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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젊음의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파는 인간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오스카 와일드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롭게 완성한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실험하는 청년을 묘사하는 이 책은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어투로 삶과 예술, 욕망과 도덕성의 실체를 파헤친다.
읽어보고 싶어 구매했다. 재밌을 것만 같다.
오스카 와일드의 저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작품의 유명세와 출간 이후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제야 이 책을 접하여 읽었다는 것이 참 늦은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곱씹어 여운을 주는 작품은 오히려 책을 덮을 때 '이제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감상으로 변화하곤 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한 번에 읽고 바로 이해하여 받아들이기에 조금 어려움이 있어 읽는 데에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꼼꼼하게 살펴 읽을 수 있던 것 같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심리학 용어에 따르면, 나이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육체와 외모의 젊음에 집착하는 정신질환을 가리켜 ‘도리안(언) 그레이 증후군’이라 한다. 이는 젊음에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를 절망에 빠뜨리고 급기야 파멸에 이르는 내용을 담은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유래된 용어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경멸한 죄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자기 모습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죽어 수선화로 변해버린 나르키소스처럼, 우리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통해 병적인 나르시시즘의 말로를 들여다볼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해서 행한 것들이 도리어 자신을 망치게 되는 이 비극을 바라보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쩌면 나야말로 도리언 그레이의 또 다른 초상이 아닐까?”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가까운 지인에게조차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우리는,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초상화를 지니며 살고 있는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이 작품이 오늘날까지도 회자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 여기에 담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서 추한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타락한 사람이다.
이건 잘못이다.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로,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오롯이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 7p
아름다움이 권력이 되는 순간
방 한가운데, 반듯하게 선 이젤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어느 젊은이의 전신 초상화가 세워져 있다. 화가인 바질 홀워드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우아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청년의 모습에 깊은 만족감을 드러내며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의 옥스퍼드 대학 동창인 헨리(해리) 역시 바질이 그린 작품 가운데 단연 최고라며 찬탄한다. 동시에 그는 이 초상화 속의 청년이 누군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의 이름은 바로 도리언 그레이, 우연히 한 사교 모임에서 만나게 된 도리언의 아름다운 외모에 반한 바질은 이 매력적인 청년이야말로 ‘내 예술의 전부’라고 말한다. 아니나 다를까, 헨리 역시 젊음의 솔직함과 열정에 넘치는 순수함을 간직한 도리언을 보자마자 그를 알고 싶고, 그를 지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에 헨리는 도리언을 칭송하며 미(美)야 말로 아무런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의 가장 위대한 신성이자 최고의 경이이며, 이를 지닌 도리언에게 젊은이란 짧으며 신들이 부여한 이 황금의 시절을 헛되이 낭비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강렬한 흥미가 생겼다. 자신의 말이 이끌어 낸 갑작스러운 효과에 스스로도 깜짝 놀란 그는 열여섯 살 때 당시까지 모르던 많은 것을 알게 해준 책 한 권을 문득 떠올렸다. 도리언 그레이가 혹시 그때 그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냥 공중에 화살을 한 대 날린 셈인데, 그게 과녁에 명중했단 말인가? 이 젊은이는 정말 얼마나 매력적인 친구인가! / 37p
「나는 미가 세상 모든 경이 가운데 최고의 경이라고 생각하오.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은 천박한 사람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 이 세상의 진정한 신비는 가시적인 것이지,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요, 그레이 씨, 신들이 당신에게 잘해 준 것이오. 하지만 신들이 당신에게 부여한 것을 그 신들은 당장이라도 뺏어 갈 수 있어요. 당신이 진정으로 온전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한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어요. 당신의 젊음이 가면 당신의 아름다움도 더불어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어느 순간 문득 깨닫게 될 겁니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위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 41p
바질의 화실에서 헨리를 만난 그날, 도리언은 완성된 초상화를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인지 인식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진정한 비밀이라던 헨리의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속에 기묘한 불안이 자리 잡는다. 언젠가는 얼굴에 주름이 덮이고 말라비틀어지며, 눈은 초롱초롱한 생기를 잃고 침침해질 것이며, 우아한 모습도 다 망가져 흉측하게 변해 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공포를 느끼던 그는, 영원히 이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내어주겠노라는 어리석은 소원을 빈다.
이후 초상화는 마치 도리언의 소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도리언이 병적인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 탐닉과 쾌락에 몰두할수록 제 자신이 추악하게 변해가기 시작한다. 파우스트와 계약을 맺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초상화는 도리언의 죄책감과 수치심을 앗아간 대신 도리언에게 영원한 젊음을 준다. 1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도 변함없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게 된 도리언은 그를 따라다니는 숱한 추문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폭력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해감으로써 끝내 자기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도리언, 인생이 자네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해 두고 있다네. 출중한 용모를 지닌 자네가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해리, 제가 초췌해지고 나이 들고 쭈글쭈글해지면요? 그땐 어떻게 되는 거죠 」
「아, 그때는…….」 헨리 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때는 말이야, 도리언, 자네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할 걸세. 그냥 있어도 승리가 자네한테 찾아오겠지만 말이야. 아니, 자네의 그 훌륭한 모습을 계속 간직해야 하네. 우린 말이야,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오히려 바보가 되고, 너무 많이 생각해서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가 자네를 구할 수 없으니 자네가 해내야 해.」 / 165p
그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꼈다. 아니 이미 선택이 내려진 것은 아닐까? 그렇다. 인생이 ? 인생이, 그리고 인생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호기심이 ? 이미 그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렸다. 영원한 젊음, 다함이 없는 열정, 은밀하게 찾아오는 쾌락, 미친 듯한 기쁨과 거침없는 죄악.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누려야 했다. 그리고 그의 불명예의 모든 짐은 초상화가 대신 짊어지고 가야 했다. / 167p
이처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아름다움을 갈망하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한 남자의 이중성을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독창적으로 완성한 소설이다. ‘초상화가 현실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양심의 캔버스가 되고, 주인공 자신이 육체성을 상실한 이미지로 도치되는 운명의 전환’을 환상적 기법을 활용해 흥미롭게 엮어낸다. 하지만 이런 소설적 장치를 걷어내더라도, 순진무구했던 도리언에게 미와 쾌락을 추구하는 것만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지속적으로 도리언의 정신을 지배하려드는 한 인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헨리다.
헨리는 ‘쾌락은 자연의 시험이고 자연이 승인했다는 표시지. 우리가 행복하면 늘 선할 수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선하다고 늘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거나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궤변으로 도리언을 꾀어낸다. 도리언에게 실연을 당한 뒤 자살한 시빌 베인의 죽음 앞에서도 마치 도리언의 삶에 일어난 하나의 비극적인 연출에 지나지 않는, 어떤 생경한 경험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게 하기도 한다. 만약 그날 화실에서 헨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도리언이 자신을 탐미하고 쾌락에 빠져드느라 양심을 외면하는 일이 일어났을까? 도리언이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길 바랐던 바질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결말은 달라졌을까?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소설은, 이따금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드는 여러 유혹과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여러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균형감각을 찾아야할지를 고심해보게 한다.
「공작부인, 혹시 옛날에 저지른 잘못 가운데 큰 잘못, 뭐 기억나시는 것 없어요 」 그는 건너편의 공작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무 많아서 탈이지.」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잘못을 다시 저지르세요.」 그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젊어지려면 옛날의 잘못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어요.」 / 69p
「고도로 조직적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에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 아닌가 싶어. 더 덧붙이자면, 모든 경험은 다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거야. 누가 결혼에 반대하는 말을 했다면 그 말이 무슨 말이든 그것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지. 나는 도리언 그레이가 그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아 6개월 정도는 그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다가 갑자기 또 다른 사람에게 푹 빠져 버리게 되기를 바라. 그러면 그 친구는 아주 훌륭한 본보기가 될 거야.」 / 120p
「부조화란 억지로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삶, 중요한 것은 그것 아니겠나? 도덕가연하는 사람이나 청교도가 되고자 한다면 이웃의 삶에 관해서 자신의 도덕적 견해를 과시하고 내세울 수 있겠지. 하나 그렇다고 그런 사람이 이웃의 삶에 신경이나 쓸까? 게다가 현대의 개인주의는 실제로 더 높은 목표를 두고 있다니까. 현대의 도덕이란 자기 시대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이지. 그런데 나는 교양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 시대의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장 상스러운 부도덕이 아닐까 생각하네.」 / 126p
끊임없이 욕망하는 인간의 타락을 주제로 한 이 영원불멸의 소재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남성이 느끼는 남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동성애적 코드, 예술의 근본과 가치에 대한 물음, 19세기 영국 귀족 사회의 위선, 극작가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오스카 와일드 특유의 위트와 직설적인 독설,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 등 다채로운 읽기가 가능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작품으로 하여금 나는 얼마나 많은 초상을 내 안에 지니고 있는지,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초상에 갇혀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한 물음에 다가가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