유명한 소설이기에 작품 자체에 대한 번역이 시도된 바도 있지만 미국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제목만 따로 우리말로 번역하여 소개된 적도 여러 번 있다. 이를 검토해 보면, 이 소설의 제목은 ‘난파선’이나 ‘무갑판선’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고, 또는 ‘구명선’으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오픈 보트(the open boat)’란 갑판도 없고 햇빛이나 비바람을 피할 보호막도 설치되어 있지 않은 배, 그러니까 아무 설비도 없는 일종의 거룻배를 말한다. 물론 소설 속의 ‘오픈 보트’는 배가 조난을 당했을 때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배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난파선’이라는 번역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인명 구조를 위한 작은 배 자체가 난파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울러, ‘무갑판선’이라는 번역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그 의미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구명선’이 가장 적합한 번역일 수 있겠다. 하지만, ‘구명선’의 ‘선’(船)은 배를 지칭하는 일반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소설에 등장하는 아주 작은 배의 느낌을 전하기에는 이 역시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구명정’으로 번역해 보았는데, ‘구명정’의 ‘정’(艇)은 ‘작은 거룻배’를 뜻한다는 점에서 원래 제목의 의미를 가장 잘 전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배에 설치된 구명정들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구명정과는 느낌이 다른 것일 수 있다. 이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뾰족한 묘안이 없어 그냥 ‘구명정’으로 옮기기로 한다. 보다 더 적절한 우리말 번역이 있다면 역자에게 깨우침을 주기를 독자 여러분께 부탁한다.
■ 죽음은 변덕스러운 삶의 가장 강렬한 체험
-김다은 추계예술대 교수
죽음을 앞둔 한 친척을 관찰하는 소년의 시선과 그 죽음을 실제로 겪는 발다사르 자작의 내면적 변화를 극명하게 변주한 작품이다. 어릴 때부터 천식 발작으로 병과 죽음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프루스트 특유의 감수성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이 단편소설은 후에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을 위해 꼭 필요했던 ‘습작’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와 그것을 바라보는 소년의 변덕스러운 심리 변화에 대한 묘사가 이 소설을 읽는 재미라 할 것이다. 특히 소년 화자가 어른들의 죽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언젠가 자신도 겪고 될 운명임을 깨닫고 죽음의 망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무들과 산에 은둔을 시도하지만, 곧 어머니의 품에 안겨 천진난만한 소년의 세계로 돌아가는 모습은 코믹한 슬픔을 자아낸다. 반면에 자작은 자신이 곧 죽으리라고 생각했으나 한동안 회복의 기미를 느끼자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에 날카로운 불안감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욕망이 다시 일기 시작하고, 죽음을 기다리며 절망하던 그 동굴의 시간을 도리어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그것도 잠시 다시 병이 깊어지자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절망하면서도 질투와 열정 그리고 자작이라는 귀족 신분의 자존심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데 인간의 가장 변덕스러운 일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의 백미는 자작이 죽는 장면의 묘사이다. 의사가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선포하는 순간, 지인들이 일제히 자작 곁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의 눈에 자작은 이미 죽었지만, 자작은 그 순간에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키스해 주던 어머니, 저녁에 그를 자리에 눕히고 그가 잠들지 못할 때면 곁을 떠나지 않고 발을 덥게 해주던 어머니, 누이가 노래 부르던 정원에서의 저녁들, 그가 장차 위대한 음악가가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던 가정교사의 말, 그 아래서 약혼식을 올렸던 큰 보리수, 그리고 첫 약혼이 파혼되던 날도 눈앞에 보였다. 늙은 하녀에게 키스하고 처음 바이올린 음악을 듣던 생각도 났다. (…) 이 모든 것이 마치 들판 쪽의 창문으로 저절로 들어오듯 그는 (…) 아련하게 보고 있었다.”
죽는 ‘순간’에, 죽음이 선언되고 2초가 지나가기도 전에, 자작은 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들판 쪽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펼쳐지는 현상을 경험한다. 이는 심장이 더 뛰지 않아 피가 돌지 않는 신체 내의 생물학적 변화라고 하는데, 예술작품에서 자주 다뤄지는 소재이기도 하다. 특히 프루스트의 시간에 대한 천착과 함께 이 생리학적 현상의 문학적인 의미를 질문하게 만든다. 인간은 왜 이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인간은 나이와 함께 시간이 점점 빠르게 흘러감을 느낀다. 젊었을 때 시간을 길게 느끼는 것은 처음 경험하거나 낯선 것 그리고 중요한 것을 매우 집중해서 경험하기 때문이고, 나이가 들어 반복 경험으로 뇌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시간이 사라진다고 한다. ‘죽는 순간’은 전 생애를 통해 처음 마주하는 낯설고 가장 강렬한 체험일 수밖에 없다. 뇌가 더없이 집중하기에, 몇 초에 전 생애가 영사막처럼 펼쳐지는 모양이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생전에 7편 5권 중 4편까지 발표했지만, 나머지는 유작으로 완간되었다. 1927년 『되찾은 시간』이 간행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작업이 완성된다. 죽음의 순간에 삶의 일생을 돌아보아 완성하는 「발다사르 실방드의 죽음」의 방식과 유사하다.
■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 너무나 끔찍한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인생은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그래서 너무나 끔찍했다.” (p41)
이반 일리치는 러시아 제정시대의 부패한 관료사회에서 신분 상승을 지상 목표로 하는 야심찬 법관(판사)다. 그의 야심 탓인지, 본래 천성인지 소위 ‘상류사회’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입던 옷처럼 잘맞았다. 그는 쾌락과 정욕, 허영에 몸을 맡기면서도 업무적인 능력을 증명할 정도의 열정을 갖고 있었고, 사교계에서도 재미있고 재치 있는 인물로 통했다. 업무적인 권한과 사람들의 경외심을 함께 즐겼고, 자신이 응당 누려야할 자리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치고 올라갔다.
“말하자면 그는 평생 동안 유능하고 쾌활하고 싹싹하고 사교적인 남자, 하지만 자신의 의무로 여기는 일은 엄격하게 실행하는 남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의무로 여기는 일은 높은 양반들이 그의 의무로 생각하는 일, 바로 그것이었다. 소년 시절에도, 어른이 된 뒤에도 그는 결코 남에게 아첨하는 일이 없었지만, 파리가 빛에 끌려들 듯 지체 높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의 천성이었다.” (p42)
훌륭한 관리라는 평판 속에 승승장구하던 이반 일리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당히 좋은 가문에 약간의 유산, 못생기지 않은 편인 외모를 갖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 가정도 이룬다. 하지만 부부관계는 곧 서로에 대한 원망과 간섭으로 점철되고, 가정은 그저 더 많은 연봉과 더 큰 집을 강요하는 빚쟁이에 지나지 않는 곳이 된다. 하지만 뜻밖의 기회를 잡아 그는 만족스러운 연봉을 보장하는 새로운 직책을 따낸다. 더불어 그와 아내의 허영에 걸맞는 집을 찾아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간다.
“사실, 그 집의 실내장식은 그다지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재산이 많지 않으니까 독특한 멋은 부릴 수 없고, 따라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흉내 내는 데만 성공할 뿐이다. 그들의 집에는 어김없이 다마스크 천으로 만든 시트와 식탁보, 흑단 목재, 화분, 깔개, 둔탁한 빛을 내는 청동 제품 따위가 갖추어져 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비슷해지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두는 것들이다. 이반 일리치의 집도 다른 사람들의 집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했지만, 그의 눈에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집처럼 보였다.” (p60~61)
이반 일리치는 다시 만족스럽고 충실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무도회를 열어 상류층 명사를 초대하고, 유력인사나 젋은이들의 방문을 받으며 과시하는 번지르르한 삶.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이렇다 할 변화도 없이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갔다. 인생은 즐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p66)
하지만 집 수리 중 사다리에서 삐끗하며 부딪힌 옆구리 통증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유명하다는 의사의 진료를 받고 꾸준히 약을 먹었지만 이제 고통은 업무를 지속할 수 없을 만큼 그를 힘들게 하고 만다.
“하루하루가, 아니 순간순간이 그에게는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이해해주거나 동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누구의 이해나 동정도 받지 못한 채,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혼자 그렇게 살아야 했다.” (p79)
“주위 사람들이 그의 죽음이라는 엄숙하고 무서운 행위를 (마치 누군가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객실에 들어온 것처럼) 우발적이고 불쾌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사건 정도로 끌어내린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그가 평생 동안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온 바로 그 예의범절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누구 하나 자기를 동정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99)
그는 병마의 고통에 시달리며 무력감과 절망 속에 천천히 죽어간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심리가 그렇듯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등을 들쭉날쭉 오가며 살고 싶다는 욕망에 발버둥친다. 그럼에도 그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배변을 남의 손에 맡겨야 했고, 젊은 하인의 어깨에 다리를 올려놓지 않고서는 잠도 자지 못하는 지경이 된다.
“요즘 들어 그는 자신이 직접 꾸민 객실?그가 사다리에서 떨어진 바로 그 객실?에 자주 들어가보곤 했다. 그때 창문 모서리에 부딪힌 것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객실을 위해 그는 목숨을 바친 셈이었다(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p91)
그가 이처럼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관심은 다른 데 쏠렸다. 그의 죽음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한 계산에 분주할 뿐, 시시각각 이반 일리치의 목을 조아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끝없는 고통에 무심했다. 그의 죽음을 앞두고도 가족과 사윗감은 화려한 옷차림으로 오페라 극장에 나서고, 그 젊음과 생명감에 대비되는 자신의 고통 속으로 그는 더 큰 절망에 빠진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서서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가 병을 앓은 지 석 달이 지나자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가 법관 자리에서 곧 물러날 것인가 어떤가에만 쏠리게 되었다. 그의 아내와 딸, 아들, 친지들, 의사들, 하인들도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민감하게 알아차린 사람은 바로 이반 일리치 자신이었다. 그가 언제쯤이면 세상을 떠나 그의 존재가 야기하는 불편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마침내 해방시켜주고, 그 자신도 고통에서 해방될 것인가가 다른 사람들의 유일한 관심사였다.” (p93)
“자신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게라심이 옆방으로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무력함, 끔찍한 고독, 인간의 잔인함, 신의 잔인함 그리고 신의 부재를 한탄하며 흐느껴 울었다. “주여,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왜 나를 이 세상으로 데려왔습니까?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이토록 괴롭히십니까?””(p115)
“상상 속에서 그는 즐거웠던 인생에서도 가장 좋았던 순간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즐거웠던 인생의 좋았던 순간들 가운데 어떤 것도 이제 와서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즐겁거나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몇몇 기억들을 제외하고는…….” (p116)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났건만, 그 모든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지겨워질 뿐이었다. ‘나는 위로 올라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동안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던 모양이군. 아니, 그런 모양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어. 사람들 눈에는 내가 위로 올라가고 있었지만, 그만큼 생명은 썰물처럼 나한테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제 생명은 다 끝났고, 남은 건 죽음뿐이야.’”(p117~118)
““그게 우리 탓인가요?” 리사가 어머니한테 말했다. “꼭 우리 탓인 것 같잖아요! 아빠가 가엾긴 하지만, 왜 우리가 고통을 받아야 하죠?” (p124)
이반 일리치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리며 후회와 상념, 원망과 분노에 빠진다. 그리고 체념과 화해, 용서로 승화되다 다시 분노 속으로 내동댕이 쳐지기를 반복한다. 드디어는 죽음에 대해 묻고 스스로 답하기 시작한다. 또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전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일, 즉 자기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결국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지위 높은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는 것과 맞서 싸우려고 애쓴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런 노력은 겨우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한 것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그런 가벼운 충동을 느껴도 당장에 억눌러버리곤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미미한 노력과 가벼운 충동만이 진짜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직무도, 생활도, 가족에 대한 약속도, 사교상의 관계는 물론 업무상의 관계도 모두 가짜였을지 모른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변호하려고 애썼지만, 자기가 변호하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불현듯 깨달았다. 변호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반듯이 누운 채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아침에 먼저 하인을 보았고, 다음에는 아내를 보았으며, 다음에는 딸을 보았고, 그다음에는 의사를 보았다. 그들의 언행 하나하나가 간밤에 그가 깨달은 무서운 진실을 뒷받침해주었다. 그것들 속에서 이반 일리치는 자기 자신, 즉 그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가짜이며, 삶과 죽음을 덮어버린 무섭고도 거대한 기만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러한 자각은 육체적 고통을 열 배나 가중시켰다. 그는 신음하며 마구 뒹굴었고, 숨이 막혀서 옷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아내와 딸과 의사를 증오했다.” (p125~126)
마지막 사흘간 계속된 고통, 그 끝에 그는 깨닫는다. 그의 여윈 손에 입맞추며 기도하는 막내아들을 보며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인다.
톨스토이가 58세(1886년)에 발표한 단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대작들 대비 짧지만 대표작 목록에 반드시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혁명 전 러시아의 부패한 사회에 대한 톨스토이의 가장 강력한 비판이 담겼다는 평가가 많다.
해설에서 작가 이문열은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이 캐릭터, 스토리, 진행 모두 사실상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매우 흡사하다고 지적하면서도 두 작품 모두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라고 평가했다. 더불어 “작가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와 더불어 러시아 문학의 양대 거봉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정신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다. 거기다가 80세의 고령을 누리면서 남긴 문화적 유산과 일화도 많아 그를 짧게 요약하기는 불가능하다. 톨스토이에 관해 알고 싶으면 역시 시간을 따로 내기를 권하고 싶다”고 덧붙인다. (p134)
☞ 메멘토 모리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 카드놀이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의 저자, 인생학교 설립자)
☞ 톨스토이의 작품 중 가장 예술적이고 가장 완벽하며 또한 가장 정교하다. - 블라지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의 저자)
■ 간결한 죽음에의 과정 - 잭 런던 「불 지피기 To Build a Fire」
한 사내가 영하 80도의 맹추위에 유콘강을 따라 길을 나선다. 봄이 오면 상류에서 통나무를 베어 강으로 옮기는 경로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거리는 한나절 걸으면 되는 정도, 그는 비스킷 빵을 점심 삼아, 늑대개를 동행 삼아 길을 나섰다.
“몸을 돌려 길을 계속 가다가 그는 얼마나 추운지 알아보기 위해 침을 뱉었다. 침이 날카롭게 파열음을 내며 얼어붙어 그를 놀라게 했다. 다시 침을 뱉었다. 그러자 채 눈에 떨어지기도 전에 침이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마이너스 50도에서는 침이 눈 위에서 얼어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공중에서 얼어붙는 것이었다. 마이너스 50도 이하는 분명했지만 정확히 얼마나 추운지는 몰랐다.” (p197)
그는 소위 ‘체카쿼’라고 불리는 신참일 뿐 바보가 아니었다. 빈틈없고 재빠른 ‘빠릿빠릿한’ 사내다. 다만 경험이 부족하고 ‘영하 80도’라는 것에 대한 실감이 없었다면 설명이 될까. 이미 추위에 감각 없는 광대뼈와 코를 문지르면서도, 뱉은 침이 떨어지기도 전에 얼어붙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대단한 추위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입김이 얼어 수염에 고드름처럼 늘어져도.
“확실히 추운 날씨라고 그는 생각했다. 설퍼 수로 쪽에서 온 노인이 이 지방엔 때때로 무시무시한 추위가 온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그는 노인을 비웃지 않았던가! 이는 아무도 세상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알려주었다. 분명한 사실이었다.” (p205)
영리하게도 사내는 이런 추위에도 제대로 얼지 않은 강의 위험을 잘 피해 점심 무렵까지도 무사히 일정을 소화했다. 쉴 틈 없이 강 주변의 지형과 위험, 특이점을 살피며 꼼꼼히 기억해두면서. 하지만 대개의 사고가 그렇듯 미숙함과 부주의가 불운의 시작이었다.
“불은 잘 탔다. 이제 안전했다. 설퍼 수로 쪽에서 온 노인의 충고를 기억하고는 미소를 지었다.이 노인은 아무도 마이너스 50도 이하의 기온에서는 클론다이크 지방을 혼자 여행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을 매우 진지하게 세워놓았던 것이다. 그래, 그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여기 살아 있다. 혼자이지만 목숨을 건진 것이다. 저 노인네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은 여자 같은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라면 겁을 내지 말아아 한다. 그리고 그는 멀쩡했다. 정말 사내대장부라면 혼자서 여행할 수 있어야 한다.” (p209)
“그러나 그가 신발 끈을 자르기 전에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잘못 아니면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전나무 밑에서 불을 피우지 말았어야 했다. 나무가 없는 빈터에 불을 피웠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숲에서 잔가지를 끌어다가 불에 직접 던지기가 훨씬 쉬웠다. 그가 나무 아래에서 불을 피웠는데, 그 나무는 그 큰 가지 위에 눈을 이고 있었다. 몇 주일 동안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잔가지를 끌어모을 때마다 진동이 생겨 약간씩 나무가 흔들렸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미세한 진동이었지만, 문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진동이었다. 저 높이 있는 나뭇가지에서 눈이 쏟아져내렸다. 이 눈이 그 아래쪽의 나뭇가지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거기에 있던 눈도 또 쏟아져내렸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나무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결국 눈사태처럼 커지면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사나이와 불을 덮쳐버렸다. 불은 꺼지고 말았다.” (p210)
어떻게든 저녁식사 전에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도착하려는 사내는 점심 때 잘 피운 불을 서둘러 버리고 길을 재촉하다 젖은 군화를 깨닫는다. 다시금 얼어가는 손으로 어렵게 불을 지피지만 눈 쌓인 나무 밑인 탓에 결국 반쯤 녹은 눈을 뒤집어쓴다. 불은 꺼지고 이제 몸에는 감각이 사라졌다. 성냥을 켤 수 없을 정도로 얼어 감각이 사라진 손으로 간신히 켠 성냥은 기침에 꺼지고, 다시 붙인 군불은 부주의로 또 꺼졌다.
“사나이는 조심스럽지만 둔한 동작으로 불을 간수했다. 불은 생명을 뜻하기 때문에 꺼지지 않게 해야 했다. 몸 표면에 피가 없어 그는 오한이 났고, 그래서 동작이 더욱 둔해졌다. 꽤 큰 새파란 이끼 덩어리가 작은 불 바로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이끼를 꺼내려고 했으나, 몸이 떨렸기 때문에 이끼에서 빗나갔고, 그 결과 그나마 작은 불 한가운데를 헤집어놓고 말았다. 타던 풀과 작은 가지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다시 이것들을 집어 모으려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나뭇가지들은 다시 모을 가망이 없을 정도로 산산이 흩어졌다. 하나씩 연기를 피식 내고는 나뭇가지의 불이 꺼졌다. 불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p215)
“개를 보자 야만적인 생각이 들었다. 눈보라를 만났을 때 소를 죽여서는 그 사체 안에 기어들어가서 목숨을 구한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개를 죽여서 따뜻한 몸 안에 손을 묻으면 손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새로 불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p216)
“그러나 개의 몸통을 두 손으로 잡고 앉아 있는 것 이외에 사나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개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무력한 두 손으로는 칼집에서 칼을 빼서 손에 쥘 수도 없었고 개의 목을 조를 수도 없었다. 그가 개를 놓아주자 개는 꼬리를 다리 사이에 감추고 계속 짖어대면서 미친 듯이 튀어 달아났다. 마흔 걸음쯤 물러나서는 멈춘 다음 두 귀를 쫑긋 앞으로 세우고 호기심을 갖고 사나이를 관찰했다.” (p217)
이제 사내는 자신이 불을 다시 켤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개를 죽여 몸을 덥히려는 참혹한 생각까지 했지만 역시 그 몸으로는 어림없는 일. 추위에 노출된 얼굴과 손을 시작으로 감각이 사라지고 몸속의 피가 점점 느리게 흐르는 느낌이 그를 엄습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희미하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중압적인 공포가 사나이에게 다가왔다. 이번 일이 단순히 손가락과 발가락이 언다든지 혹은 손발을 잃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을 가능성이 높은 생사의 문제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포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러자 그는 힘이 빠졌다. 방향을 틀어 수로 바닥을 넘어 오래된 희미한 길을 따라 뛰었다. 개가 합세하여 그를 따랐다. 평생 몰랐던 공포를 느끼며, 아무런 의도도 없이 맹목적으로 뛰었다.” (p218)
그는 달리고 있다, 그것도 꽤 빠른 속도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이미 관속에 들어가 앉은 상태였던 그다. 달리기로 몸의 피가 빨리 돌기보다 오한이 덮쳐오는 게 더 빨랐다.
“이번에는 그에게 오한이 좀 더 빨리 닥쳤다. 동상과의 싸움에서 지는 중이었다. 동상은 사방에서 그의 몸으로 기어들고 있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다시 달렸지만, 100피트 정도 달리고는 멈추었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최후의 고통이었다. 숨을 제대로 쉬고 자제력을 회복했을 때, 그는 앉아서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다른 식으로 다가왔다. 그에게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니라 목이 날아간 채 뛰어다니는 닭처럼, 바보 같은 자신의 모습이었다. 글쎄, 어쨌든 얼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 사실을 점잖게 받아들여야 마땅하리라. 이렇듯 새로 찾은 마음의 평화와 함께 처음으로 희미한 졸음이 다가왔다. 그의 생각으로는, 자다가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취당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얼어 죽는 것이 사람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더 험하게 죽는 방법도 많지 않은가.” (p220~221)
공포와 환각, 그리고 쏟아지는 졸음, 그렇게 끝이다.
““노인장 말씀이 옳았소. 당신 말씀이 옳았던 것이오.” 사나이는 노인에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사나이는 평생 맛본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개는 그를 쳐다보면서 앉아 기다렸다. 짧은 낮이 거의 끝나면서, 긴 황혼이 서서히 다가왔다.”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