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감과 고립감으로 밤을 헤매던 이들을 위해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이 몸으로 써내려간 이야기 누구나 조금씩은 아프다. 무리하면 입술에 염증이 생기거나 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하고, 스트레스로 위가 자주 쓰리기도 하다. 소화불량은 일상이며, 과중한 업무와 장거리 출퇴근으로 거북목 증후군, 허리 디스크, 만성 피로를 달고 산다. 하지만 어딘가 아프다고 말하면 ‘몸 관리 좀 해라’ ‘운동 부족이다’ ‘잘 챙겨 먹어라’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등의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살면서 크고 작은 질병 하나쯤 안고 사는 것이 필연임에도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몸은 부족하고 열등하다는 취급을 받는다. 만성질환이나 중증 질병이 있는 사람들은 특정 질병에 대한 편견, 사람들의 동정과 시선, ‘아픈 게 죄’라는 자책감 등을 감내해야 한다. 질병의 끝은 언제나 ‘완치’이며 완치되지 않으면 ‘망한’ 인생이 된다. 그렇게 질병은 불행과 실패의 상징이 되었다. 《질병과 함께 춤을》은 질병 극복기도, 질병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감동 수기도 아니다. 그동안 ‘절망’ 또는 ‘희망’으로 양분된 질병 서사의 경계를 가뿐히 무너뜨리고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 분노와 안도, 설렘과 긴장, 통증의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아픈 몸들의 연대기다. 각각 난소낭종, 조현병, 척수성근위축증, 류머티즘을 안고 사는 저자들은 몸속 혹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스러움(31쪽), 장거리 출퇴근과 만성피로(48쪽), ‘수치스러운’ 질병에 대한 성찰(67쪽), 10년 넘게 이어진 망상(95쪽), 평범한 일상을 사는 기쁨(113쪽), 가족과의 갈등과 화해(123쪽), 병명을 알기 위해 전국의 병원을 전전했던 어린 시절(155쪽), 통증을 줄이기 위한 루틴(163쪽), 노동에 대한 갈망(185쪽), 연민 또는 혐오의 시선(207쪽), 직장에서 증상을 설명해야 하는 고충(225쪽), 의사와 환자 사이의 정보 불균형(234쪽) 등 아픈 몸이 통과해온 경험과 성찰의 기록을 통해 질병 이전과 이후의 삶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이 책은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자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누군가에게 조용히,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누구든 아플 수 있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아픈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는다면, 질병은 불행과 실패가 아닌, 함께 겪어나가는 일상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아픈 몸 선언문]에서 제안하듯, “잘 아플 권리가 보장되며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는 사회, 아픈 몸이 기본값인 사회, 질병이 수치와 낙인이 아닌 사회”를 기대해본다.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아픔과 불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를 바란다. 지금도 질병에 대한 글을 써내려가면서 또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느낌이다. 질병 세계라는 공동체 안에 담길 수 있는 빗금처럼 반짝이는 관계들을 본다는 것은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약함이 힘이 될 수 있다고 어깨를 도닥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148쪽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삶은 반쪽이 아니다” 고유하고, 사소하고, 아름다운 질병 세계의 이야기 이 책을 엮은 조한진희 작가는 저자들과 질병 서사 쓰기 작업을 하면서 “질병과 함께 사느라 고통스러웠던 시간과 경험이 쓸모없는 게 아님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나는 왜 이렇게 아플까” “왜 나에게 이런 질병이 왔을까?” “아픔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나는 아픈 몸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 “정상적인 몸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프고 다른 몸을 만드는가”로 질문을 확장해나간다. 1부를 쓴 다리아는 “질병이 생긴 건 내 탓이 아니며, 수치스러운 질병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난소에 혹이 생겨 제거했지만 자꾸 재발한다. 처음에 혹이 생겼을 때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는 분노,‘몸 관리를 못한 내 탓일까’라는 자책, 혹이 다시 생길 거라는 불안에 휩싸였다. 나 자신과 세상, 모든 것에 화가 났다. 왜 혹이 생겼는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예민한 성격 탓일까. 아니면 만병의 근원이라는 스트레스 때문인가.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지긋지긋한 가족 관계, 가기 싫어서 아침마다 울음을 삼키면서도 먹고살아야 하니 다녀야 했던 회사, 몸을 돌보지 않은 생활습관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33쪽 다리아는 인터넷에서 난소낭종 관련 글을 찾아 읽고, 치료법을 검색해도 불안과 강박이 사라지지 않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는 자신의 질병 경험을 글로 쓰며 비로소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재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건강보다도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가족들의 태도, 기혼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장거리 출퇴근이 어떻게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지 자신의 경험과 여러 연구 사례를 토대로 제시한다. 실제 “OECD는 웰빙을 측정하는 지표로 통근 시간을 쓰며, 미국 워싱턴대학교 연구팀은 출근 거리가 24킬로미터 이상이면 지방 과다와 비만, 운동 부족상태일 위험성이 높다”고 밝혔다(52쪽). 아프면서 내 관심은 자연스레 내 몸으로 향했다. 나에게는 몸을 잘 돌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몸 돌보기는 마음 돌보기와 다르지 않다. 나는 몸과 마음을 돌보며, 여유롭게 편하게 살고 싶다. 이것이 나라 생각일랑은 하지 않는 이기적인 바람이라면, 차라리 나는 애국자가 되지 않겠다. 그러니 누구도 내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 -47쪽 2부의 저자 박목우에게는 “내 삶에 분명히 있지만 없는 것으로 여긴 것 중 하나가 질병”이었다. 20대에 조현병이 발병해 환청과 망상 때문에 5년 동안 작은 방에서 나오지 못했던 그는 질병 당사자가 아닌 ‘정신병자’라는 낙인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이 책에서 그는 실제 환청과 망상이 어떤 증상으로 나타나는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조현병 당사자의 세계를 잔잔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때는 혼자 있어도 바람 소리가 들렸다. 비난하고 비웃고 욕을 하는 바람 소리. 여름날 내리는 빗방울 소리도,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누군가의 고운 피아노 반주도, 하나 다를 것 없이 수치스러웠다. 모든 소리들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내게는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내가 만든 망상들 속에서 고통받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96쪽 증상과 더불어 겨우 살아갔던 그는 세상 바깥에서 처음 환대 받는 경험을 했고(103쪽), 조현병 당사자 동료들을 만나면서, “조각 케이크에 아메리카노를 곁들여 마시며 수다를 떨고 헤어질 때면 잘 가라고 포옹할 수 있는 일상”을 살기 시작한다(120쪽). 그의 이야기는 질병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삶이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현재 그는 정신장애인 동료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지쳐 있던 내게 이곳은 출구와 같았다. 몸 상태와 망상과 환청 등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되고 소통의 도구가 되어 다정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늘 너는 이상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던 내게 이들이 주는 위로는 감미로웠다. -116쪽 3부의 저자 모르는 ‘정상’이라 말하는 몸과 ‘다른’ 몸이 겪는 질병 경험을 이야기한다. 어릴 때부터 걷지 못해 전국의 병원을 다녔지만 의사가 내리는 병명은 늘 ‘원인 모를 장애’였다. 그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자신의 질병이 희귀 난치성 질환인 ‘척수성근위축증’임을 알게 되었다. “근육이 약해져 운동 발달이 결여돼 나이를 먹을수록 상태가 나빠지는 진행형 질병”으로 이 질병이 장애를 동반한 것이다. 질병으로 인한 통증은 해가 갈수록 심해지지만 그는 “병명을 알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그의 경험을 통해 질병명과 증세를 아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원망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음을 배운다. 30대가 되어 장애의 원인과 병의 예후를 알게 되니 난제를 해결한 것 같았다. 서서히 또는 갑자기 몸이 둔해지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되어도 ‘왜 이러지?’ 하고 의아해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게 됐다. ‘이젠 이 동작이 안 되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질병의 과정을 나이 듦의 과정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장애의 흐름으로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도 하고. -200쪽 그의 몸은 꾸준히 변형되고, 장애도 점점 더 진행되었다. 모르는 변형된 몸으로 앉고, 자고, 옷을 입고, 출근을 하고, 혼자 사는 일상을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통증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살 방법을 찾으려 한다. 아직은 견뎌낼 수 있는 통증. 난 오늘도 그렇게 ‘통증맞이’ 중이다.” 잘 때는 눕는 대신 폴더 폰처럼 몸을 접어 토끼잠을 잔다. 양반다리 자세에서 벽에 기대어 세운 상체를 앞이나 옆으로 하체에 포개 엎드리거나, 베개를 안아 엎드리며 머리를 베개에 얹고 자는 것이다. -164쪽 4부를 쓴 이혜정은 류머티즘 진단을 받은 후 일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발을 바닥에 디딜 때마다 뼈가 으깨지는 듯하고, 문고리를 돌리기 어려워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둔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질병이지만, 겉으로 잘 보이지 않기에 직장에서는 “아픈 거 맞아?”라는 의심을 받기 일쑤였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질병이 있다고 얘기했다가 ‘몸 관리 좀 잘하지 그랬냐’는 핀잔, 류머티즘이라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 등을 통해 그는 질병에 대한 편견과 낙인을 경험했다. 기지개를 켤 때마다 온몸 관절의 마디마디가 다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문고리를 돌리기가 어려워져서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두었다. 너무 아파서 변기 레버를 내릴 수 없는 아침에는 변기 뚜껑을 덮어두고 퇴근 후에 한꺼번에 물을 내렸다. 통증은 새벽에서 오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들을 내게서 빼앗아갔다. -208쪽 그의 질병 경험은 성폭력 사건과 데이트 폭력을 제외하고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실제 류머티즘은 원인이 없는 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는 류머티즘 환우회 카페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에 진단을 받은 사례들을 이야기하며 폭력 피해 경험과 질병의 인과관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내가 질병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직면하지 못했다. 성폭력 경험으로 1년 6개월 동안 심리 상담 치료를 받았는데, 그때도 온전히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질병에 관한 사실들이었다. 실제로 심리 상담 치료를 받고 공황발작이나 자살 충동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후로도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오곤 했다. 나의 이야기는 일부가 채워지지 못한 채였다. 성폭력 경험과 질병,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내 삶을 구성하고 있음에도 나는 그런 점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250~251쪽 질병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몸에 ‘낫는다’는 단어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오히려 느려진 속도에 일의 속도를 맞추고, 몸 상태를 적극적으로 주변에 알리고, 아프다고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한때 몸을 없애고 싶었던 그는 이제 자신의 몸을 잘 안아주려 노력한다.나는 나의 안전한 공간을 하나 더 찾았다. 우리는 힘든 것들을 극복하길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고 지켜봐주며 함께 눈을 맞춰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아주 오래전 질병이 시작되던 시점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나는 아주 오래 화해하지 못한 나와 화해했다. 그리고 질병은 마침내 내게 삶이 되었다. -257쪽 “당신의 약함이 힘이 될 수 있다” n개의 질병 서사가 쌓아 올릴 ‘잘 아플 권리’ 각자 다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질병 경험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질병과 함께 춤을》의 저자들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기도 했고, 상대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기도 했다.” 아픈 몸으로 사는 경험을 털어놓을 안전한 공간도, 설명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프다는 것만으로도 연결될 수 있으며’ ‘약한 목소리가 모이면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관종’ 또는 ‘나약하다’라는 편견이 생길까봐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했던 시간, 질병의 원인을 자기 탓으로만 돌렸던 시간에서 벗어나 “아픈 몸으로도 꽤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음을” 깨닫는 과정인 것이다.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과 맞선 경험들 속에서 나처럼 우울과 공황발작을 만났고, 평생 알지 못했던 질병의 이름을 비로소 알게 된 순간 안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 질병을 진단받을 당시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 의사들이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인당한 통증으로 인한 혼란과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에서 나 역시 수많은 ‘증상’들이 부인당한 경험을 떠올렸으며 내가 앓는 질병의 ‘원인 불명’이 어디서 기인했는가를 생각했다. -254쪽 최근 OECD에서는 의료의 질을 환자 중심으로 평가해야 하며, 환자를 넘어 사람 중심의 의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이미 ‘의료의 질’을 환자 중심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나라들도 많다고 한다. 병의 인식, 증상, 일상의 변화 등 더 많은 아픈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질병 당사자와 가족뿐 아니라 의료현장종사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데이터이자 질병 세계에 대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