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한 저
이재익, 김훈종 저
2021년 11월 05일
<토닥토닥, 숲길(박여진 글, 백홍기 사진)>을 보고 읽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주말에 같은 길을 걷는 일은 멋지다. 그것도 20년 동안, 그것도 부부가! 20년은 베테랑이란 말이고, 베테랑의 훈수(노하우)는 콕 집어 쉽게 알려준다는 뜻이다.
부부가 적바림(기록)했다는 건 알차게 다녔고 꼼꼼하게 살폈다는 뜻이다. 읽으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내용은 물론이려니와 책 제목인 ‘토닥토닥, 숲길’도 편안했고, 차례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타박타박 가볍게, 사색하며 깊게, 구석구석 천천히, 느릿느릿 오래’, 마음에 쏙 든다.
동네 산책 나갈 때는 타박타박 가볍게, 산길에 접어들면서는 사색하며 깊게, 이웃 동네 마실을 나가서는 구석구석 천천히, 가까운 관광지라도 간 날엔 느릿느릿 오래, 글 따라 다녀본다.
나도 2026년부터는!! 그러려면 부지런히 보람차게 살아야쥥.
https://blog.naver.com/mate3416
"호수는 나른한 고양이처럼 다가와 내 기억과 감정을 핥는다."
‘활력환’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삼켰었다. 복용시기를 놓칠 것 같으면 불안과 초조와 짜증이 솟아올랐다. 그것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확신했었다. 일상을 그 자리에 두고 홀로 떠나는 것, 그것에 활력환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주 커다란 대한민국 전도全圖를 구해 서재 벽에 붙여두었다. 활력환을 삼켜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대한민국의 그곳에 작은 동그라미 스티커를 붙였다. 포도송이 한 알씩을 받아 채우는 아이처럼 뿌듯했다. 스티커가 붙은 곳은 추억이 있어 좋았고 아직 비어 있는 곳은 기대와 설렘이 있어 좋았다. 어쩌다 지도가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마냥 좋았다. 감추어지지 않는 웃음 또한 아이와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나의 활력환 지도는……. 어디에 있긴 있을 것이다. 결혼을 했고 아이들이 태어났고 승진을 했다. 해야 할 일들이 사방에 위협적으로 쌓여갔고 늘 부족한 시간에 허덕였다. 종종 아팠다. 활력환? 그래, 참 깜찍도 했구나, 10년 전에는.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아지던 몇 달 전부터 집도 직장도 비상시국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남편은 코로나 담당자로 차출되었다. 키가 177cm인 그는 밥을 가득 먹고 체중계에 오르면 59kg이었다. 기다란 멸치같군, 싶은 모습마저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나는 자가격리자들에게 매일 먹거리와 생필품을 배달했다. 고맙게도 여러 곳에서 기부품이 들어왔고 대상자를 추려 연락을 하고 배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민과 지역을 살리기 위한 각종 지원책을 서둘러 시행했지만 면사무소를 찾는 사람들은 화가 나 있었다. 마스크가 없어서, 일자리를 잃어서, 여당이 미워서, 시장이 서지 않아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상급기관들로부터 안내 받은 것이 없는 우리는 궁색히 대답했고 비난 받았다. 무능한 주제에 철밥통을 끌어안은 공무원을 향한 노골적인 눈빛에 상처 받았지만 나라 곳곳에서 이 엄청난 사태로부터 국민을 지켜내기 위해 식사도 잠도 안녕도 없을 의료진과 관계자, 공직자 들을 응원했다. 그들이 쓰러지지 않기를, 국민들이 그들을 신뢰해 주기를 바랐다. 또 오죽 어려우면 면사무소에 와서 소리를 지를까를, 사실 그들이 화를 내고 삿대질 할 곳이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를 생각했다. 우리의 하루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각자의 하루를 정리했다.
서둘러 퇴근을 해 아이들을 데려왔다. 온종일 시달리셨을 부모님께 면목이 없었다. 빨래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집안을 정리하고 쉼 없이 쫑알거리는 두 녀석에게 대꾸했다.
피곤했다.
‘숲’이라는 한 글자에, 초록 오솔길 사진 한 장에 책을 골라들었다. 번역을 하는 아내와 지방 출장이 많은 남편이 주말마다 다녀왔던 숲여행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소박하고 가볍게, 느리게 구석구석, 오래도록 깊게 이 나라를 산책하고 사색한 글과 사진이다.
나 이렇게 여행 다니는 사람이야, 하는 자랑이 얄미워 여행기 책을 자주 읽지는 않는다. 떠나고 싶어질까봐, 떠나지 못해 속상할까봐 그쪽 서가는 피한다. 분명 그렇게 하고 있는데 연말마다 일 년의 독서를 총정리 하다보면 여행 에세이가 왜 그리 많은지 매년 의아할 뿐이다.
『토닥토닥, 숲길』은 뽐내지 않는 여행기다. 낯선 여행지에 가 발을 디디는 순간 시간은 왜곡되고 늘어나더라고, 일상에는 없는 낯선 감촉과 소리와 냄새가 느린 시간 사이사이를 파고들더라고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겨울을 지나 부드러워진 흙을 헤치고 나온 보리싹들은 봄이 늦도록 푸른 꿈을 꾸다 초여름이 오면 여문 보리가 된다고 말한다.
참 마음 편히 읽었다. 좋았다.
숲은 싱그러웠었고 흙길은 보드랍게 단단했다. 부부가 나란히 걸으며 온전히 소유했던 시간이 예뻤다. 떠나고 싶어졌지만 그러지 못해 속상하지는 않았다.
책을 덮으며 보니 2018년 10월에 초판을, 두 달 뒤 4쇄를 찍었다. 유명인도, 전문 여행가와 사진가도 아닌 이들의 첫 책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하였나보다.
초록의 색을 지닌, 도톰한 질감을 가진, 깨끗한 숨을 호흡한 독서였다고 후감을 남긴다.
* 책을 빌려온 금요일, 나는 3번 창구에서 긴급재난지원금으로 1만원권의 지역상품권을 배부했다. 2번 창구에 앉은 할머니가 직원에게 말씀하셨다. “고생했는디 이거 한 장 쓰셔.” 아, 할머니!! 저한테 오시지...
할머니 덕에 긴장으로 굳은 얼굴들이 순식간에 해제되었고 2번 창구 직원은 귀까지 빨개졌다. 용돈쾌척을 관철하지 못한 할머니는 결국 요구르트 몇 병을 민원창구에 던지고 가셨다.
대한민국이여, 힘을 내시자.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여행 다니고. 일할 땐 일하고 쉴 땐 쉬는 게 뭐 대수냐 싶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누군가에게 주5일 근무는 하늘에 뜬 별보다도 먼 이상향처럼 여겨질 터이고, 휴식이 주어지기는 하나 생활비로 사용하기에도 빠듯한 벌이 탓에 방에 콕 박혀서는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던가. 나름 빨빨대며 많이 돌아다녔다고 자부함에도 책을 읽는 내내 부러움이 앞섰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즐거운 일탈 경험이 없는 건 아니나 운전면허 없는 원시인인 나의 동선은 비좁을 수밖에 없었다. 여행사가 준비한 상품에 의존하다 보니 모두가 밟는 유명 여행지에 국한된 움직임을 보이는 게 전부였다. 이조차도 힘든 이들이 있음을 감안한다면 나의 욕심은 사치일 터이다. 허나 떠나면 떠날수록 더 떠나고픈 마음이 이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글은 간결했으며, 사진 또한 글을 닮았다. 좀비처럼 마냥 걷기, 암울한 뒷모습과 어둔 이미지를 주로 담아낸 사진이라니. 부부의 글과 사진이라고 생각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인지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를 외치며 손 맞잡아도 괜찮을 법했다. 이를 양산한 이들에겐 마냥 익숙함일 테지만 나와 같은 제3 자에게는 신선함이었다. 같은 장소에 서서 다른 생각을 품고, 같은 장면을 바라보며 다른 사진을 찍고. 인간은 그런 존재이므로 뭐든 괜찮았다. 장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발걸음이 머문 많은 곳을 나 또한 다녀왔다. 적잖이 유명한 장소들도 제법 소개되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다” 혹은 “다녀왔다”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가 없었다. 마치 수박 겉핥기 식으로 대부분의 장소에서 나는 짧게는 30분, 길어도 2시간 남짓의 시간만을 머물렀다. 그들처럼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지 못했고, 깊이 있는 생각 또한 품을 겨를이 없었다. 책을 읽는 건 간접 경험이라고 했다. 평면에 갇힌 글자와 이미지에는 입체감이 있을 리 없다. 운 좋게도 난 거기에 나의 경험을 입힐 수 있었다. 억지 주장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잠시나마 닿았던 장소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맘껏 반가움을 표했다. 내가 미처 향하지 못했던 장소들이 등장할 때면 나의 짧았던 체류 시간을 아쉬워했고, 조금 더 머물렀을 경우 벌어질 수 있었던 많은 일들을 상상하게 됐다. 동시에 다음에 대한 설렘 또한 책은 나에게 선사했다. 언제라는 구체적인 약속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에게 다음은 분명 존재할 것이다. 실제 다음이 다가왔을 때 실천을 할 수 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원래 삶은 계획하고 손꼽아 기다릴 때의 즐거움이 더욱 크다. 그 땐 저자의 조언을 한껏 따르련다. 편한 옷차림, 가벼운 가방.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나를 맞이할 집을 청소하는 일에 대해선 한 번도 고려해 본 적이 없는데, 나쁘진 않을 거 같다. 조금은 귀찮을 수도 있지만 나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면 못 할 건 아니다.
책의 마지막이 남해여서 특히 좋았다. 저마다 선호하는 장소가 다를진데, 내 경우엔 남해를 으뜸으로 쳐왔다. 남해하면 뭐니뭐니해도 바다가
우선 보인다. 너른 바다를 정성스레 가꾼 다랭이논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건 다른 지역에선 즐기기 힘든
호사다. 남해에선 바다와 더불어 산도 즐길 수 있다. 그야말로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동네가 남해다. 내 기억 속 남해와 저자들이 기록한 남해는 사뭇 달랐다. 천하마을, 물건마을은 이름조차 낯설었고, 노도는 배만 타면 멀미를 하는지라 가볼 엄두를 못 냈다.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행지로 익히 알려진 보리암이면 어떻고, 상주은모래해변일지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당신이 본 남해와 내가 본 남해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며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복이므로 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