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릭스 코브 저/정지인 역
김누리 저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공저/김설인 역
조앤 I. 로젠버그 저/박선령 역
한성희 저
박우란 저
인스타를 하다가 개그맨 장도연의 추천도서라길래 한 번 구매해봤다.
읽다보니 공감도 되고 내가 모르게 저질렀던 부끄러운 행동들이 반성이 되기도 했는데 역시 1권을 통으로 다 읽기란 조금 힘들었던 책인 것 같다.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아무래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란 단원의 <사랑이 넘치는 불평등한 우리집>이라는 부분이었다.
읽으며 눈물이 저절로 나는 그런 챕터였던 것 같다. 너무나 아내의 입장이 공감이 되는데 과연 남편의 입장에서 오찬호 박사님처럼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한편으로는 위로받는 기분이기도 했다.
[백번을 물어도 노키즈존은 혐오다.]라는 챕터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노키즈 존을 볼 때마다 뭔가 마음 한 편으로는 불편하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면 작가의 생각까지 도달 할 수 있다는 점을 왜 몰랐을까?
이 챕터들 뿐만 아니라 많은 좋은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모든 챕터가 다 위로일 수는 없었다. 불편한 부분도 확실히 있었다.
저자의 의도는 알겠지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교수의 이야기도, 또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연락해서 다단계에 발을 들이게 한 악하게 사는 그 분의 이야기도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책에 쓰여지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으며 그들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은 오히려 역차별이라는 생각이 든 건.. 나만의 착각일까..?
한 200페이지 가까이 읽으며 공감도 위로도 또 부끄러움도 느꼈지만 나의 한계가 200페이지 정도인 것인지..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그래도 마음먹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이 책이 작가님의 의도처럼 그런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차한잔 마시면서 읽을만한 책.. 그런 가벼운 책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아주 나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견일 뿐이지만....
2020.05.14.
9기 북클러버 '책책폭폭'
첫 번째 책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Q. 이 책에 대한 한줄평?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아프도록 공감돼서 많이 읽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
최소한의 차별 감수성조차도 없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표지조차 못 넘길 책
읽는 내내 부끄러우면서도 떳떳했던 책. 눈꺼풀을 잡아 뜯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만, 읽는 만큼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차별을 발견할 수 있었던 책.
“특수학교 설립을 막는 학부모의 이야기. 작가왈, ‘연민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라는데 틀린 말이다. 사람들은 상대를 가려서 연민한다."
너무 공감되는 사례였다. 요즘 학부모는 내 아이에게는 관대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냉정하다. 본인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일이요, 사랑이요, 헌신이라고 생각하며 정의감마저 갖고 있는 것 같다. 다 같은 학부모면서. 본인의 아이가 장애아이였다면 무릎 꿇고 애원하면서 얼마나 속이 미어질지는 티눈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야속하다. 그래, 험한 세상에 모든 것들이 내 아이의 적으로 보이겠지. 그러나 그렇게 적의로 가득찬 눈으로 살아가는 당신 또한 세상을 험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모르겠다.
“배달원에게 지나친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고객의 이야기. 작가왈, ‘길들여지면 선을 넘는다.”
서비스직에게도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선을 정해주어야 한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에 따라 콜센터 상담원이 전화를 끊을 권리가 생긴 것은 그 첫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요구하는 사람은 선을 넘는 줄 모른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있는 힘을 다 해 도와주면 더 안 주냐고, 교육권을 침해당했다는 말만 들려온다. 그들은 얼마나 내 권리를 보호해주었나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읽으면서 즐거웠냐고 묻는다면, 인간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좋게 말해 남을 차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쁘게 말해 온갖 눈치란 눈치는 다 보며 살아왔다. 내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스스로 누군가 차별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고 싶었다. 그랬는데 편안함에 기대어 나 또한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 숨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찔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본인 인생이 가장 비극이라, 내가 당한 일은 끝없이 주절거릴 수 있지만 내 잘못은 온갖 변명으로 덮고 뒷수습하기 바쁘다. 보통 그렇게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만만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움튼다. '적응해야만 하는 억울함'도 생겨난다. 저자는 결과적으로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덜 차별하고, 덜 억울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지었을 것이다.
읽고 나서 두 가지를 바라게 되었다. 첫째, 이 책이 널리널리 유명해지면 좋겠다.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팩트로 두들겨맞고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둘째, 나 또한 이 책을 읽고 느낀 바를 잊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덜 편하게 행동하고 더 복잡하게 생각하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다음에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OO씨 괜찮아? 물론 여쭤보신 분들의 선의를 곡해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띠며 괜찮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게 사회생활이라 굳게 믿어서가 아닙니다. 정상이라는 생각은 일말도 없습니다. 상황을 바꾸기가 버거워서 입니다. 엄청 비겁한 말이지만, 전 대세를 따르자 주의 입니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 그만해야 겠지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유명한 말이 '중간만 가라.'와 '꼽냐?'입니다. 요새는 선진 병영이라 좀 달려졌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꼭 군대가 아니라도 상명하복의 조직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여기서 참지 못하고 '꼽다! 어쩔래!'라고 말한다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습니다.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나에게 꼽냐고 물어본 개인의 성향이나 그런 상황을 만든 문화나 조직을 말합니다. 꼽다고 말한 사람의 삶은 변합니다. 더 꼽게 만들지 모릅니다. 아닐지라도, 삶은 힘들어 집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하고 필요성을 공유하고 사람들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차라리 내가 꼽고 마는게 더 편하다고 느끼고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어쨌든 비겁하게 오늘도 어색한 웃음을 날리며 버티고 버팁니다. 오찬호 작가는 그런 저에게 늘 말합니다. 사회는 사람이 만든다. 결국 개인이 변해야 사회가 변하고, 그 변화가 평균에 이른 만큼 세상은 변한다고 말입니다. 작가의 저작을 꽤 챙겨 읽는 편이라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앎으론 삶을 변화시키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그 사례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오찬호 작가는 오작동하는 우리사회를 보여줍니다.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하겠다는 이기심,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혐오, 남을 괴롭히며 오늘을 버티는 우리, 거창한 '악' 보다는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악의 평범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부끄럽다 고백합니다. "공공선을 위해 뜨거워 질 순간"은 잊고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각자도생'의 삶에는 지나친 뜨거움으로 매진하는(p.9)" 삶을 살았다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반성이 거듭되어도 괜찮아 지는 건 나일 뿐, '그 때' 상처 받은 '그 사람'은 치유되지 않는다.(p.389)"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사회를 만드는 건 우리(p.292)"입니다. "사회는 사람하기 나름이(p.302)"고, "사회의 진보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삶과 반대되는 쪽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때 가능(p.277)"합니다. 갈등하고 불편해서 일상에서 균열이 일어나야 사회의 "평균치"가 높아집니다. 뻔한 결론입니다. 하지만 그게 유일한 길인가봅니다. 오늘도 매우 꼽고 유감스런 하루였습니다. 내일도 그럴겁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절대로 그런 적이 없다고 우기는 당신이 공범이고, 행동치 않고 침묵하는 나 역시 방관자입니다. 반성은 우리의 도피처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반복되지 않을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그게 저자가 말하는,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길이라 봅니다. 그래도 괜찮냐는 물음에 웃으며 말할 용기를 내봐야 겠습니다. "조금 별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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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선을 위해 뜨거워질 순간을 모르는 한국인들은 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각자도생'의 삶에는 지나친 뜨거움으로 매진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낯 뜨거워질 순간을(p.9) 잘 모른다. 남은 괜찮지 않은데 당당하다. p.10
우리가 변하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좋은 사회를 희망한다면 스스로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지 않겠는가. 행복한 '내일'을 원한다면, 자신(p.15)이 다른 이의 존엄성을 뭉개고 있는 '오늘'부터 발견하길 바란다. p.16
소비자라는 가면을 방패 삼아 자신이 일상에서 당한 설움을 폭발시키는 행동을 일부 못된 사람들의 그릇된 심리로만 이해하면 될까? 권리라는 말의 집단적 남용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한국만의 놀라운 시스템이 있다. p.29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타인을 조롱하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다른 모든 이의 삶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승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메릴 스트립, 2017년 74회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며 p.40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테러라는 행동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뿐이다. 테러를 저질렀던 사람들의 배경(인종, 종교)을 근본 원인으로 지목할 수 없다. 테러는 단일한 요소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질서를 주도하려는 여러 이해관계가 오랫동안 억척스럽게도 얽힌 결과물이다. 그러니 테러를 예방하는 방법은 입국심사와 치안을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더 강화하는 것뿐이다. 대안이라서가 아니다. 사람이 싫다고, 그 사람의 속성을(인종, 종교, 성별, 소득 수준 등) 지닌 다른 자들마저 모조리 억압하다가는 더 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배제되어 마땅한 사람'을 일상에서 증오할 것이고 이렇게 고립된 누군가는 강력히 저항하게 된다. 약자의 정항은 강자가 만든 세상(p.45)의 질서에 부합할 리가 없으니, 이는 약자를 향한 지금까지의 혐오가 정당화되는 증거가 된다. 사람의 행동이 아닌 사람 자체를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이유다.p.46
'찰나'의 이해로는 '하던 대로' 움직이는 몸과 정신의 버릇을 바꿀 수 없다. p.47
딱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말도 안 되(p.49)는 생각화 행동을 타인을 향해 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혐오다. 그럴 만한 이유를 상대를 가려서 주장하는 사람, 혹시 당신 아닌가? p.50
사회학은 이들보다 더 많은 노력과 더 충만한 긍정적 사고로 무장해도, 말하는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사람에 주목합니다. 간절해도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p.52) ... 사회학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성공한 '예외'에 주목하여 인생은 개인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결론 내지 않습니다. 개인이 아무리 간절해도 꿈을 이루지 못한 '평균치'가 함의하는 객관적인 불평등을 드러내는 걸 더 중요하게 여기죠. p.53
단언컨대, 예외를 가지고 평균적인 불평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반드시 나쁘게 변한다. p.55
좋은 사회란 예외가 되지 않더라도 행복한 개인들로 넘쳐나야 한다. 이는 객관적 불평등을 직시하는 시민의 구체적인 노력이 모여, 마치 벽돌이 한 장 한 장 쌓여가듯이 정의로운 사회구조가 탄탄해져 갈 때만 가능하다. p.64
꼰대는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몰라서, 정확히는 이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p.70
특정한 권력 관계를 악용해 상대의 모든 걸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꼰대다. p.76
꼰대는 사는 대로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p.77
차별은 피해자가 느끼는 것이지 가해자가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는 괜히 예민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가난에 대한 그릇된 사회적 고정관념과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여러 복지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응축되어 나타나는 '부정적 시선'을 어릴 때부터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런 시선들은 대개 편견으로 변해 특정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괴롭힌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이 차별의 공기를 제공한 주범인걸 부정한다. 차별받는 사람만 있고 차별하는 사람은 없는 이유다. p.88
차별은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보고 비아냥거릴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안겨 줄 때, 혹은 그런 배경을 형성하는 데 기여할 때 시작된다. p.89
스스로 하는 일이 선하다고 생각할 때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편해문 놀이터 비평가 p.92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한국의 어른들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를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방식이 아닌 철저히 개인의 가치 안에서 풀어낸다. p.100
진짜로 넋 놓지 않아야 하기에 삶은 고민의 연속이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서 정당방위의 수위마저 경계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 이는 본능을 억제하고 살아온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이기도 하다. 신경 써야 될 것이 많은 피곤한 삶, 그게 사람의 삶인데 어찌하겠는가. p.104
폭력의 예외를 발견하려는 버릇이 있는 사회에서는 절제할 수 없는 소수로 인해 약자들은 폭력에 상시적으로 노출된다. 이를 막을 방법은 하나다. 체벌이 허용되는 훈육은 '없다'는 강력한 사회적 합의, 그리고 이는(p.107)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을 몸으로 느껴야지만 '욱한다고' 욱하지 않는 절제된 개인이 될 수 있다. p.108
"원칙을 경직됨으로 평가절하하며 그 빈틈마다 본인의 상대적 기준을 들이미는 순간, 유연함의 이름으로 포장된 예외의 남발을 막을 길이 없다." 영화감독 민규동 p.148
인간다움의 조건이라는 부끄러움이 원칙 없이 팔색조로 응용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부끄러움이 그다지 인간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되지 않음을 뜻한다. 타인을 배려하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합리화만이 강하기 때문이다. p.158
'사람'이 들어갈 자리에 남자, 여자를 자꾸만 집어넣으려는 인류의 습관을 내 아이들은 낯설어했으면 좋겠다. (p.164) ... 이것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할 '평범한 일상'에 자꾸만 균열을 일으켜야 하는 이유다. p.165
성과 없는 성실은 앙꼬 없는 찐빵에 불과하다. 삶을 버틴다는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더 독해져야 했다. 독하게 산다는 건 다른 거에 대한 관심을 끊고 '하나의 목표'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함을 뜻했다. (p.179) ... 어떻게 보아도 인간에게 권고될 성질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독하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이토록 독(p.184)해지길 강요하는 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진득한 분노여야 한다. p.185
'그래 봤자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 되어 뒤늦게 과거의 기고만장을 후회한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다. 그릇된 개인의 강박을 모여 '자기 잘되겠다고 남을 희생시키는' 모순적인 각자도생이 범람하고 자수성가라는 말 안에 '주변의 도움을 은폐하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 사회는 결코 '사회적'으로 튼튼하지 않다. 사회구조의 피해자가 언제나 입을 다물어야 하니 이곳은 죽든 살든 개인 탓이다. 악착같이 순간의 고비는 넘길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개인이 건승할 확률은 터무니없이 낮다. 원하는 대로 얻지 못한 이들은 억울하다. p.211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요소들 중 하나가 바로 '인내'다. p.220
부정한 사회는 '부정적 사람'을 싫어한다. p.222
약자들은 객관적 상황을 부정할 때만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 p.223
한국에서 인간관계는 딱딱한 행정 원칙을 한칼에 무용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이다. 문화랍시고 반칙을 반칙이 아니라고 하니 사람들은 급할 때 전화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만들어 놓기 위해 필요 이상의 애를 쓴다. p.249
한국사회에서 좋은 인간관계란 관행을 관해으로 받아들이고 기득권에 그만큼 잘 적응한다는 말일 뿐이다. p.250
친구는 쇠귀에 경 읽기에서 문제는 쇠귀이지 경이 아니라면서 p.268
사회는 갈등 없이 좋아질 리 없지만, 현실에서 '갈등'이란 말은 앞서 살펴본 '부정'이란 단어처럼 쉽게 오해 및 오용된다. p.274
사회의 진보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삶과 반대되는 쪽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하다. 이 과정은 갈등으로 비춰지지만 갈등이 아니라 진짜 균형을 잡기 위한 성장통일 뿐이다. p.277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무난한게 하려면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쥐어짜야 하는' 경멸할 만한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 ... 공허하기 짝이 없는 조언을 나는 할 수 없다. 사회학적 현상 분석에 초첨을 맞추는 내 책들은 개인이 '해야 될 일'을 제시하지 않는다. 개인의 역할이 중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자칫 '대단한 결심을 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들'에게만 국한된 해결책일 수 있기에 주저한다. (p.288) ... 하지만 행동의 기준을 과거를 귀감 삼아 마련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여기서 기준을 마련하여 좋은 쪽의 삶을 지향하고 나쁜 쪽을 지양해야 한다. 내 삶의 방향이 그릇됨을 직시하고 그 반대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만이 대안이다. 모호하게 들리겠지만 이것만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유일하고도 구체적인 방법이다. p.289
참된 성장은 그저 선한 정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백론>의 저자인 고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선생은 악행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된다'고 했듯이 우리가 악한 성장의 공범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낄 때 사회는 좋은 쪽으로 변한다. p.297
사회는 사람하기 나름이다. p.302
자신을 예외적 인물로 노출시키지 않아 서로가 예의 바른 무관심 상태를 유지하는 건 타인에 대한 예의다. p.307
자신감만 있으면 못할 거 없다는 말이 난무하는 교육의 폐해는 엄청나다. 과잉 자신감은 반드시 근거 없는 낙관주의로 흐른다. 눈앞에 보이는 구체적인 절망을 애써 외면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희소한 확률에 본인의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은 이유다. 지나친 자신감은 자신'만'은 아무리 세상이 그릇 되더라도 살아남는다는 착각으로 이어져 구성원 모두에게 효과가 있을 사회적 해법을 찾는 걸 외면하는 자충수로 이어진다. 그러니 사회문제 앞에서 개인의 (p.313) 돌파구만 찾는 우를 범하고 그럴수록 면죄부를 얻는 사회의 폭력성은 더 경악스럽게 개인의 자존감을 파괴한다. 그 결과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온갖 반사회적인 요구를 다 참아 내는 거다. 일하면서 자존감 따위 찾지 말라는 거다. ... 문제는 일상에서 개인의 사적 가치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공적 가치에 대한 개인의 불신도 하늘을 찌른다는 사실이다. p.314
나는 자존감을 자아 존중감이라는 사전적 뜻에서 한걸음 나아가 '자신감이 없어도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싶다. (p.315) ... 나락으로 떨어져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뜬금없이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자존감 교육보다 실패해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자존감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다.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명확한 방법은 '우리가' 자존감을 잃지 않을 환경을 만드는 거다. (p.316) ...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길 원하는가? 그럼 자신감 좀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p.318
원칙적으로는 죄가 될지언정 주변에서 '수군거리지 않는 한' 괜히 먼저 나서서 죄책감 가질 필요가 없고, 반대로 아무런 잘못이 아닐지라도 주변에서 '수군거리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는 사회가 바로 한국이다. 이를 수치의 문화라 한다. 집단이 수치를 주면 죄고 안 주면 죄가 아니다. p.322
명백히 합의된 절대 악은 결코 논쟁하지 않는다. (p.329) ... 명명백백 절대 악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가해행위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이를 추동하는 씨앗부터 감시되어야 한다. (p.331) ... 당신이 타인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광범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직접적으로 차별과 폭력에 가담하지 않아도 자신이 무의식중에 토양을 제공하는 건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p.322) ...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개인에 대한 적절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타당한 것처럼 합의된 절대악은 지나칠 정도의 자기 검열을 통해서 예방되어야 한다. p.333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삶이란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공감의 간격을 좁히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거다. 그들의 슬픔이 끝날 때까지 그들 만큼은 아니겠지만 내가 표현하고 느낄 수 있을 만큼 함께 슬퍼하는 건 노력의 시작이다. p.336
희노애락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거지만 이를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로 드러내고 감춰야 하는지는 철저하게 그 사회가 무슨 가치를 지향하는지에 영향을 받는다. 아이가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시민이 되길 바란다면 '어른이 되면 알겠지'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p.338
공감의 시작은 자신이 타인의 상황에 쉽사리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공감의 실천은 "나도 네 마음 안다"는 기만적인 사람이 되길 거부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 사람에게 "어쩌다가 그랬어?"라고 묻는 황당한 사람이 되지 않는 거다. "내가 감히 너의 슬픔을 알 순 없겠지만, 노력할게"라고 말하면서 상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성찰적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입으로만 '공감'을 말하는 건 아니무런 의미가 없다. p.345
세상이 완벽히 정의로웠던 적은 없다. 그렇다고 인류가 정의를 좇는 걸 포기한 적도 없다. 어제와 다른 오늘에 우리가 확장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이유다. ... '보편적 인권'의 영역에 많은 사람이 포함되도록 애쓰는 게 바로 인간의 역사다. p.363
개인이 우주 최강으로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모두가 행복의 최소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고 있을 때만 정당하다. p.370
정치란 엄청난게 아니다. 일상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도움을 기다리는 관행들이 많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런 순간과 마주한다. 이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표정 하나가 바로 정치의 시작이다. 누군가에게는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동력이 된다. 여론이 형성되면 정치인을 압박할 수 있다. 그렇게 정책이 등장하면 '내'가 변화의 수혜자임은 자명하다. ... 객관적으로 정치 영역에 돈을 지출해야 한다. p.380
반성이 거듭되어도 괜찮아지는 건 나일 뿐, '그때' 상처받은 '그 사람'이 치유되지 않는다. p.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