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카네기 저/임상훈 역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존 에버렛 밀레이 외 그림/김기찬 역
조너선 스위프트 저/이종인 역
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조지 오웰 저/신동운 역
단테 알리기에리 저/귀스타브 도레 그림/서상원 역
데미안은 싱클레어와 데미안 간의 양극성이나 우리가 알 수 없는 공상적인 세계를 상징하는 내용이 아니다. 등장인물은 오직 싱클레어 한 사람뿐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다 손아귀에 자기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으며, 이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지금 이 거리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서 있는 것은 나의 육체일 뿐. 나의 정신은 우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과거를 지나 현재까지 나의 욕구와 욕망부터 종교, 예술, 문화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느끼는 것은 오직 의식 수준에서의 자아, 싱클레어 뿐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은 싱클레어 한 사람 뿐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집필하기 전, 실제 칼 융의 제자인 프리츠 펄스에게 오랜 시간 심리분석을 받아왔다고 한다. (※ 오류일 수 있음 주의)
그래서인지 데미안의 문구 곳곳에는 칼 융이 강조하는 자기와 자아 간의 소통 과정을 굉장히 상세하고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는 자기실현, 즉 개성화와 같은 추상적인 과정을 '자리'처럼 직관적인 요소의 도움을 받아 싱클레어가 진실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그 과정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들 또한 스스로 개성화를 실현하고자 바라는 소망을 글로써 풀어낸 것은 아닐까?
기꺼이 삶의 통찰을 베푼 귀중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저자는 우리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은 아닐까 싶다.
안타깝지만 이 책은 심리학을 깊게 배우지 않았다면 이런 천재적인 책을 몸소 음미하기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우리 독자의 인지가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무의식을 자유롭게 탐험하기엔 너무 무자비하게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삶의 통찰에 대해 깊이 느끼고자 하는 열의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융의 분석심리'에 대해 짧게나마 살펴본 후 읽어보시길 권장 드린다.
분명 알기 전과 알고난 후 체감되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리학을 전공한 자라면 입이 아프도록 추천한다.
이 책은 헤르만 헤세의 꿈의 분석을 상세히 기록한 책이니 여러분도 내가 느낀 만큼 분명 재미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책은 오랜만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또다른 자전적 소설이라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은 경험이 있어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데미안>은 더 심오하고 더 많은 생각을 요구한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수레바퀴 아래서>보다 <데미안>은 더 공감적인 소설이었다.
데미안
(횡설수설...솔직한 책 이야기)
어렸을 때 알던 데미안은 늘 아주 멀리 있는 낯선 존재였다. 그 기억은 오늘 이즈음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렇게 데미안이라는 책을 완독하기 전까지 한결같이 낯설었다. 아주 오래되고 낡은 책은 누우런 빛의 종이 가득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지금까지 기다려줬던가.
실은 내가 너무 나이가 들어 어린 시절에 보던 조그마한 글씨들을 읽어내기가 조금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억 속에 데미안은 잊혀졌다가 다시 큰 활자가 박힌 새 책으로 다가왔다.
고백하건데 단 한번도 완독을 해보지 못했다. 이 책 데미안을 말이다. 그저 혼자의 생각으로는 싱클레어를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어떤 우주적이며 신적이고 완전한 존재인 데미안의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그 정도로 생각하며 살아왔던가보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뭐랄까 생각이 뒤죽박죽 사방으로 어지럽게 뻗어나가고 있다.
부족함 없는 집에서 태어나 부유함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상위 계층만이 선택할 수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주인공 싱클레어는 두 개의 세계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두 개의 세계를 두고 작가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로 나누고 있다. 흰 것과 어두운 것. 이를테면 정의로운 것과 정의롭지 않은 것. 또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과 같은 구분일 수도 있다. 소년은 양극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세계에서 갈등한다. 낯에는 정의롭고 종교적인 동시에 희곤 밝은 세계에서 착한 아들, 착한 남동생의 모습으로 살면서도, 밤이 되면 음습하고 어두우며 비열함과 치졸함이 공존하는 그런 위험한 세계를 동경한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그 까만 어둠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설정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느끼는 두 가지 상반된 세계는 이어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에 그대로 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싱클레어를 힘들게 괴롭히는 인물로 등장하는 크로머와 데미안의 등장이 그렇다. 프란츠 크로머가 주인공에게 악의적인 인물이라면 데미안은 반대로 그 악에서 싱클레어를 건져내주는 구세주와 같은 선의 역할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책 데미안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서로 이어주고 있는 이야기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둘 수 있는데, 이 부분도 사실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이 작용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작가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대화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카인과 아벨’의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은 다른 해석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기존의 상식, 평범한 종교와 일반적인 정의에 수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소설 데미안을 이야기 할 때마다 그 유명한 ‘새’ 이야기에 집착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문구가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또 하나의 세계다.’ 라 했던 그 이야기는, 데미안을 다 완독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을 법한 문구가 아니었던가.
세상에는 많은 세계가 존재한다. 물론 그 세계를 정의내리는 건 신이 아닌 인간이다. 책 속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우린 신을 창조하고 그 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해야 우리는 신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어”p230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 아브락사스는 인간의 내면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것을 상징화한다고 생각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단히 자신을 찾아가는 험난한 여정을 통해 성숙해가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성숙한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해간다고 느꼈던 것 같다.
신을 창조하되 굴복하지 않고 당당해질 것.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찰과 성숙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홀로 성장한다는 것. 자신을 찾아간다는 것. 결국은 신이 멀리서 우리에게 허락한 길이 아닌가. 인간은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틀을 깨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간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존재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