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조예은 저
현실을 변신의 장소인 것처럼 살고 싶다. / p.260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성향 자체가 비관적인 편인데 아무래도 사람들끼리 모이게 되면 긍정적인 이야기들보다는 서로의 상황을 한탄하는 말들을 나누다 보니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에 대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먼저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확신이 올라갈 것이고 주어진 일들을 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다르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어차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기 때문에 조금 더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겠다는 다짐도 함께 자주 하게 된다.
이 책은 정혜윤 작가님의 에세이이다. 예전에 아무튼 메모라는 에세이를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좋았다. 사실 메모라는 주제에는 많이 벗어나는 듯했다. 보통 주제와 다르게 전개가 된다면 조금은 부정적으로 보게 되기 마련인데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님의 다른 책을 찾던 도중 이 에세이를 보았다. 구매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동안 다른 도서에 밀려 생각만 하다가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저자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터뷰했거나 들은 말, 봤던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이다. 어부와 낚시꾼, 야채가게 사장님 등 비교적 자주 보거나 들을 수 있었던 익숙한 사람들부터 9.11 테러에서 동생을 잃은 형,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딸을 잃은 어머니, 세월호 참사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 컬럼바인 사건의 생존자 등 조금은 아픈 역사라고 보여질 수 있는 사건들의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살게 해 준 따뜻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개인적으로 컬럼바인 사건의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컬럼바인은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한 학교와 극장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총기를 난사해 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사건이다. 학교에서 벌어진 첫 번째 사건으로는 총기를 맞아 생사의 순간에서도 아이들을 대피시키고자 안내했던 선생님과 사건을 일으킨 두 학생의 이야기가, 두 번째 사건에서는 생존자들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의 따스함이 녹아 있는 내용이었다.
항상 사건에는 마음을 울리는 사연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선생님의 희생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두 번째 극장 사건에서의 손을 내민 사람들의 존재가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두 번째 사건 이후 일상에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던 소리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생존자들에게 큰 아픔을 주는데 도와주겠다고 나선 이들은 첫 번째 사건의 생존자들이었다. '우리는 컬럼바인 생존자입니다.'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함께 이겨내고자 하는 모습들이 좋았다. 사랑이 부족해 사람을 죽이거나 스스로를 죽이려고 했던 두 범죄자의 이야기와 대비가 되어 더욱 와닿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는 어부와 소중한 이를 잃은 가족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뭔가 뭉클하면서도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최근에 많이 들었던 사랑이라는 단어의 힘에 대해 다시 느끼기도 했었는데 단순하게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만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이유 중 하나가 된 듯했다.
누군가는 절망적이거나 단조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에세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슬픈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단어와 생각으로 기쁘게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안타까움과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뭉클한 감동과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인류애와 위로, 사랑과 연대 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많은 감정을 다시금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몇 단어로 압축하여 저장하고,
그것을 꺼내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새롭게 느껴졌다.
그냥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단어들이,
깊이 생각하면 눈물이 날 만큼 크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잡고, 기록한 저자가 멋지게 느껴졌음.
슬픈 순간들을 많이 경험한 저자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행복을 주고 감동을 주는 작은 것들에 대한
깊은 마음이 보여서 좋았음.
남들이 들으면 우습겠지만(남들 시선 신경 쓰지 말자고 매일 다짐 해놓고. 실체가 없는 남을 신경 쓰는 나.) 일하는 게 힘들다. 내 일만 잘하면 되는 건지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내 일은 물론 잘해야 하고 남의 일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야 한다. 남의 돈 벌어먹고사는 건 쉽지 않다는 진리를 매일 절감한다. 쉬는 날 저녁에 전화해서 나를 남과 비교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고 막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해서 업무 시작하려고 했다가 육탄전에 끼기도 하는. 영화로 따지면 액션, 서스펜스 장르를 찍었다고 할까. 종일 땀이 흘러서 전에 했던 업무인데도 까먹어서 헤맸다. 오랜만에 식은땀을 흘렸다. 어떤 말들은 아프다. 그리고 슬프다.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좋을 말들이 더 많은 세계에서 간간이 버티며 살고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가지 통찰한 건 필요없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말이 필요하지 않다.
중학교 때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만들 수 있는 직업이라고 막연히 동경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글과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의 바람. 출판사 유튜브를 보곤 하는데. 이건 정말 안 좋은 생각인데. 대학 졸업하고 출판사에 들어갔으면 저 정도의 직급이 됐을 텐데, 미련이 철철 넘치는 생각을 한다. 인생 쉽지 않고 죽음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후회나 자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읽으며 고통은 지나갈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고통이 온다 해도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다. 책의 제목을 잘 지었다고 감탄한다. 세상은 슬픈데 말은 기쁘다. 제목을 보고 어찌 사서 읽지 않을 수 있을까.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껴안고 사는 우리의 마음을 저격한다. 어디 슬픈 세상에서 기쁜 말은 어떤 게 있을까 탐험해 볼까. 관계를 맺는 건 귀찮지만 사람들이 어떤 모습과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한 이중적인 나에게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탁월한 책이다.
자신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단어 하나를 빼고 자신을 이야기해보자고 책은 시작한다. 라디오 PD인 정혜윤에게는 라디오를 말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책 역시 말하지 못하게 한다. 중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말을 가지고 와야 한다. 설명은 길어진다. 듣는 이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잘 듣는 귀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삶의 중요 단어를 맞힌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는 정혜윤이 만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부, 낚시꾼, 시장 상인, 세월호 유가족, 뒤늦게 글을 배운 할머니, 콜럼바인 총기 사건의 생존자. 세상사를 책으로 배운 나는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을 통해 다시 깨닫는다. 허튼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과는 가급적이면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방어벽을 친다고 열린 마음으로 살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한 번뿐인 삶에서 소중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인 걸. 이미 너무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겪어 왔기에. 현실에서 만난 이들에게 자주 이토록 실망하지만 나는 책에서 그토록 깊은 내면을 가진 그들을 만나 환호한다.
헤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 중에 "우리가 가진 것은 목소리뿐(All I have is a voice)"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내게 중요해요. 나는 사회의 통념대로라면 전문가가 아니지만 아까 말한 대로 내 인생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전문가예요. 우리는 알아야 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해요.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문제를 문제로 알아야 문제를 풀 수 있어요.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中에서)
콜럼바인 총기 사건의 생존자 헤더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을 자신의 인생으로 끌고 온다. 결코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을 때 헤더는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의 전문가는 타인이 될 수 없다. 오로지 나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언어가 없는 이들은 얼마나 슬프고 초라한가.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서 인상적인 사람은 야채장수 언니였다. 그이를 만나기 전 정혜윤은 떡집 주인을 만난다. 주인은 엄마의 떡집 좌판을 물려받았다. 시장에서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잘 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저 잘 듣기만 했는데 시장 사람들은 떡집 주인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였다. 그이가 소개해 준 야채장수 언니는 우울증을 앓았다. 그러다 우울증 탈출법을 찾았다. 일기 쓰기, 동화책 읽기, 천 원짜리 플라스틱 컵에 커피나 차 마시기. 세 가지 방법으로 우울증을 이겨냈다.
쓰기, 읽기, 마시기. 한 사람의 인생을 절망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하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잘 자기. 잠이 오지 않아도 일단은 눈을 감고 있기. 머릿속에서 자라는 불안과 상념을, 그건 그것대로 지켜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당신의 고통을 위로하고 싶지 않다.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라고 쉽게 말하고 싶지 않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그런 말을 해주는 책이다. 당신의 삶에 어떤 말을 놓아 둘 것인가. 그 말을 가지기까지의 서사를 정혜윤은 귀가 배지근해지도록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