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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정희진 “글쓰기는 약자가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2020년 04월 10일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 출발점에 따라 간절함이나 논리의 구체성이 달라진다. 아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작금의 세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자기 객체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자신을 타자화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분별과 객관화 작업이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자신이 스스로를 평가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의 비판과 문제의식이 없다면 사회를 지배하고 이끄는 정치인과 소수 엘리트 계층의 자각과 반성은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정희진 작가의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여성학 연구자인 작가가 자신이 읽었던 책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과 애씀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것은 자신의 말과 글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자 학자로서의 보편적 당위성을 지키는 분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약자로서 여성의 입장을 좀 봐 달라는 식의 구걸의 언어가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지이자 동등한 지위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평등의 언어를 희망하고 있다.
"극복, 사랑, 혐오......,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를 알기 위해 "벼랑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p.39~p.40)
스스로에 대한 어정쩡한 타협이나 적당한 선에서의 물러섬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의 특징은 결과론적인 외로움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게으름에 천착하는 보편적 인간상에 대한 경멸이나 기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경멸하는 다수의 편에 서서 그들과 화해하고 그들의 습성을 십분 이해하노라,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들을 다독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을 곱씹을망정 게으름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보편적 인간의 대열에 서기는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1장 '몸에서 글이 나온다', 2장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산다', 3장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를 통해 작가가 읽고 정리했던 60여 편의 작품에 대한 자신의 느낌이나 주장을 리뷰 형식으로 피력한 책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는 작가의 주관적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할 만큼의 완벽한 논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물론 독자의 성향이나 이념적 기울기에 따라 호불호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 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p.165)
삶의 범주는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된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삶을 목표로 하는 어떤 지향점을 향해 채찍질하고 이끄는 극기의 삶, 사회적 관습이나 사회 구성원의 시선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자유를 추구하는 풀어짐의 삶, 모든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존을 유지하는 도피 혹은 은둔의 삶이 그것이다. 인간은 대개 상황에 따라 세 유형을 번갈아가며 살아가게 마련이지만, 하나의 유형을 선택하고 그 방식을 극단적으로 고수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풀어짐의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 곁에 조력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제반 지식을 팽개친 채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만 몰두하는 영화감독이나 우주 연구에 매진하는 천체 물리학자 혹은 카사노바처럼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곁에서 그들의 생존을 돌볼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하든 필연적으로 후회와 번민을 안게 된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끝없이 곁눈질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이다.
"홍준표의 '돼지 흥분제 사건'으로 나는 두 가지 진리를 다시 확인했다. 국가 안보를 내세워 표를 얻으려는 사람, 정확히 말하면 국민 안전을 대국민 협박용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사실과 이 땅에서 오래 살려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p.242)
추석이 코앞이다. 그러나 태풍 '힌남노'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은 명절이 그저 즐겁지만은 않을 터,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인간도 하나의 동물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허울뿐인 명예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삶도 죽음도 하나의 자연 현상에 불과할 뿐 특별할 게 없지 않은가. 정희진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것이 추석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나는 “글은 곧 글쓴이다.”라고 생각한다. 아니, 글만큼 그 사람 자체인 것도 없다. (10)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14)
피식민자의 자기 찾기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38)
약자만이 지닐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40)
나를 드러내는 것. 외면화는 말 그대로 개인이 타인과 사회와 새로운 세계面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55)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큰 사건이 아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짧다. 대부분은 시시하고 잘 안 써지는 글과 같다. (74)
기기가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시민권이 되었으니, 휴대 전화와 인터넷 계정만 없애면 절로 은둔이다. (89)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의미다. 돈과 권력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다. 최고의 의미는 내가 타인의 앎의 노력 대상이 된다는 것(사랑받음), 그리고 상대를 알려는 노력이다(사랑). (102)
다른 사람과 대체할 수 없는 신뢰와 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105)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김찬호 재인용)... 삶에서 이해받고 싶은 마음만큼 간절한 것은 없다. 안전한 관계는 사람을 살게 하는 ‘구조’다. (108-109)
내 몸을 완전히 기댈 만한 든든한 벽을 가지고 싶다. 참마음으로 나를 안아주는 크고 안전한 가슴을 가지고 싶다. 나를 속이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가지고 싶다. (김달진 재인용 123-124)
예술가, 지식인, 정치가의 업무는 자기 변화다. (126)
사랑도 기본적으로 자기만족 행위여서 주는 것이 ‘쉽다.’ 반면, 남의 마음을 제대로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쫓겨서이든 자발적이든, 죽음의 열차를 타고 싶어 한다(공지영 재인용).”... 내 생각에, 이 시간을 견디는 최선의 방법은 타인의 상처를 돌봄으로써 나를 위로하는 ‘대신 꽃다발’ 마음가짐이다. (132-133)
보이지 않았던 것을 통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 모든 사유의 시작이다. (135)
인간은 대단하지 않다. 모든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지구, 자연, 다른 생물들의 관점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이 무수한 ‘미물’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136)
돌봄 윤리의 핵심은 무조건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협상하고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몸의 혼신이다... 선물하기의 핵심은 배려다. 타인의 상황을 고려하고 상상하는 일은 고차원의 윤리다. 헤아리기 어렵다면 물어보면 된다. (140)
분노의 시대요, 상처의 시대다. 상처받고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까.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것이 양극화된다. 계급 구조는 물론이고 인성까지 둘로 나뉜다... 기존의 개인이 공동체로부터 인권과 자유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였다면, 지금은 스스로 알아서 각자도생을 수행해야 할 ‘자원’이 되었다. (162-163)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165)
나는 정치와 사회운동과 학문은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종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겸양과 자기 변화. 궁극으로는 헌신으로서의 변신이다. 타인 되기. (168)
“ 무지한 사람들과 달갑지 않은 조우”에 나오는 얘기들은 나도 매일 듣는 레퍼토리다. 무지clueless는 지식이 없다는 뜻을 넘는 심오한 말이다. 영어의 ‘클루’는 단서, 실마리라는 뜻이므로 클루가 없는 인간은 ‘개념이 없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대화는커녕 접촉에서부터 폭력을 발산하는 사람들이다. 본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분들. 권력이 부여한 무지는 국가도 구할 수 없다. 그들을 밟아줄 (상상 속의) 코끼리가 필요할 뿐이다. (178-179)
파시스트는 피아, 자아 경계가 없다. 나=세상이다... 이치와 논리를 포기하고, ‘막 나간다.’ 이 과정에서 전쟁과 폭력은 필연적이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모르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개념이 없다.... 의미를 모르면 고통도 없다(안드레아 드워킨 재인용). (182-183)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183)
우리는 매일 “누가 돈을 받았는가.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 ‘몸통’은 누구인가...를 두고 가스등을 켜대는 세력에게 시달린다... 이때 약자의 무기는 단 하나. 자신을 신뢰하고 기존 언어를 의심하는 것이다. (231)
그럴 때가 있다. 읽고 싶은 분야가 있어서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읽고 있을 때. 관심 분야가 없을 때, 읽기 편한 책들 혹은 베스트셀러들, 아니면 누군가 읽었다는 책을 검색하기도 한다. 주관 없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는 것이다. 책을 읽은 후 리뷰를 쓸 때도 읽을 때와 다르지 않다. 책이 주연이고, 나는 조연이거나 엑스트라다. 내 생각이 글을 이끄는 게 아니라 책 내용에 내 생각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그러면 재미도 없고 내 것 같지 않은 글이 된다. 자기 생각을 풍성하게 담아야 글에 힘이 실린다.
<정희진처럼 읽기>에서 저자는 독후감에 대해 말한다. 작가가 "쓰고 싶은 독후감은 다른 시각으로 읽음으로써 '없는' 내용을 만들어내는 방법" 이라고 썼다. 정희진의 독후감은 책을 읽고 쓴 글이지만 작가의 생각이 주를 이룬다. 독후감이면서 책에 '없는' 내용들을 더 많이 만난다. 작가 자신의 생각, 관점, 철학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책을 읽지 않아도 내용을 몰라도 글이 흥미진진하고 힘이 있다. <정희진처럼 읽기>를 읽고 같은 형식으로 쓴 책을 이어서 읽었던 이유다. 모두 책에 대해 쓴 책들이다.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다.(246쪽)
재미있는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이 담긴 글이다. 흔히 만나는 책리뷰를 읽을 때도 책에 담긴 이야기보다 글쓴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그 때문에 소개한 책에 호감이 간다. 이 책은 60여 권의 책을 이야기 하는데도 내가 아는 책이 거의 없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한 다른 견해를 기대하고 독후감책을 보는 데 이 책은 아니다. 작가 생각을 읽는 것만으로 흥미롭다. 작가의 생각 때문에 몇 권 구입해놓기도 했다. 책을 읽고 지축을 흔드는 충격을 나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독후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책 자체라기보다는 독자의 처지와 조건이다. 어떤 이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책이 어떤 이에겐 지축을 흔드는 충격을 준다. (<정희진처럼 읽기>, 305쪽)
이 책과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두 권을 같이 읽고 있다. 차례대로 읽을 필요가 없으니 눈이 가는 대로 읽는다. 독후감이지만 사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제목만 봐도 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이렇게 활용한다. 내 글을 쓰기 직전에 이 책을 읽는 것이다. 글쓰기 직전에 읽은 글 때문에 내 글이 미세하게 달라지는 경험을 가끔 한다. 글쓰는 스타일이 미세하게 바뀐다. 글에 줏대가 없어 그렇다. 이 책을 읽는 이유가 줏대 있는 글을 쓰고 싶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정희진처럼 말이다.
나는 "글은 곧 글쓴이다.(I am what i wrote 혹은 'All that me")라고 생각한다. 아니, 글만큼 그 사람 자체인 것도 없다.(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