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천선란 저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저/황가한 역
델리아 오언스 저/김선형 역
이미예 저
'히아신스'라는 폴란드 퀴어 영화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탄압 받았던 폴란드 동성애자들을 보고 몹시 충격을 받았다. 동성애자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서 당국에서 관리까지 하는 끔찍한 현실이 불과 몇십년 전에 일어났었다는, 혹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나라들이 만연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련된 책이나 영화를 좀 더 찾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헤엄치기>라는 소설을 만났다. 폴란드 배경의 근대 퀴어 소설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인지라 스토리 자체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2차 대전 이후로도 소련의 지배하에 사회주의 체재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말상당한 채 살아가게 된다. 70-80년대 폴란드의 칙칙하고 어두운 사회 분위기,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는 당국에 고발당해 노역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폐쇄된 공간에서 주인공 루드비크는 사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이유는 부패한 관리인들로 인해 갈수록 어려워 지는 생활고 탓도 있겠지만, 일찌감치 깨달았던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동성의 동급생을 좋아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주인공은 남들과는 다른 성향을 대학생이 되기까지 내색하지 못하고 숨겨 왔지만, 한 달 동안 농촌생활 활동을 가서 만나게 된 야누시를 보며 처음으로 표출한다.
야누시 또한 주인공과 같은 마음으로 차츰 서로를 알아 가고, 농촌 활동이 끝난 후 함께 여행을 가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바르샤바로 돌아와서도 친구 이상의 감정으로 서로 사랑을 하지만, 야누시는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려는 현실적인 태도를 보이고, 루드비크는 억압된 체제에 염증을 느껴 폴란드를 벗어나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어 한다. 현실을 대하는 두 사람의 이상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은 필연적이었고, 당의 고위 간부 딸인 하니아와 묘한 관계로 발전한 야누시를 바라보며 결국 주인공은 미국으로 떠날 결심을 하며 두 사람의 사랑이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한다. 퀴어 영화나 소설의 엔딩이 대부분 그러하듯 해피 엔딩은 아닐거라 예상했지만, 사회적으로 탄압 받는 주인공으로 인해 이 소설의 마지막은 특히나 안타깝다.
흔하게 접하는 소재가 아니라 무척 흥미로웠고,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에 대한 흥분과 갈등, 좌절, 비극 등을 낯선 나라의 현실로 잘 그려낸 소설이었으나, 오탈자가 유독 많고 번역의 흐름이 매끄럽지 않아서 읽으면서 좀 짜증이 나기도 했다. 4쇄까지 했는데, 그동안 오탈자 수정 한번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출판사에서는 반성을 좀 했으면 좋겠다. 작품에 오롯이 빠져들어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실망스럽지만, 푸른 배경의 음습한 사회주의 폴란드 근대의 모습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운 책이었다.
# 줄거리
루드비크는 어릴적 한 친구에게 끌어안고 싶은 감정을 느꼈다. 그 친구의 몸에 눈길이 가고 또 궁금했다. 하지만 친구는 이사를 가버려 만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대학생이 되어 농활을 간 곳에서 야누시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친구와 재회한다. 서로 모르는 체 했지만 끌림은 무시할 수 없었다. 농활이 끝난 후 둘은 여행을 하며 마음을 확인했지만, 야누시는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여행에서의 일을 비밀로 하자고 이야기한다. 둘은 비밀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야누시에게는 루드비크 외에 여자도 있었다. 사회주의 안에서 성공하기 위해 그 여자가 '필요'하다는 야누시... 자유를 찾아 둘이 떠나자고 하는 루드비크... 둘의 이념이 다르고 그에 따라 보이는 행보도 다르다. 루드비크는 자유를 갈망하지만 혼자가 되고싶진 않았다. 하지만 야누시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체제에 순응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 발췌
1)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내 기억이 불러낼 수 있는 그 얼굴에는 대강의 윤곽과 세밀한 세부가, 겨울철의 발트해와 똑같은 청회색의 눈동자가 있다. 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부터 창가로 어둠 속을 이동하는 사이 옷가지는 끝맺지 못한 생각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2)
누군가를 내게로 끌어당기고 싶다고 의식적으로 원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갈망은 안쪽 깊은 곳으로부터, 일찍이 한 번도 자각한 적은 없어도 즉각 알아볼 수 있었던 그곳으로부터 명료한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3)
네게도 그런 사람이, 어렸을 때 덧없이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너도 내가 맛본 수치심 같은 걸 느껴본 적이 있었을까? 나는 항상 너도 그래봤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간 행세하던 대로 평생을 무심하게 살아왔을 리는 없겠지 짐작했더랬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고통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시작한다. 아닌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고통받는 것은 아니라고. 여하간 같은 것 때문은 아니라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렇기에 너와 나, 우리가 가능했던 것이리라.
4)
네가 그곳에서, 나도 그곳에서, 바투 호흡하고 있었다. 이윽고 내가 너의 반경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는 너의 몸과 잠잠하게 터놓은 얼굴과 입술에 맺힌 물방울을 향해. 네 양팔이 나를 감싸 안았다. 세게. 이에 우리 둘은 바닥에 닿는 일 없이 호수에 무중력으로 떠 있는 하나의 몸이 되었다.
5)
너를 쳐다볼수록 자꾸만 몸에서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을 딛고 일어서자니 머리도 어찔어찔한 느낌이었고 시야마저 순간 흐려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심장이 두 번씩 뛰었다.
6)
"두려웠던 거지." 네가 속삭였다. "하지만 이제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거고." 네 입이 내 입을 덮었다. 네게서 내게로 담배 연기가 흘러 들어오며 폐 속으로 내려가 나를 가득 채우자 순간적으로 나는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 리뷰
루드비크가 야누시와 함께 남는 선택을 했어도 야누시는 루드비크에게 희생을 요구했을 거다. 여자를 임신시켰으니 어쩔 수 없다고, 이게 우리가 함께 성공하기 위한 쉬운 길이라 그렇게 타이르고 설득했을 거다. 야누시는 사랑이 맞긴 했을까? 아마 사랑이긴 했을 거다. 그러나 그 사랑의 무게가 사회 체제가 개인을 억누르는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야누시도, 루드비크도 각자의 사랑보다 삶의 무게가 더 무거웠을 뿐이다.
굉장한 작품이었다. 이렇게 마음을 울렸던 작품은 너무 오랜만이다. 책을 덮고도 울림이 한동안 가시지 않아서 이 말을 먼저 할 수 밖에 없었다.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그 완성도를 유려하고도 완벽한 번역이 도와줬다고 생각한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체제를 배경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았다. 책 소개를 보면 이 책을 퀴어 로맨스 소설이라는 장르로 구분해주고 있다. 전혀 모른 채 단순히 표지의 매력에 꽂혀서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폴란드의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그와 똑같이 어둠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희망없고 쓸쓸한 사랑이야기에 마음이 시렸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심경과 심리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탁월했다.
이것 또한 '사랑'이다. 대상이 누구이건 느끼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그 관계는 틀림없는 사랑인 것이다. 다만 이 사랑이 불안정한 것은 주변의 인정과 사회적 합의보다도 오로지 둘만의 신뢰와 마음이 기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을 것이다. 눈을 감고 물 속에서 헤어치는 책 제목 그대로 '어둠 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이 슬프디 슬픈 사랑을 이렇게 아름답고도 쓸쓸함으로 그려준 이 책이 내게 준 충격과 전율은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저 완벽했다.
"우리는 그 버스에 함께 있었다. 1980년 바르샤바에서."
루드비크와 야누시가 처음만난 1980년의 폴란드 바르샤바. 이 시기와 배경이 중요하다. 소설은 구글 지도를 열어놓고 그 지명을 찾아 풍경을 실제로 보고 싶을 만큼. 폴란드 곳곳의 풍경을 집요하리만치 담아낸다. 이 시기의 폴란드는 루드비크와 야누시 다음의 또다른 주인공이나 다름 없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미 언어를 초월한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곳에서, 나도 그곳에서, 바투 호흡하고 있었다."
루드비크와 야누시는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끼지만. 시간이 흐르며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갈수록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폴란드는 나치 점령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2차 대전 후 '철의 장막'이 내리자 소련의 지배권에 편입되어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부조리와 모순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루드비크와 당에 충성심을 보여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난 가정에서 자란 야누시는 결코 같은 생각에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헤엄쳐야 했던 어둠은 1980년대의 사회주의 폴란드 그 자체였다.
멜로드라마에 충실하면서도 당시 폴란드의 역사와 현실을 그린듯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어 남다른 깊이가 있는 작품이었다.
"여름이 한창이던 그때, 시간은 멈춰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영영 시간이 다시 흘러가지 않았으면 싶었다. 핑그르르 돌고 또 돌기만 하면서 영영 멈추지는 않는 주사위처럼."
* 본문에 묘사된 지역과 건물에 대한 설명을 각주로 친절히 설명해주어서 좋았다.
* 다만 <적일백천 / 군자연하는 / 실그러진 / 앙바틈하고> 같은 다소 예스러운 번역은 극중 20대인 화자에게 어울리지 않아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