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미 마사토 저/김윤수 역
롭 무어 저/김유미 역
앨릭스 코브 저/정지인 역
야마구치 슈 저/김윤경 역
애덤 그랜트 저/윤태준 역
<재난 불평등>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인 존 머터가 쓴 책이다. 그는 2005년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라 불리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그 이후 재난에 대처하는 불공정한 사회의 이면을 목도하고 사회과학으로 연구 방향을 전환하고 연구를 계속한 끝에 이 책을 펴냈다.
<재난 불평등>은 <자연재해, 선악의 중개자>, <지식 불평등과 재난>, <학살당한 아이티와 혼란에 빠진 칠레>, <물의 장벽, 죽음의 대양>, <미얀마, 무관심이라는 악행>, <충격에 뒤덮인 뉴올리언스>, <재난을 기회 삼는 이들>, <재난, 끝이 아닌 시작>으로 나누어져 있다.
저자에 의하면 폭풍과 달리 지진은 예측이 어렵다고 한다. 폭풍이 예측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매뉴얼에 따라 주민을 대피시킨다든가 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인명피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아이티 지진이나 필리핀, 스리랑카, 칠레, 미국 뉴올리언스 등에 발생한 다양한 재난을 목도하고 그것이 남기고 간 피해와 그 이후의 모습은 저마다 달랐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재난 불평등>에 담긴 내용들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충격적인 진실이다. 아이티, 미얀마 정부처럼 국민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국가에서의 부패와 재난 이후의 사건들은 그렇다 쳐도 미국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난 불평등>은 재난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재난은 평등하지 않다. 애초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가진 자들은 그것의 피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재난의 한가운데에 선 자들은 가진 게 없는 자들이다. 저지대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 그들이라고 그런 곳에 살고 싶겠는가. 아이티 지진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의 국민이었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비극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평상시에 가장 배려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재난 시에도 가장 큰 고통을 당할 가능성이 많다.”(142쪽)
그렇다면 미국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비극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나라의 부와 관계없이 그들이 무능한 지도자를 가진 탓이었다고 해야 할까? 저자 역시 아이티에서의 상황과 뉴올리언스의 상황을 비교하는 게 애초에 무리라는 걸 인정하지만, 두 재난에는 닮은 구석이 너무 많다. 가난해서 저지대에 살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소수지만 대부분의 부를 거머쥔 백인들을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동등한 국민으로 보기엔 어려울 것이다.
가난 때문에 인종 때문에, 그들은 국가의 관심 밖에 있어야만 하는가. 저자가 개정판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2020년 전대미문의 전염병이 남긴 상처는 나라마다 달랐고, 개개인에게 남긴 데미지도 달랐다. 화이트 컬러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 노동하는 이들은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터로 나가야 했다.
가난한 가정의 가장이 코로나로 목숨을 잃은 것과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 목숨을 잃은 것 또한 그것이 남긴 상처와 회복의 과정은 같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재난이나 전염병조차 이토록 잔인하게 인간을 가려서 다른 무게의 고통을 주는 것일까. 지난여름 서울에 내렸던 비가 할퀴고 간 자리도 그랬다. 그들 중 누군가는 한번 빼앗긴 삶의 터전을 어쩌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뉴올리언스의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 나라의 부가 자연재해로 인한 최악의 피해를 막아주는 잠재적인 방패가 될 수 있듯이, 개인의 부 또한 방패가 된다. 같은 사건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재난이라도 다른 이에게는 그저 약간의 불편 이상이 아닐 수도 있다.”(141쪽)
단단한 삶의 기반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웬만한 타격을 입더라도 회복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제적 능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빈곤을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걸 감안하면 정부가 어느 정도 보완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자신이 속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해야 할 세금 납부 같은 의무들을 기꺼이 수행하고 있는 것일 테다.
미얀마는 재난 이후 오히려 재건을 명목으로 국민들의 토지를 착취했다고 한다. 마땅히 정부로서 해야 할 국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의무는 하려고 든 적도 없으면서 오히려 국민을 갈취한 것이다. <재난 불평등>을 읽고 재난은 그 나라의 정부의 부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티에서 건물들이 맥없이 무너진 것도 제대로 된 건축 규정에 따라 지어지지 않았던 탓이었다. 죽지 않아도 될 소중한 생명들이 스러져 간 것이다.
“아이티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가난, 가난한 사람에 대한 무관심, 강력한 정부의 부재 때문에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사람들이 깔려서 죽어나갔다. (…) 건물은 허술하게 지어졌기에 무너진다. 정말 그렇다.”(135쪽)
대한민국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아이티에서 태어났다면 성인이 되기도 전에 영양실조로 굶어죽었거나, 운 좋게 살았더라도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것이며, 고등교육을 받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처지를 개개인이 타고난 운에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개개인 간의 차이를 줄이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하지만 과연 그 차이가 언제쯤이나 조금이라도 좁혀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히려 갈수록 더 벌어져만 가는 건 아닌가 싶다. <재난 불평등>은 내게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우리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부와 가난의 사회적·지리적 질서가 계급 사이의 물리적·경제적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재난은 항상 저소득층에게는 피해를, 상류층에게는 단순한 불편만을 끼침으로써 그 차이를 더욱더 벌린다는 사실이다.”(267쪽)
#재난불평등 #동녘 #아이티지진 #허리케인 #쓰나미 #자연재해
왓챠에서 본 영국드라마 years and years에서 가까운 미래의 모습들이 나온다. 기후이상으로 인해 계속해서 비가오고, 그로인해 빈민층들은 집을 잃게되고 다른사람들과 집을 쉐어해야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어즈앤 이어즈의 그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이 책은 재해가 단순한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경제적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드러낸 책이다. 저자가 포착한 지점은 재앙이 낳는 ‘불평등의 민낯’이다. 이 책은 왜 재난 사망자의 다수가 빈민층인지, 그리고 재난 발생 당시와 그 전후의 극복 과정에서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재난에 투영되고 답습되는 이유를 찾아 나간다.
재난 속에서도 가장 많은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미 삶이 힘든데, 왜 재난의 결과를 고통으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걸까? 이에 대한 의문이 이 책으로 이어진다.
코로나19같은 팬데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무료로 n차백신을 맞고 마스크를 쓰면서 이겨낼 수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백신 한번 맞기도 쉽지 않다.
다만 개정판에 코로나 19에 대해 조금 끼워넣고 비벼보려고 하는 느낌도 조금 없지않았다.
P. 5~6팬데믹은 자연재해인가? 그런 질문은 부차적이다. 그게 어디에 속하는지가 정말로 중요한가? 어떤 딱지를 붙이든 괴물은 괴물이다. 팬데믹을 다르게 분류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타 자연재해에 쓸 수 있는 물리적 도구를 가지고는 그 현상의 자연적 측면을 이해할 수 없어서일 것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현상이다. 다른 어떤 재난도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파하지 않는다. 재난에 백신이나 혈청을 사용하는 경우도 없다. 팬데믹은 다르다.
P. 56~57스톡홀름 국제경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형태가 동일한 지리물리학적 사건이 발생할 때 부유한 나라의 사망자 수는 가난한 나라 사망자 수의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국가가 발전하면 재난의 위험과 사망률은 낮아진다. 부유할수록 더 안전해진다는 말이니, 최상의 재난위험감축 전략은 부유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 이런 연구 결과가 나오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난한 나라에는 재난 대비나 피해 경감을 돕는 기관이 없거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사람들 대다수가 부실한 건물에서 산다. 그런 기관들은 대체로 부의 산물이며, 재난으로부터 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재해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재난은 목숨을(때로는 비극적일 만큼 엄청난 목숨을) 앗아가는데, 가난한 지역에서는 그 수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P. 278~279‘부자가 이기고, 가난한 사람이 진다.’ 불평등이 극심한 세상에서는 자연재해의 결과 또한 불공평할 것임을 확실히 짐작할 수 있다. 재난은 어떤 면에서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지는 못한다. 재난은 모두가 서로를 끌어 주는 계기가 될 거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각 집단에 끼치는 영향이 매우 다르고, 각 집단이 대응할 방법도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재난은 각자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각 집단이 재난을 활용하는 방법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부자는 이용하고, 가난한 사람은 못한다. 슘페터의 광풍은 부자의 요트에 바람을 불어넣지만 가난한 자의 부실한 탈 것은 가라앉게 만든다. 부자는 더 멀리 피할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덫에 갇혀 있거나 덫 안쪽으로 더욱 미끄러져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