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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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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저
2021년 06월 24일
메시지는 공감. 하지만 저자의 한계는 명확
다정한 무관심은 일상 속의 사례들을 통하여 개인주의를 역설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에서 '개인주의'라는 용어가 이기주의와 유사한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용어로 오용되는 것을 지적하고, 이는 그만큼 한국 사회가 집단주의에 찌들었다는 방증이라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개인주의는 '평소에는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고 존중하나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 때는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 다시 말해 '다정한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도사리는 개인에 대한 무시들을 찾아내고 이를 시정해야 할 것을 어렵지 않은 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선을 지키되 연대의 가능성을 놓지 말자는 저자의 메시지는 충분히 공감이 갔다. 과거에 많이 좋아졌음에도 한국 사회 자체가 워낙에 빠름을 추구하며 서로에 눈치를 많이 주는 문화다 보니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에 대한 피로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차별과 몰이해를 제시하며, 스스로의 말에는 좀 더 조심을 하고 남이 처한 상황에 대한 더 넓은 이해를 가질 것을, 무엇보다 상대를 여성이네 주부네 하는 어떤 카테고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 봐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저자가 60년대 후반생 여성으로서 한국에서 겪은 재취업의 문제, '여자라서 안 되' 같은 무례한 언행. 또는 무례한 택배 기사나 택시 기사를 보며 짜증을 내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 역시 큰 비애가 있다는 일화 등은 기억에 남는다. 특히 상대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농담이에요' 하고 넘어가는 것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말은 필자도 항상 생각하던 내용이기에 공감이 갔다. 스스로가 어떤 의도로 말을 했던 상대가 그를 무례하다고 받아들였다면 우선 상대의 불평을 제대로 경청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솔직히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는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는 것을 밝혔을 때의 사회적 낙인을 알면서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소개한다고 서문에서부터 밝힌다.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을 그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라 말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성을 넘어 소수자의 권리를 찾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근래 화제가 되는 속칭 꼴페미, 좀 더 구체적으로는 이화여대 트렌스젠더 입학 거부 사태 같은 극단에는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 밝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페미니즘에 대한 비방은 '사회에서는 언제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이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그런 이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논법과 무엇이 다른가?'하며 옳지 않다고 말한다.
최근 페미니즘에 우호적이라 밝히는 분들의 책을 몇 권 볼 때 느껴지는 위화감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사상이자 운동이다. 사회에 직접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사상은 그 자체의 논리도 중요하겠지만, 그게 사회에서 실제로 발현될 때 어떤 모습을 취하는지도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공산주의도 구호 자체는 아름다웠으나 현실에서는 가난과 잔혹한 독재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공산주의에서 일부 극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방향이 좋은 이념인만큼 비방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이는 극단적인 비교이긴 하다. 다만 해당 사상 자체가 선의를 품고 시작했다는 것이, 그 사상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부작용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지금 일베, 오유 등의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가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받는 것은 어째서인가? 비율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별다른 활동 없이 그저 재미로 해당 커뮤니티에 접속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이들이 더 다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커뮤니티의 흐름을 이끄는 이들이 극단적이고 그들이 과대대표되는 것이 정제가 안 되니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것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의 시작이 어쨌건 그것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그리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비판받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반론은 페미니즘이 한국 사회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페미니즘은 좋은 운동이야'라는 수준의 원론적인 답변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답변은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성에 기반한 것이기에 비겁하게까지 느껴진다. '기업에서 숏컷이면 페미냐며 묻는 세태'라고 한탄하는데 애초에 그 원인 제공을 누가 했는지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페미니스트 특유의 성차별적인 서술이 몇 군데 나타난 것은 저자가 최소한 성별 문제에 한해서는 본인이 부르짖는 '다정한 무관심'을 그리 잘 실천하지는 못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본인이 겪은 고용 문제나 성차별적 발언 같은 건 괜찮았다. 그런데 남성들 사이에서 여성을 품평하는 저급한 농담에 대해서 비판을 하더니, '자신은 딸의 성장은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 여자처럼 크면 된다. 하지만 아들이 어느 순간 바깥의 (저급한) 남성 문화에 물들까봐 걱정이 된다'라는 언급까지 나온다. 솔직히 이러한 생각을 품은 이가 아들과 딸을 정말 평등하게 대할지 개인적으로는 좀 의심스럽다. 아니 딸이 공주님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면 딸이 '고전 동화에 나오는 수동적 여성상'을 학습할까봐 솔직히 염려되었다 는 말을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딸에게 '저자 자신이 원하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학습시킬지도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이성을 저급한 언어로 품평하는 것이나 또래집단의 부정적 문화는 남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님에도 은연 중에 모든 부정적인 요소를 남성에게 몰아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데이트 폭력으로 신체적 위험을 느끼는 여성이 다수고 남성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기에 기계적 중립을 지키면 여성이 실제적으로 느끼는 위험이 축소된다고 하는데, 이는 동시에 그게 소수일지언정 일부 남성이 젠더 문제에서 느끼는 고통은 '별 것 아니다'로 치부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역시 '다정한 무관심'은 아닐 것이다.
정리하면, 저자가 서문에 걸어놓은 메시지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젠더 문제 관련한 일부 언급에서 본인 역시 '다정한 무관심'을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한다는 걸 증명한 게 아닌가 싶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자는 이기주의자로 몰리기 쉽다. 타인에 대해 가치관을 강요하고, 타인을 사회나 특정 집단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단주의를 강요하는 사람일 수록 이기적이고 공동체의 선보다는 공동체 내 자신을 포함한 특정 소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젠더, 연령, 출신 등에 따라 특정 범주에 몰아 넣어 구분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또다른 경향이다. 겉과 속이 같은 수구 기득권보다 개인적 부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를 더 비난하는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어떤 면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공동체적인 개인주의,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서로 존중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에 대응하고자 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집단의 과오를 개개의 구성원에게 환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공동체적인 개인주의자의 모임이 반드시 훌륭한 공동체를 만드는 충분조건인 지는 모르겠다. 저자는 개인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온갖 인터넷 댓글에 반응하는 사이 은연 중에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상대주의의 오류에 빠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정한 무관심을 기반으로 개인주의를 추구하되,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가치 판단을 내려놓을 때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다소 센치한 제목에 이끌려 읽게된 인문에세이.
장기화된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이 가던 차에
읽기좋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책을 다 읽고나니 평소에는 사소하게 잠깐 생각했지만 지나쳤을 여러 이야기들의
묶음집같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다이어리에 끄적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과 화두로
내세우고 이야기하기엔 무거운 딱 그정도의 이야기들.
우선 내가 생각해왔던 개인주의의 정의와 저자가 이야기하는 개인주의는 거리감이 있었다.
스스로는 잘 챙기지만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나 무관심한 행동들을 개인주의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저자가 다루는 개인주의의 범위는 꽤 넓다. 개인주의보다도
불평등과 편견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고 느꼈다.
차례만 보더라도 다양한 이야기들의 묶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얘기와 같은 예민한 이야기도 중간에 있는데도
워낙 다양해서 희석되어 읽기에 편안했다.
딱 꼬집어 어떤 주제와 논쟁거리가 좋다고 표현하기 애매하지만
저자가 여성이기에 아무래도 여성의 차별과 사회적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실려있었고, 나도 여성이기에 공감했던 내용이 많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저자의 논리정연한 문체가 와닿기도 한다.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무관심과 편견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생각들'
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었다. 그리고 그의 갈비뼈를 취해 ‘이브’를 만들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는 개인으로 태어난다. 부모에게서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담이 그랬듯, 사람은 홀로 외로이 존재한다. 하지만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아담이 이브와 갈비뼈로 연결되어 있듯, 우리는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람에게 연결은 불가피하다. 각자 태어난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를 만들었다. 서로에게 연결된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
연결은 공통점에서 비롯한다. 공통점을 기반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제는 사람사이에 차이는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능력, 지능, 성향, 경험은 모두 다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모든 것을 고려할 수 없는 존재다. 개개인의 한계만큼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개인의 한계를 넓히는 일이 쉽지 않다. 우선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공감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서로를 존중하며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이런 책을 읽거나.
여기서 중요하게 느껴는 지점은 한계다. 사회를 구성하고 이어주기 위해서는 존중과 배려가 필수적이지만, 그 한계를 어디까지냐 따라 오지랖이거나 지나친 간섭이 된다. 꼰대 논쟁도 어떻게 보면 한계의 문제다. 과거와는 다르게 평생직장은 존재하지 않고, 가족 같은 회사는커녕 x같은 회사가 아니길 바란다. 오랜 상사와 신입의 입장차는 분명하다. 한계점이 다르다. 윗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강요하면 꼰대가 되는 것이고, 신입이 자기의 한계를 강요하면 젊꼰이 되는 셈이다. 서로가 차이나는 것은 당연하다. 한계치를 어디다 두느냐가 갈등의 기준이 된다.
다양성은 오히려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 저자가 제안한 ‘다정한 무관심’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말한다. 자유의 시대,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독이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강변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다정한 무관심’이야 말로 세심한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상대를 온전히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적당히 무관심해 질 수 있다.
저자의 견해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한다. 한계는 사람마다 다르다. 저자의 한계는 분명 존중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그와 동일한 임계점을 가질 필요도 없고 가질 수도 없다. 다만, 이런 한계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도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앞서 말했듯 개인은 완전하지도 않고 완전할 수도 없다. 서로 다른 개인들이 만나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갈비뼈가 필요하다.
집단주의, 사회의 통제력은 강력하다.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개인을 옥죄고 숨 막히게 한다. 생존이라는 명목 하에 스스로를 울타리에 가둔 셈이다. 적당한 무관심은 그 울타리를 성기게 해준다. 숨 쉴 공간, 움직일 폭을 넓혀준다. 하지만 그 울타리가 얼마나 성겨야 답답하지 않는지, 아니면 그 울타리 자체가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한 단어일지 모르겠다. 나와 다른 한계점을 가진 사람을 본다면 다정하게 대하기는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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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섬이자 대륙의 일부다. - 존 딘 p.4
이기주의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라면,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동등한 존재, 똑같은 욕구를 지니고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한 까닭으로 개인주의자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다르게 오히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다. 공동체를 개인의 대립항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오롯이 개인인 상태로 머물게 하는 일종의 보호막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는 집단과는 다르며, 개인주의자는 연대의 중요성을 안다. 집단의 규칙이기에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개인으로서 다른 개인과 연대한다. 타인도 자신처럼 소중한 존재로 인식하고, 타인의 욕구와 감정 또한 자신의 것만큼 중요시 여긴다. 자신(p.9)의 권리가 소중하기에 그만큼 타인의 권리도 존중한다. ... 나는 개인주의에 대한 사회 일반의 경계와 거부감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집단주의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p.10
인간은 본래 불안한 존재이며, 불안한 개인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에너지와 충동을 잊기 위해 몰두할 대상을 찾아 자주 헤맨다. 그리고 대상을 찾아낸 이후에는 불안과 번뇌를 잊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거나 헌신적으로 돌변한다. 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불안한 자아를 잊고자 하는 것이다. ... 종교나 정치, 어떠한 이념이 되었을 때는 종종 큰 문제가 생겨나기도 한다. (p.15) ... 자아를 잃어버리고 집단에 의탁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타 집단에는 격렬한 배척과 혐오감을 갖기 쉽다. / 결국 집단과 무리에 기대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회 전체의 갈등과 분열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된다면, 불안과 결핍을 잊고자 무언가에 의탁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 한 명의 개인으로서 우뚝 선다면, 사회의 많은 부분이 좀 더 개선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우리 모두가 개인주의자가 되고자 지금보다 애쓴다면, 그러한 세상에 조금 더 근접해질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p.16
‘개인’이 되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기도 하다. 인종, 성별, 국적 등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강제적인 조건 속에서, 그 뒤에 자주 따라붙곤 하는 특색으로 손쉽게 규정되지 않고,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한 명의 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주로 ‘다수’의 구성원에게만 허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p.17
내가 원하는 것은 아이가 다양한 선택지를 앞에 두고 자신의 취향을 갖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타인의 취향도 존중할 줄 아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성별에 지배받지 않는, 한 명의 개인으로 자라는 것이다. p.32
검열이라는 것은 소수자성을 띌수록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므로. p.60
소수자, 마이너적인 정체성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되, 티 내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을 ‘커버링’이라고 부른다. 커버링은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저서 <낙인>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요약하자면 “어떤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행위”를 이야기한다. p.63
평가라는 것은 일방적이기 마련이고 평가 당하는 대상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러한 평가에 자동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손쉽게 우위를 점하고 권력을 잡는 방법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p.75
실은 견디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p.115
기계적인 평등과 중립의 강조는 종종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p.122
범죄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쉽게 외치고는 한다. 저 나쁜 놈들, 짐승 같은 놈들, 괴물들. /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가해자 역시 피해자만큼이나 입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p.135
성폭력은 뿔 달린 괴물만이 아니라 아무나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성폭력은 ‘괴물’만이(p.138)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착한 내 아이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에야 더욱 강력한 책임이 따라오도록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소중한 아이들이 ‘실수’할 위험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다. ... 성폭력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는, 우리 모두와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거기 따르는 강력한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는(p.139)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설사 그럴 만한 ‘기회’가 오더라도 한순간의 호기심이나 충동으로 ‘실수’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p.140
“내가 한 것이라곤 살아남은 것뿐인데 나는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T 크리천 밀러, 켄 암스트롱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p.294) ...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완벽한’ 피해자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악마’나 ‘괴물’처럼 철저하게 악의로 똘똘 뭉친 ‘완벽한’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피해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피해자는 없다. p.155
이와 같이 먹고사니즘에 상당히 관대한 한국 사회가 여성의 먹고사니즘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여성은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마치 먹고사는 일과 무관한 존(p.160)재인 것처럼 여긴다. ... 성폭력일 경우, 그것을 직장 내 위력에 의한 부당한 처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사생활로 인식한다. p.161
설령 정말로 ‘농담’이었다고 할지라도, 이 일방적이기 짝이 없는 대화는 일종의 권력 지형도를 보여준다. 군대의 고참이나 직장 상사에게 아무렇지 않게 농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p.189) ... 눈치는 약자의 언어라고 한다. 본인들도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그토록 무신경하면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용감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다. p.190
친절은 체력에서 나온다. 상냥함은 건강에서 나온다. 하루 종일 일해서 지친 사람이 성질을 부린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p.200
돈을 번다는 것과 ‘살 만하다’는 것의 의미가 꼭 같지는 않다는 것을. 하루 종일 노동을 해서 돈을 벌수는 있지만, 그 삶이 반드시 인간답다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p.203
힘겨운 노동 현실을 아는 것은 최소한의 의무 p.204
수면은 우리의 건강에 생각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잠을 잘 ‘시간’을 판매하는 것은 ‘건강’을 판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신체의 장기를 내다 파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p.212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종종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즐기고 향유하는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을 담보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할 동안 그 이면에는 실제로 해당 문화로 인해 억압받고 상처를 입는,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p.279
“증오는 우리의 부적합함, 쓸모없음, 죄의식, 그 밖의 결함을 자각하지 못하게 억누르려는 필사적인 노력의 표현이다. 여기서 자기 경멸이 타인에 대한 증오로 변질되며, 이 변질을 숨기기 위해 매우 단호하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 에릭 호퍼, <맹신자들> p.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