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저
김신지 저
구달 저
리안 모리아티 저/김소정 역
윤성근 저
노지양,홍한별 공저
다정하지 않은 하루를 보냈더라도 매일의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에 가끔 위로가 된다 매일의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에 가끔 위로가 된다 특별히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는 주말을 향한 홀가분한 마음이 좋다 지겹도록 싫은 월화수목의 긴 시간의 터널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지나가게 할 수 있을지 아무리 골머리를 써도 괜찮은 답을 찾아내긴 힘들었다 요령만 부리고 오늘도 해야 할 일을 산더미 처럼 두고 망상만 꾸고 있는 민폐를 끼치는 것도 영 싫다
그래도 서늘한 바람처럼 갑갑함을 날려줄 한 권의 책이 이따금 재미와 감동과 위로를 준다 그 덕에 오늘도 무사히 잘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훌쩍 목요일 밤이 지나가고 금요일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은 꽤 견딜만하다 별 거 아닌 무심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찬찬히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일상의 발견이 꽤나 재미있는 책을 만나 오늘 밤은 괜히 들떠 신난다
주말을 기다리는 금요일의 시간이 좀 더 유쾌함 속에서 흘러갈 것에 기대하며 월요일부터 열심히 달려온 나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네본다 오늘도 그럭저럭 괜찮았음에 매일의 무탈함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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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을 좀 읽고 싶었다. 마음이 따뜻하게 하는 글들은 잔잔한 일상 속에 배려하는 마음들이 살아 있는 글들이다. 이런 글은 자신의 경험을 적으면서 다듬은 것들이 될 듯하다. 그래서 그런 글을 찾다가 지인의 블로그에서 책을 하나 발견했다.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질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내었고, 구매를 했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 안대근의 작은 이야기들은 내 마음에 포근하게 다가왔다. 일상에 많은 위로가 되고 소소한 행복을 주는 글들이 많았다. <지금이 인생의 목요일이라면, 지치는 목요일마저 좋아진다면 매일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맞다. 한 주 중에서 수요일, 목요일이 가장 힘이 드는 때다. 그런 날조자 마음에 여유로 남는다면 삶이 얼마나 넉넉해지랴. 사소한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이다. 이 책속에서 그런 사소함을 많이 읽는다. 소확행을 가지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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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많은 일상의 이야기를 3개의 장으로 묶고 있다. <주말은 결국 올 테니까> <모든 요일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무채색 하루에 색색의 미소를> 등이 그것이다. 요일을 마음에 담으면서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나날의 삶이 어찌 힘겨움이 없겠냐만, 거기에 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서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각 요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요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날을 아끼며, 애쓰며 보낸다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이 가득 모여 있다. 나에겐 따뜻한 웃음이 된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땐 멀리 보고, 마음이 막막할 땐 앞만 보고 걸으면 된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앞만 보며 걸아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목요일의 나는 내일이 금요일이라는 사실만 생각하며 살아도 괜찮을 것이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피곤하다는 걸 알려 주는 사람의 말을 믿고 싶으니까. 그 말이 고마워서 피곤이 조금 달아나니까.
순한 사람이 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저자의 감성 에세이다. 처음으로 신입사원 명찰을 달았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수습기간이라 멀뚱멀뚱 자리만 채우고 있었다. 뭐라도 시켜주면 좋을 것인데 그러지도 않았다. 뭔가 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 노트북 화면도 열심히 들여다보고 메일도 꼼꼼히 읽어보면서 뭔가 하는 것처럼 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한 선배가 내게 물었다. 오늘 뭐 했어? 많이 배웠어? 한숨을 쉬던 선배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대답을 잃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런데 엄청 피곤해요. 선배는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기에 피곤한 거예요. 그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자잘한 일상사가 달착지근하게 전해진다. 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이 책은 왜 비닐에 쌓여 있어? 서점에서의 일이다. 여러 에세이 사이에 책 한 권만 비닐로 꽁꽁 싸 볼 수도 없도록 해 놓고 있었다. 만화책이나 잡지가 비닐에 쌓여 있는 것처럼 그 책은 쉽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읽으면 구입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비닐 안에 넣어 둔다고 한다. 그리고 <반품불가>라는 스티커를 부착해서. 아이의 물음에 자신 없는 내 자신을 비닐로 꼭 싸매려고 애쓰는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고 한다. 이런 자잘한 이야기가 언어로 그려져 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인 것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정성 들여 뭔가를 하는 사람만이 정성 들인 뭔가를 알아봐 준다. 내 마음이 부끄러운 걸까 봐 고민해 본 사람이 내 마음이 부끄러우면 어쩌지 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안아 줄 수 있는 것처럼, 이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는 만큼 행하고 아는 만큼 배려한다. 애쓰지 않은 열 사람의 무관심 대신 애써 본 한 사람의 다정함이 마음에 스미는 우리들의 삶이 될 게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지 못하면 상대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한다. 아는 것은 경험에서 나온다. 그 경험은 직접, 간접 등 다양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무엇이든 알아야 행할 수 있음을 깨닫는 화자의 마음이 보인다.
타인이 배려해 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다. 타인이 그것을 고민해 보지 않았고,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주어지는 대로 움직이고 그 결과를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행위에 그렇게 구속받지 않는 생활이 되어야 되겠다. 더구나 타인의 언행에 흔들리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혼자서도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맞다. 나는 혼자서도 잘 노는 편이다. 카페도 잘 가고, 영화도 잘 보고, 서점에 가거나 밥을 먹거나 거리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모두 좋아한다. 혼자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편해서’가 더 맞을 것이다. 편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 나에게는 꽤 중요한 가치니까(3)
친구에게 너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조언을 한 적이 있다. 친구도 잘 안다고 말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싫다고 말한다. 누구를 만나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혼자 있는 시간은 뭔지 모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한다. 혼자 있으면 우울하다고까지 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다. 서로 어울려야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있고 혼자서 있을 때 평안을 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즐긴다. 옆에 누가 있으면 하던 일도 멈춘다. 몰두, 궁구, 찾음, 노력 등은 모두 혼자 있을 때 더욱 탄력을 받는 나의 삶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품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친구가 나에게 프로필 사진을 골라 달라고 했다. 매몰차게 떠나간 연인이 우연히 메신저를 보다가 후회와 아쉬움에 빠져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럴 리 없다고 대답하면서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랐다. 친구는 기껏 고른 사진이 다 별로라고 했다. 이런 이래서 별로고 저건 저래서 별로라고.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사진으로 정했다.
사람은 주변에 도움을 받고자 한다. 아마 그것은 위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게다. 이것은 어떻게 했으면 저것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원래 자신의 뜻대로 한다. 자문은 말 그대로 하나의 자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마음에 앙금이 남지 않는다. 하지만 자문을 구할 때 자문을 하는 사람도 생각을 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기껏 자문한다고 해놓고 자신의 뜻대로 할 것 같으면 자문을 구하지 않은 것보다 못하다.
위의 이야기에서는 자문을 구하는 의도가 문제가 된다. 악한 생각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그렇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자 사진을 골라 달라니,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이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즐거워 할 수 있도록 하는 의도가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된다. 의도가 어떤가에 따라 선택의 잣대도 달라질 수 있다. 선의, 가치 등을 추구하는 일이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행해지고 있다. 사소한 일들도 작가의 내면에서 곰삭아 무게감을 가진 이야기로 거듭나고 있다. 흥미롭게 읽힌다.
돌이켜 보면 내가 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 걸음을 앞서 걷는 일이 다섯 번도 넘게 반복되었을 때 아차 싶은 깨달음과 미안함만으로는 아무래도 무례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내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여기 있는데 왜 서운해 하는 거야?”라고 묻기 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내 걸음은 빠른 편이다. 옆에 있는 사람과 같이 걸으면 늘 앞서서 걷게 된다. 그러면 따라온다고 애를 쓴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잘못하는 거다. 기다려주고 같이 동행할 수 있어야 한다. 동행이 목적인 걷기 나들이인데 혼자 앞서서 걸어가는 것은 무척 예의에 어긋난다. 그것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 글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해당이 되어 많은 재생의 필름을 돌렸다. 나는 음식을 빨리 먹는 편이다. 옆에 사람들과 같이 먹으면 늘 혼자 다 먹고 일어나 멀뚱거리며 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이 시작해도, 음식이 내 것이 많아도 훨씬 빨리 먹는다. 다 먹고 난 뒤 기다리지도 내 생활을 한다. 아마 옆에서 보기엔 밉상이리라. 하지만 그것이 타성이 되어 이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먼저 먹는 것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한다. 옆 사람들과 맞추는 시간을 마음에 두어야 하겠다. 그게 바른 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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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속의 내용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은 저자, 곧 타인의 삶이고 의미다. 그것이 독자 자신에게 다가와 속삭일 수 있을 때 책이 가치를, 의미를 지니고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나에게 이 책은 달콤한 사탕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삶의 곳곳에서 묻어난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 혀의 감촉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활자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닌 듯하다.
따뜻하다. 모든 일에 대한 긍정의 시선이 맑은 호수를 연상하게 한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내 기억의 웅덩이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많은 사랑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나 활자와 엉키고 그것은 내 삶의 자양분이 된다. 책이 주는 선의와 긍정의 의미가 내 삶에서도 빛이 되어 다가온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