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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 배달원 강정민을 읽고
오랜만에 읽은 책이라 완독까지 꽤나 시간이 걸린 책이다. 북클럽에서 어떤 책을 담을까 보던 중 표지가 눈에 들어왔고, 요약된 내용을 보니 좋아하는 성장 서사의 소설인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힘들 때 마다 절친한 민주가 달려와주는 게 현실 속의 유일한 비현실 같기도 했다. 시간을 내서 친구를 만나고 싶어도 각자의 생활 반경이 달라지면서 전처럼 자주 보기가 힘들다는 걸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 형제를 둔 자매들이 겪은 일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녹즙 여사님들, 불법 촬영 사진 있다며 협박하는 전애인을 마주하게 되는 친구,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현실적인 요소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읽을 때 지치게 되는 구간도 있지만, 정민과 민주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나올 때면 둘의 입담 때문에 그저 즐겁다는 생각만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창희쌤이 여학생들에게 해주었던 "생각해. 계속 생각해. 생각을 멈추면 그때부터는 진짜 지는거야." 라는 말이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서 입 모양만 봐도 알 수 있는 그 문장을 듣고 해결책을 찾는 정민과 민주가 좋았다.
마지막까지 준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다 읽고 난 직후에 '그래서 얘는 누군데!' 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의 서평을 한참 찾아다녔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여성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있다. 한동안 자격증 공부를 하느라(또 공부해야 하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는 것은 안 비밀) 책을 소홀히 했는데, 몇 주 동안 실컷 읽었다. 주로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골라 사 읽었다. 김현진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의 글은 웃프다. 웃긴데 슬프다. 슬픈데 웃기다. 그래서 마음이 간다.
적어도 그의 책은 출간할 때마다 산다. 한 권을 더 사 다른 이에게 준다. 그냥 그러고 싶다.
이 책 「녹즙 배달원 강정민」 또한 여지없이 웃프다. 웃기고 슬프다. 작가가 실제로 녹즙 배달을 한 것처럼 강정민의 삶과 김현진의 삶이 비슷하다.
강정민은 녹즙 배달원이다. 만화를 그리고 게임 캐릭터를 디자인하는 사람이지만 현실에서는 녹즙 배달원이다.
“내가 엄마의 강렬한 희망이었던 간호학과를 버리고 어릴 때부터 꿈꾸던 만화가, 그러니까 웹툰 작가가 되기 위해 만화과를 택한다고 하자 엄마는 등록금을 단 한 푼도 대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p.23)
등록금을 단 한 푼도 대주지 않은 부모 때문에 홀로 모든 것을 견뎌야 했다. 열심히 일하며 공부해 회사에 들어갔지만, 게임 캐릭터를 오로지 성 상품화시키는 것에 혈안이 된 회사에서 그림이 망가진다. 그림만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 같이 일하던 신대리라는 놈은 일부러 성인용 애니메이션을 가져오기도 하는 성희롱을 한다.
나도 결혼을 하기 전에는 성차별, 성희롱, 성추행 이런 것들이 남의 일로만 여겼다. 여성들이 반복적, 무차별적으로 겪는 일상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급하게 잡아 올라탄 택시에서 “씨발, 오늘 첫 개시 조졌네.”라는 말을 들어야 하고 등하교 버스 안에서 무시로 뻗쳐 오는 남성들의 시선과 손길을 견뎌야 했다는 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남자기 때문에 인생을 살며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일이 여자에게는 너무나 많았다.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그런 일이 흔했다고 하더라. 가 아니었다. 지금도 여전한 일이다. 김현진은 이 소재를 그의 작품 내내 소개한다. 캐릭터와 사건에 녹여 낸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각인한다.
“그래. 맞다, 이년아. 네가 어쩔래?”
“와, 남이면 고소라도 할 텐데, 진짜.”
“고소? 얘 말하는 꼬라지 좀 봐. 가족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거지. 네 오빠가 너 결혼할 때 가만있겠냐?” (p.158)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이거다. 그래도 부모님인데, 그래도 가족인데.” (p.159)
그래도 가족에게 늘 치인다. 불쌍할 정도로 치인다. 뼈 빠지게 벌어온 돈을 훔쳐 “하나님이 준 거”라고 발뺌하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과도 친해질 수” 없다. 유일한 친구는 술이다.
알코올중독자라고 시인할 정도다. 한 번씩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실 때마다 술자리에 함께한 남자와 모텔에서 함께 아침을 맞는 끔찍함을 매번 겪는다. 하지만 그 끔찍함을 또 깜찍하게 이겨내는 것이 술이다.
“그래서 오늘은 소맥, 너와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어. 그냥 냉장고에서 오래 묵은 아무 반찬, 심지어 신김치 쪼가리만 곁들여도 나를 기꺼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너.” (p.9)
기꺼이 포근하게 안아주는 너는 술뿐이기 때문에. 아, 정민아. 너를 어쩌면 좋냐.
“오늘도 익숙한 메일이 왔다. 강정민님 님께서는 저희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어쩌고저쩌고 귀하의 건승을 빕니다.” (p.255)
지원하는 회사에서는 매번 ‘귀하의 건승’을 빈다는 거짓부렁의 메일만 받는다. 잠시만, 잠시만 하던 녹즙 배달이 주업이 되어 버렸다. 자신은 절대로 앉아 일할 수 없는 대기업의 높은 빌딩 안에 있는 콧대 높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조롱을 견뎌내며 술로 버틴다. 술이 아니면 무엇으로 버티나.
“24개월을 술을 한 방울도 드시지 않았다, 이러면 이건 알코올 완치 판정으로 봅니다.” (p.395)
그런 강정민이 알코올 완치 판정을 받았다. 뜬금없었다. 나는 실패할 줄 알았다. 뭐 조금씩 줄여가는 정도면 좋겠다. 강정민은 건강을 해치지 않는 정도로 술을 마셔주었으면 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고약한 심술인가. 건강을 해치지 않는 술은 없는데 말이다. 술을 끊은 강정민의 앞길이 어떨지는 모른다. 좋은 곳에 취직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것인지, 녹즙 배달로 전국 1등을 할 것인지, 여전히 버는 족족 가족에게 돈을 뺏길 것인지, 녹즙이고 그림이고 아무것도 개선이 없는 채 또다시 술에 빠져들지.
나는 좋은 쪽으로 기대하고 싶다. 작가가 아프지 않고 오래도록 글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늘 있는 것처럼. 강정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가족과 술에만 매여 강정민 자신을 잊은 채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안이 이르렀던 편안함은 판타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지안이 마지막 장면에서 보였던 작은 웃음 정도는 강정민도 보여주기를 바란다. 녹즙이 든 큰 가방을 메고 있든, 머리를 쥐어 짜내며 태블릿 PC에 그림을 그리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고마운 것은 바로 당신. 이 책을 집어 들어준 독자 여러분, 게다가 역병이 도는 바람에 다들 먹고살기 어려워 책 한 권 사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에 굳이 이 책을 사준 당신. 당신이야말로 나를 늘 살아 있게 해준, 살아 있어도 된다고 해준, 계속 살라고 해준,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신 덕분에 계속 살고, 웃고, 쓸 것이다.” (p.416)
언제나 그렇듯, 재미있고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마울 따름이다. 책 한 권 사는 것이 아직은 사치가 아닌 형편이라 다행이기도 하다.
고되게 쓰시고, 햇살처럼 웃으시길 바라며
웹툰 작가가 꿈인 정민이 스타업인가 뭐시긴가 하는 회사에서 얄궂은 그림을 그려 번 돈은 모두 오빠의 결혼 자금으로 사라졌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정민에게 재테크가 무엇인지 보여줄 테니 월급 통장을 맡기라고 했다. 정민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3년을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돈을 좀 모아서 나만의 그림을 그려볼 테다. 꿈이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오빠가 결혼하는데 정민이 자금을 보태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정민 자신도 모르게.
글 작가를 섭외해서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영화 공부를 한다는 글 작가는 정민에게 술을 마시며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는 헛소리를 했다. 조짐이 좋지 않았는데 왜 항상 틀린 예감은 맞는 걸까. 글 작가는 먹튀했다. 지원금 천만 원을 고스란히 정민이 갚아야 했다. 서른이 넘은 정민은 온갖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 회사의 인재상과는 맞지 않아. 거절, 거절 그리고 또 거절.
이상 김현진의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의 주인공 강정민의 사연이다. 이렇게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한데 책을 읽는 나는 고구마 백 개, 구운 계란 백 개를 먹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정민이 쌔가 빠지게 모은 돈 오천만 원을 오빠 결혼 자금에 엄마가 갖다 바친 장면에서는 에라이 책을 덮을 뻔했다. 정민은 그 돈으로 한동안 생활비 걱정하지 않고 공부해서 웹툰 작가가 되려고 했다. 인생사, 세상사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정민은 녹즙 배달원이 되었다.
나이와 연륜과 뻔뻔함과 강철 멘탈로 무장한 여사님들 사이에서 정민은 고군분투한다. '사무실분'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 예사. 한 달에 오만 원 하는 녹즙 값을 1년 동안 떼먹은 인간도 상대해야 했다. 몰랐다. 소위 '사무실분'들이 이렇게나 싸가지가 없는지를. 소설가 김현진은 2년 동안 녹즙 배달을 했단다. 체험이 잔뜩 묻어 있는 소설은 그래서 현실적이고 슬프다.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오늘에 정민은 술이라는 환각을 들이붓는다.
배달원은 노동자가 아니란다. 특수고용노동관계. 녹즙 값이 한 달이라도 밀리면 돈을 받지 못한다. 정민은 1년 동안 수당을 받지 못했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은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지원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당연하다는 듯 생활비를 내야 하고 월급은 고스란히 남자 형제에게 쓰인다. 어렵게 면접의 기회가 생겨 한껏 차려 입고 갔는데 업무 질문은 없고 결혼과 애인 유무, 출산 예정에 대한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힐난만 받고 돌아온다.
모르겠다. 뭐가 옳은지. 그른지. 전부 틀린 것만 같은 세상이다. 정답은 없고 오답만 가득한 세계. 덜 괴롭고 싶어 소설을 읽는데 더 괴롭고 서글프다. 정민이 개같이 일해서 번 돈을 가족이 털어가서. 녹즙 값 그거 얼마나 한다고 떼먹고 도망가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 그런 험한 일을 왜 하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내 칭구 같은 정미니를 힘들게 해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지만 그 속에 두고 온 정민을 생각한다. 유쾌하게 끝을 맺었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정민.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