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전미연 역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전미연 역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전미연 역
이동파, 윤남윤(그림) 저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전미연 역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전미연 역
2019년 06월 24일
<문명>을 읽고 이야기가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전체 3부작으로 구성 됐음을 알았다. 문명을 먼저 읽었기에 앞선 이야기인 <고양이>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가 문명과 왠지 중첩되는 느낌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때 내가 지금 <문명>을 읽는지 <고양이>를 읽고 있는지 헷갈렸다. 등장인물(묘)이 동일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문명>에 재 인용된 구절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불자임이 분명하다.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고, 피타고라스를 통해 붓다의 메세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
p101. "우리 고양이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지만 인간들은 자유를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지기 싫어서 신을 만든 것 같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한테 복종만 하면 되니까.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 되니까. 신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종교인들이 심약한 영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방식이기도 하지. 인간과 달리 고양이는 스스로의 행동을 책임질 줄 알고 자유를 두러워하지도 않아... "
종교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수많은 선택속에서 시간이 흘러간다. 결정장애를 가진 이들은 선택을 잘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아서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분명 내 선택이지만 그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남탓으로 돌리려 한다. 대상이 누구인지만 다를 뿐 그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 선택을 하기 전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왠지 내 선택이 잘못될 것 같아 그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어떠한 결과든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면 우리는 선택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종교는 그 책임을 절대자에게 돌릴 수 있게 해 준다. 그 분의 뜻대로 됐으니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불편한 마음이 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금새 평안을 되찾을 수 있다. 내 선택이 아닌 그의 뜻대로 행한 것이므로... 붓다의 위대함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인연과보. 원인에 따른 결과만 있을 뿐이다. 뿌린대로 거둘 뿐이다. 그동안 내가 잘못 뿌린 씨앗의 결과물은 겸허히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앞으로는 보다 선의의 씨앗을 뿌리는 일 뿐이다. 그것만이 남아있다. 누구에게 기도한다고 과보가 안 오는 것도 피할수도 없다. 세상은 그리 돌아간다. 시차만 존재할 뿐.
피타고라스는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는 말을 한다. 고와 락은 하나라는 얘기다. 즐거움만 취하고 싶지만 뒤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둘은 하나라서 분리가 안 된다. 좋은 것만 취하고 싶은 건 인간의 욕심이다. 아주 단순한 진리지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늘 괴롭다. 어찌보면 참 어리석은 삶이다. 인간이 꽤 이성적이고 다른 동물에 비해 뛰어나 보이지만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이들이 많다. 분명 잠깐의 즐거움 뒤에는 그 보다 더 큰 괴로움이 올지 뻔히 알며서 그 덫을 피하지 못한다. 인생 뭐 있냐'라는 생각으로 오늘만 산다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무소유의 의미는 소유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거다. 단지 관념적으로 만들었을 뿐, 우리는 무엇을 소유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러려고 하니 괴롭다. 피타고라스는 말한다. "그동안 깨달은 게 있다면 뭔가를 소유하려는 욕망이야말로 모든 갈등과 분쟁의 사실이다... "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다 나를 위한 것이다." 긍정적인 삶의 관점을 녹여낸 말이다. 내게 일어난 일은 다 좋은 일이다. 어떠한 일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건 나만이 할 수 있다. 누구도 해줄 수 없다. 그래서 수행이 필요하다.
고양이 2
베르나르 베르베르/전미연
열린책들/2018.5.30.
안젤로를 찾아 서쪽 숲으로 가는 도중에 쥐와 개를 만나 개떼에게 죽을 고비를 맞지만, 사자의 도움을 받아 불로뉴 숲에 도착하고 아들도 찾는다. 피타고라스와 대통령의 고양이었던 볼프강이 합세하여 함께할 고양이들을 모집하여 식량을 찾으러 떠난다. 인간들이 페스트 때문에 버리고 간 대통령궁 지하 방공호에 있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숫적으로 많이 우세한 쥐와 전쟁을 치룬다. 사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쥐들을 물리치고 식량을 확보하지만, 안전을 위해 진지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래서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는 나탈리를 찾아 길을 떠난다. 어렵게 나탈리가 있는 숲에 도착하지만, 어린 인간들이 쳐놓은 함정의 그물에 걸려든다. 네 다리를 묶여 불에 구워지기 직전 바스테트가 간절한 마음으로 내는 소리를 듣고 나탈리가 나타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바스테트는 다시 만난 나탈리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꿈에서 인간 샤먼 파트리샤와 영혼끼리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협조를 얻게 된다. 인간들의 힘을 빌어 식량과 무기를 센강의 인공섬 시뉴섬으로 옮기고, 쥐떼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해 다리를 폭파한다. 이어서 쥐들의 총 공격이 시작되고 인간과 사자, 그리고 고양이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는데…….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영혼이 있다. 영혼을 가진 것은 모두 소통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암고양이 바스테트는 이웃집 고양이 피타고라스를 통해 인간 세계의 지식을 접하게 된다. 바스테트는 피타고라스와 함께 고양이 군대를 결성해 쥐들의 공격을 막아낸다. 모든 존재는 육신의 껍데기에 국한되지 않고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은 바스테트는 꿈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인간과의 소통에 성공한다. 그리고 고양이들은 종간 연대와 공존에 바탕한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시대를 꿈꾼다. 이런 가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종간 장벽을 뛰어넘는 소통이다. 바스테트가 꿈꾸는 ‘정신대 정신의 소통’이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영혼이 대등한 관계에서 소통할 수 있는 꿈의 세계’는 작가인 베르베르가 상상하는 세계일 것이다.
“내가 암고양이라는 사실이, 내가 해낸 일이 자랑스럽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물질의 경계는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내가 이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p.109)”
다른 고양이들과 사자를 설득하여 쥐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새로운 식량을 확보한 다음에 주인공 바스테트가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도 이와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면 같은 벅찬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남들이 포기한 일을 시도하여 성공하는 것은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동물종도 다른 종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지구는 어떤 한 종의 소유가 아니에요.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든 생명체가 똑같이 지구의 주인이죠. 어떤 종도 스스로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고 여길 권리는 없어요. 인간도 고양이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요. 파트리샤. 인간은 고양이만큼 예민하지 못해요. 그들은 우리만큼 많은 것을 지각할 수 없어요. 형편없이 무딘 감각을 지니고 있죠. 밤에는 볼 수도 없어요.“
“맞아요. 인간이 볼 수 있는 색깔은 아주 한정된 스펙트럼뿐이죠. 우리들은 초음파를 듣지도 못하고 자기장이나 에너지의 이동을 감지하지도 못해요.”
“그것 봐요. 그렇다니까요.”
“그렇다고 우리 인간들이 열등한 건 아니에요. 단지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에요. 나는 모든 동물종이 상호 보완적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이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의 다양성을 경이롭게 느끼죠. 이 수천수만 가지 종의 곤충, 포유류, 새, 물고기, 식물을 우리가 어떻게든 지켜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p.157)
고양이인 바스테트의 영혼과 인간 샤먼인 파트리샤의 영혼이 꿈속에서 만나 이야기 하는 장면이다. 파트리샤나 바스테트의 말처럼 지구는 어떤 한 종의 소유도 아니며, 어떤 종도 다른 종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주고 서로 다름을 존중해줄 때 비로소 지구는 평화로워 질 수 있으며, 모든 생물이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전쟁은 단순히 영토 전쟁이나 생존 전쟁이 아니다. 이것은 문명 대 야만의 전쟁이다. 바스테트를 숭배하던 사제들을 죽인 캄비세스 2세,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을 죽인 킬론, 무종교 학교들에 테러를 자행한 광신도 테러리스트들, 그리고 지금 우리를 공격하는 쥐들.(p.198)”
바스테트가 고양이의 역사와 피타고라스의 일을 통해 영토 전쟁이 아닌 문화의 전쟁으로 문명과 비문명의 충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데, 모두가 욕망을 앞세우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베르베르는 이성을 존중하는 집단과 감정을 부추기는 집단 간에 충돌로 이뤄지는 폭력 사태를 떠나,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을 소설 <고양이>를 통해 제기하는 것이다.
지금 싱가포르에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핵 없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회담을 앞두고 있다. 서로를 존중해주고 상대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면서 평화로운 한반도와 지구촌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베르베르의 소설 <고양이>의 주인공 바스테트가 염원하는 종간 소통을 하기 전에 인간끼리의 소통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나아가서 모든 종류의 생명체들이 공존하는 평화로운 지구가 이루어 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출근하면서 앞을 가로질러 가는 쥐 한 마리를 본다.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지구 생태계에 진정한 의미에서 불필요한 생명체는 없다고 하지만, 쥐와 모기와 바퀴벌레 (그리고 비둘기)는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다. 고양이가 필요하다.
인간 세상은 지금도 말세고, 천년 전에도 그랬고, 이천년 전에도 그랬다. 인류는 큰 전쟁 없이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지만, 아프가니스탄 사태에서 보듯이 멸망할 때까지 어리석은 짓을 계속할 것이다. 고양이 2권은 이런 어리석은 짓이 극에 달에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파리가 배경이다. 인간을 '대신'해 세상을 차지한 쥐들에 맞서 싸우고 탈출하는 인간과 고양이 연대에 대한 얘기이다.
솔직히 고양이 1권에 비해 긴장감이나 신선함은 오히려 떨어진다. 쥐떼와 고양이 (그리고 인간)의 대립구도 하에서 세상을 구하는 영웅 이야기로 변질된 것 같다. 쥐떼는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잘 죽지 않는 오크들 같고, 심지어는 영웅의 상대로 걸맞는 범상치 않은 대장 쥐도 있다. <문명> 이야기로 연결된다고 하는데, 그다지 기대는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아파트 지하에 사는 들고양이들은 쥐를 계속 열심히 잡아 줬으면 좋겠다. 바쁘지 않으면 짬을 내서 비둘기들까지도... 작은 응원을 보낸다.
베르나르베르베르님의고양이2를읽고쓰는리뷰입니다리뷰에스포가포함되어있을가능성이높습니다2권까지다읽으면서베르나르베르베르님의글은가독성이뛰어나다는생각을했습니다그러나전작과이후의작들과꽤비슷한면도없지않구나하는생각도했습니다고양이와인간의삶을생각하게되었습니다바스테트와피타고라스라는매력적인고양이의호기심이너무나사랑스러웠습니다물론인간의시점에서.
개미, 타나토노트 이후로 신보다가 말았고 그 이후의 작품들을 안봐서 그런지 몰입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개미와 똑같이 고양이의 시각으로 쓴 책인데 왜이리 지루하고 다른 느낌인지 모르겠다. 쥐와 고양이와의 전쟁에서 두 고양이의 활약상을 다뤘다. 두 고양이는 좀 귀엽긴하다. 주인공인 바스테트와 옆 집 고양이 피타고라스. 피타고라스는 인터넷을 다룰 줄 아는 특이한 능력으로 쥐들과의 싸움에서 맞서 정보를 수집한다.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어느 생명체들의 분류에 포함되는 한 종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싸우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지금까지 주로 인간의 종이 멸종할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스펙타클한 이야기들이 많았다면 이 책은 고양이가 주인공인 점이 다르다. 물론 인간은 그 안에서 조연의 역할을 한다. 쥐들이 악역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작가의 상상력의 세계에 빠지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