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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사랑한 자신의 소설
2022년 12월 09일
랍비의 아들로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는 소개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순수한 사랑을 택하려는 개인의 여정을 다뤘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저자의 자전적인 요소가 만족스럽게 담기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나 이야기가 잘 구성된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누군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해지고
성숙과 경험이라는 표현으로 기대를 버리며 무감각해지는 것이 서글프고 못마땅했다.
차라리 혼자 동심을 지키며,
외딴 곳에서 낡아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만큼...
그래서 이 소설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뇌가 멈춘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에게도 거부당하는 쇼샤와
똑똑한 주인공 아렐레의 유년 시절 주고받은 사랑과 추억,
그 순수했던 시절의 시간과 마음을 잊지 못한 주인공의 마음과 선택이 공감되었다.
현실에서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결단,
철없다 소리 들을 정도의 일화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자신만의 쇼샤를 오래 마음에 간직하고 있거나,
긴 망설임 끝에 결국 버리고 돌아선 적이 있는 이들에겐
충분히 마음을 건드릴.. 여운있고 힘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또한 나치 침공 전의 역사적 배경, 유대인들만의 가치관과 문화도 이해시키며..
작가로서의 성장,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도 빠져들게 만든다.
한 마디로 소설과 문학을 좋아한다면, 여러모로 만족스러울 작품이다.
쇼샤는 단지 순수와 첫사랑을 의미하진 않는다.
근원과 영원성이 담긴 신비, 이성과 합리적 계산보다
본질적인 영혼과 마음의 끌림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위태로운 이방인으로 서 있는 유대인 아렐레의 선택을 동조하고 응원하게 만든다.
쇼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빛소굴 펴냄
"그 모든 세월은 어디로 간 거지? 우리가 죽은 후에는 누가 그 시간들을 기억할까? 작가들은 글을 쓰겠지만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릴 거야. 모든 것이 보존되고, 가장 사소한 것까지도 새겨진 어떤 곳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파리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거미가 그 파리를 먹어치웠다고 해보세. 그것은 우주 현상의 일부이고 그러한 사실은 잊힐 수 없네. 그러한 사실이 잊혀야 한다면 그건 우주에 오점을 만들어 내는 것일세. 내 말이 이해되나?"
-398쪽
<쇼샤>의 주인공 아렐레 그라이딩거는 보수적인 유대교 집안 태생작가다. 그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규율 안에서 자라왔지만 자유로운 가정의 순수한 소녀 쇼샤(쇼셸레)와 가까이 지내며 행복을 느낀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쇼샤와 멀어지지만 그녀를 결코 잊은 적 없는 아렐레, 쇼샤가 등장하는 꿈은 죽음과 영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아렐레는 쇼샤는 어딘가 살아있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아렐레는 쇼샤와 멀어지고 도라라는 여성과 교제를 시작한다. 도라는 스탈린주의자로 러시아를 찬양하며 폴란드와 달리 자유가 충만한 곳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녀는 신념에 따라 러시아로 떠난다. 하지만 러시아로 떠난 동지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총살을 당하는 참상을 목격한 후 바르샤바에 남아 언제 고발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돈벌이를 위해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현실에 치이며 자연스레 쇼샤를 잊어가던 와중, 작가 클럽에서 모이스 파이텔존과 가까워진다. 자연스레 파이텔존과 가까운 첸트시너 부부와의 교류도 잦아진다. 아내인 셀리아는 겉으로는 보수적이고 정갈한 아내이지만 파이텔존과 부정을 저지르는 사이로, 아렐레와도 가벼운 스킨십을 갖는 사이로 발전한다.
아렐레는 작가 클럽에서 또 다른 부부와 가까워진다. 미국 부자 샘 드라이만과 배우 베티 슬로만으로 베티는 아렐레와 접선하자마자 이성적인 호감을 내비친다. 베티는 쾌락주의를 탐미하는 여성으로 성공을 위해 나이가 많은 샘 드라이만과 함께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아렐레의 능력을 높이 사는 인물중 하나 뿐만 아니라 그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돕기 위해 노력한다.
가볍게 관계를 갖고, 종종 거짓말을 하는 속세의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는 아렐레, 그는 쇼샤를 찾아간다. 번뇌로 가득찬 세상이 아닌 순수와 맑음으로 가득찬 그녀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쇼샤는 어릴적 모습 그대로였다. 성장을 하지 않은 것인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어린 시절 쇼샤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렐레는 쇼샤와 유대인 전통 방식으로 혼례를 치룬다. 아렐레는 쇼샤와 함께하며 지난 시절을 성찰하고 내적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어머니,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을 거에요."
"왜? 하느님은 세상과 유대인이 있기를 바라셔"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하느님이 유대인이 살기를 바라셨다면 히틀러 같은 작자들은 애당초 만들지도 않으셨을 거에요."
(...)
"어머니, 그 무엇도 다하우나 다른 지옥 같은 곳에서 고문받은 유대인들에게 위안을 주지는 못할 거에요."
"위안이 있다면 죽음 같은 건 없다는 것이지. (...)"
280-281쪽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도 비슷한 문장이 등장했던 기억이 있다. 핍박받는 삶, 언제라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삶에서 유대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짓수는 적었다. 그래서 아렐레는 살아남기 위해 속세의 삶을 선택하며 정체되어 있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결국 아렐레는 태초의 순수, "쇼샤"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린 이상과 순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쇼샤>는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자전적인 작품이라고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분위기에, 사람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상실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조차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 연명하기에 바빴다. <쇼샤>의 아렐레가 그렇다. 그의 태초 모습은 "전통적인 유대교 집안의 랍비의 아들"이다. 아렐레는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생에 대한 고뇌와 자기혐오뿐이다.
아렐레에게 쇼샤는 자신의 잃어버린 모습과 인간성이었다. 남들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쇼샤는 남들과는 다른 가치를 잃지 않은 소녀다. 여성으로 자라 자신을 쾌락으로, 상품으로, 선전용으로 무너뜨리지 않은 채 세월을 보낸 소녀다. 모두가 잃어버린 것을 잃지 않은 쇼샤, 그녀에게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언젠가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일종의 사건이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는 쇼샤의 표현은 어떤 초월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공포에 짓눌려 내면의 고요와 세상의 진리를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경종을 주는 부분이다.
"위안이 있다면 죽음은 없다",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어떤 역경이 닥쳐와도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장이 되었다.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사랑이 스며드는 연말이 되기를 바란다.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문을 연 순간. 따뜻한 공기와 더불어 스튜와 구운 고기, 디저트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곳에는 파란 눈에 오뚝한 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한 목이 긴 어여쁜 쇼 샤가 있었다. 쇼 샤는 아홉 살이지만 여섯 살처럼 행동하며 말한다. 쇼 샤는 어설픈 이디시어(독일어, 히브리어 등의 혼서 언어)로 말을 하다가 제대로 된 끝맺음 없이 말을 멈추었다. 그런 쇼 샤의 모습까지도 주인공은 싫지 않았다. 공립학교에 입학한 쇼 샤는 학교생활을 한 지 2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 학교로부터 편지 하나를 받게 된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름 아닌 학교에서는 더 이상 쇼 샤를 가르칠 수 없다는 편지였다. 쇼 샤는 폴란드 어로 된 시 몇 편을 외우고 있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서툴고 조금 느린 쇼 샤를 기다려줄 수 있는 곳은 학교에는 없었다. 그런 쇼 샤의 모습까지 주인공은 사랑했다.
쇼 샤와 노는 것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서, 주인공에게는 하나의 해방감과 자유였다. 누구에게도 꺼내 놓을 수 없었던 자신만의 생각과 이야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것들을 거리낌 없이 쇼 샤의 앞에서는 꺼내 보이던 주인공이었다.
"아렐레, 그 말은 입 밖에 꺼내지마!"
"쇼렐레, 무서워하지 마. 대신 네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해줄게."
쇼 샤는 주인공의 어떤 말이든 믿었고,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믿는 순진한 쇼 샤가 좋았다.
그리고 어느 날. 쇼 샤는 이사를 간다. 이사 와 함께 쇼 샤와의 만남도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주인공은 직감했다. 비록 거리가 두 구역 떨어진 정도라 할지라도, 이미 소녀를 친구로 두기에는 랍비의 아들인 주인공은 조숙해져 있었다. 이후 전쟁이 발발해 주인공 가족은 살고 있던 바르샤바의 크로크말나 가를 떠나 오스트리아 점령하의 있던 어느 마을로 이사를 했다. 주인공은 어디에 있든 자신의 기억 속에 살았던 쇼 샤를 불러내 삶을 함께 살아가려 한다.
전쟁의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그 혼란함이 종결되어 권태 속에 살아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은 꿈을 꾸고 그 이야기를 쇼 샤에게 들려준다. 어른이 된 쇼 샤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주인공이 사랑했던 그 모습이 보인다. 단순함, 솔직함, 그리고 순진함. 그녀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크로크 말 나 10번가를 그리워한다. 그런 쇼 샤를 보며 주인공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사실 펼쳐 놓은 책 속 크로크말나 10번 가라고 이야기해준다. 주인공이 쓰고 있던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 속에 담아 둘 수도 그들을 위한 집과 돈을 줄 수도, 그리웠던 이들을 담는 것까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창조자였다. 빛이 있으라 하는 말로 빛이 생겨났다는 성경 속 구절처럼 주인공은 말로, 또 글로 쇼 샤를 자신의 세계로 데려간다.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하얀색의 쇼 샤. 우리의 이야기는 닫혀있는 책이 아닌 열려있는 책 속에 페이지로 살아간다는 주인공의 말까지. 이들의 사랑은 시간을 흐름을 관통해. 지나간 시간들이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히틀러가 쳐들어오지 않는 한, 혁명이나 대학살이 벌어지지 않는 한 하루하루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삶은 죽어가는 모습보다 강렬한,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어설픔 없는 순수의 세계를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