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05일
이야기를 들어주는 힘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일이다. 이렇게 입에 담을 수 있어서, 내 업이 사라져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시마야는 주머니가게다.
3번째로 큰 가게의 주인 이헤에에겐 조카딸 오치카가 와있다.
꽃다운 나이의 이 어린 조카딸에겐 그늘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가진 아이.
미시마야 주인의 조카딸이지만 아가씨로서가 아닌 하녀로 와있다.
몸을 움직이면 생각할 시간이 없기에 오치카는 부지런히 일만 한다.
미시마야에는 흑백의 방이 있다.
주인 이헤에가 손님과 바둑을 두는 방이다.
어느 날 손님을 청해놓고 이헤에 부부는 급한 일로 출타를 하게 되었다. 그들을 대신해 오치카는 손님을 맞게 된다.
그 손님은 처음 본 어린 오치카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밀을 말한다.
그 이후 이 어린 조카딸의 그늘을 없애주기 위해 고심하던 이헤에는 흑백의 방에서 괴담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낸다.
그리고 괴담을 들려주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치카에게 듣게 한다.
사람들이 가져온 이야기는 슬프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고, 세상에 있을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모두가 사실이었다.
감추고 있는 슬픔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평소에는 잊으려 애쓰며 살았던 어두운 이야기들이 흑백의 방에서 들어주는 사람 오치카 앞에서 술술 나온다.
만주사화 꽃에 얽힌 슬픈 이야기
사람을 잡아먹는 저택의 비밀
병으로 인해 떨어져 살던 누이는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연리지처럼 누이와 동생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데...
사람의 영혼을 가두는 거울.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서로가 필요한 것들을 이어주는 장사꾼의 정체는?
기이하고 괴이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들이 참 매력적이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 괴이한 이야기들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 읽게 되었다.
이렇게 습하고 어둑한 날에 읽는 괴담은 아주 색다른 맛이었다.
미야베 미유키
일명 미미여사.
내게 이 미미여사의 첫 글은 <눈물점>이다.
사실 <눈물점>을 읽다가 이 이야기가 시리즈라는 걸 알고는 첫 이야기부터 읽어야겠다 싶어서 <흑백>을 읽기 시작했다.
오묘한 분위기가 여태껏 읽었던 일본 소설과 다르게 다가왔다.
사회파소설을 잘 쓰는 작가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괴담집도 엄청난 필력으로 썼다.
대놓고 무서운 것보다 괜히 으스스하고 생각할수록 오싹해지는 이야기들이라 문득 생각나서 소름 돋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들엔 따뜻함이 스며있다.
"정이다. 사람의 정 말이야. 어머니도 말씀하지 않았니? 곤란에 처한 사람을 못 본 척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돕는 마음을 잊지 마라.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본의 풍습과 문화도 배우면서 멋진 이야기도 수집하게 되는 작품들.
그 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정과 사랑 의리가 스며있다.
그래서 아무리 무섭고 섬뜩한 이야기여도 결국에는 따뜻한 기억만 남게 된다.
오치카는 들어주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오치카는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자신처럼 슬프고도 잔인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걸.
그러나 그들 모두는 그걸 이겨내고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으며 자신의 상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저 무서운 이야기들의 나열이라고 생각했던 괴담집을 읽으며 살아가는 묘미를 배운 기분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닫고 자신의 말만 하는 세상에 '경청'함으로써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오치카의 모습은 배울 점이 많다.
그리고 보이지 않게 세심하게 상대가 배려 받고 있다는 걸 못 느끼게 배려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여러모로 내가 가지고 있던 일본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걷어내는 중이다.
우리네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낯설지만 익숙하고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의 매력을 읽어가는 중이다.
미시마야 변도 괴담 시리즈를 읽기 아주 좋은 날들이다.
때는 일본의 에도 시대 풍물이 번성한 상인의 시대이다 그중에서도 간다 미시마초에 자리 잡은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화려하고도 독특한 모양새의 주머니로 에도 풍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화려한 주머니와는 달리 이곳에는 가슴속에 크나큰 상처를 간직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오치카 미시마야의 주인장 이헤에의 조카딸이다 열일곱이라는 꽃다운 나이에도 미시마야에 틀어박혀 하녀의 일을 거들며 하루하루를 견뎌가고 있다
어느 날 주인 이헤에가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헤에와 바둑을 두고 싶다며 손님이 찾아온다 오치카는 어쩔 수 없이 숙부를 대신하여 숙부가 바둑을 두는 흑백의 방에서 손님을 맞이한다 비슷한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손님 도키치 역시 남에게는 말할 수 없는 아픈 과거를 간직한 사내였다 도키치는 그 자리에서 오치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을 죽인 형에 대한 그리움과 미움이 뒤섞인 잔혹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도치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치카는 깨닫는다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있다 갖가지 종류의 죄와 벌이 있다 각각의 속죄가 있다 어둠을 껴안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
그러한 조카의 변화를 눈치 챈 이헤에는 오치카를 위해 새로운 일을 궁리한다 흑백의 방에 이야깃거리를 가진 손님을 초대해 괴담 대회를 여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오치카 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초대된 손님들은 저마다 기괴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는다
백 냥을 받는 대가로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아야 하는 자물쇠 장수 일가 요양을 위해 오랜 세월을 떨어져 자란 누이와 동생의 불가사의한 관계 등 손님들이 들려주는 서로 다른 빛깔의 다섯 가지 이야기는 씨실과 날실처럼 한데 엮여 기괴하고 서글픈 무늬의 지어간다 과연 이 이야기들은 오치카에게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까 이헤에의 생각은 옳았을까 그리고 오치카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괴로운 과거란 무엇일까
데뷔 30년이 넘는 미야베 미유키는 '미미 여사'라는 호칭으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추리소설로 데뷔했지만 긴 시간 많은 작품을 선보인 만큼 그의 소설은 다채롭다.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되는 『화차』, 『이유』, 『모방범』 등 걸출한 베스트셀러도 있지만, 에도 시대 괴담을 다룬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그의 필생의 작업이 될 거 같다. 미미 여사는 자기만의 '괴담 대회'를 완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괴담 대회'는 백 명의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한 명씩 괴담을 들려주는 일본 전승으로 많은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 이야기를 마칠 때 각자 들고 있던 초를 꺼 100번째의 초를 끄면 귀신이 나온다는 전설 때문에 99편에서 그치지 않을까 싶지만 변조 괴담 자리이니 괜찮겠지. 아직 갈 길은 멀다.
풍물이 번성한 상업 전성기였던 에도 시대, 도락과 풍류의 시대를 보여주면서도 인간 내면의 상징 같기도 한 장신구 주머니를 파는 미시마야 가게에 오치카라는 소녀가 등장한다. 그녀가 큰 슬픔을 안고 숙부 이헤에 가게에서 힘든 하녀 일을 자처하며 머무르게 된 사연과 '흑백의 방' 탄생 배경이 『흑백』의 주요 줄기다. 나는 오치카가 혼례를 치르고 미시마야 가게를 떠난 뒤 도미지로가 2대 이야기를 듣는 자가 된 『눈물점』부터 읽고 역주행했지만 각 권마다 도입 설명을 찬찬히 하면서 각각의 완결성이 있어 어떤 책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흑백의 방'은 원래 주인 이헤에가 손님들과 바둑을 두는 공간이었다. 어느 날 이헤에는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우며 트라우마로 대인기피증이 있던 오치카에게 손님을 맞도록 당부한다. '감추고 있는 슬픔은 서로 통하는 법'이라 손님 도키치는 오치카를 만난 순간 공명했다. 살인을 한 형에 대한 미움과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죄책감으로 평생 괴로워했던 그의 이야기가 이 책의 첫 이야기 「만주사화」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처럼 도키치의 이야기를 듣던 오치카는 ‘세상에는 온갖 불행이 있다. 갖가지 종류의 죄와 벌이 있다. 각각의 속죄가 있다. 어둠을 껴안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기능처럼 이야기를 들으며 오치카도 자신뿐 아니라 인간 삶을 성찰하게 된다. 도키치 일화를 들은 이헤에는 ‘흑백의 방’의 성격을 바꿔 이야깃거리를 가진 손님을 초대하는 괴담 대회(백물어百物語) 공간으로 만든다.
영혼이 부서질 정도로 비극적인 일을 겪은 젊은 처녀에게 어지간한 위로나 격려는 별 소용이 없다. 그보다는 차라리 오치카가 이런 식으로 항간의 신기한 이야기, 업보 이야기, 온갖 인생담을 듣고 그런 이야기들에서 실을 자아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꿰매어 수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해서 한 번에 손님 한 명만 초대하여 유일한 청자 오치카 앞에서 기이한 이야기를 풀어 놓게 하는 변조 괴담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이 괴담 자리에 엄격한 규칙은 없다. 화자는 내키는 대로 말하되 감추고 싶은 내용은 감추어도 상관없다. 사람 이름이나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가명으로 바꾸어도 좋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미시마야를 떠날 뿐. 듣는 역할인 오치카도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숙부 내외에게 전하고 나면 다시는 거론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진위도 아무렴 상관없다.
화자는 말하고 버린다.
청자는 듣고 버린다.
그것만이 규칙이다.
- 미야베 미유키 『피리술사』, 「다미토리 연못」
이야기를 듣는 사람도 오치카 한 사람,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한 사람이라 비밀스러우면서도 집중하게 만드는 구도는 '천일야화'와도 겹친다. 흑백의 승부로 판가름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성격도 그렇지만, 에도 시대라고 해도 인간의 본성과 사회 문제를 들여다보는 미미 여사 소설의 특성과 인간애는 의미 있는 현대적 풀이이다.
수리를 의뢰받은 곳간 자물쇠를 계기로 아름답지만 사람을 삼키는 저택인 줄도 모르고 천 냥을 받고 1년간 머물기로 한 자물쇠 장수 일가 이야기, 요양을 위해 오랜 세월을 떨어져 자란 아름다운 누이와 남동생의 사랑 그리고 온 가족이 불운에 처한 이야기 등은 각각의 이야기였지만 마지막 「이에나리」에서 그것들이 한데 맞물려 피날레를 이룬다. 마지막 에피소드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교하고 박진감이 넘쳐 다음 책에 대한 흥미를 더욱 돋운다. 이래서 미미 여사, 미미 여사 하나 보군했다.
그리스 비극에서도 볼 수 있듯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인간은 행복이 아니라 비극에서만 '운명'을 말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행복은 가변적이지만 죽음은 고정불변이기에 그러하리라. 우리의 소실점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우리의 털어놓고 싶은 마음, 듣고 싶은 마음도 거기서 나온다.
결국 눈앞에서 요시스케를 죽였는데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욕하지도 않는다. 이유를 캐묻지도 않고, 울면서 사과한 것도 아니다. 건넨 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 살려 주세요.
그렇게 자신이 소중한가. 착한 아이인 채로 남고 싶고, 마쓰타로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것인가. 살려 달라고 매달리면 마쓰타로가 용서해 줄 거라고, 그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죽일 만한 가치도 없다. 마쓰타로는 그 점을 깨달았다. 이런 여자 때문에 미친 듯이 질투하고, 분노로 이성을 잃고, 요시스케를 죽인 자기 자신이 가련해졌다. 이런 여자에게 인생을 걸고 마루센에서 견뎌온 나날을 헛수고로 만든 것이 한심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 미야베 미유키 『흑백』, 「마경」
예전에 만주사화(피안화, 상사화, 죽음의 꽃)를 배경으로 그린 내 그림.
그러고 보니 왼쪽 뺨에 눈물점도 그려놨으니 우연히도 매우 미야베 미유키스럽다.
ps) 작품 수가 많아 되려 그 때문에 미미 여사의 소설에 입문하기 요원했는데, 이번에 전자책이 대거 등장해 매일 즐겁게 읽고 있다.
나는 오치카 전개(미시마야 변조 괴담 1부)보다 이야기를 그림으로 남기는 도미지로 전개( 미시마야 변조 괴담 2부)가 더 맘에 든다. 여유가 된다면 매 일화마다 도미지로가 남기는 소설 속 그림을 실제 그림으로도 그려보고 싶다. 바빠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