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이미예 저
델리아 오언스 저/김선형 역
천선란 저
박완서 저
도서관에서 처음 빌려보고는 너무 재밌어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은 책이다. 각 챕터마다 너무 공감되는 말들이 많아서 계속 끄덕이면서 읽었다. 나와 생각하는 건 비슷한데 글로 전달하는 방식은 정말 호쾌하고 쉽게 이해가 가서 작가님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누가 읽더라도 분명 이 작가님에게 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물용으로 종이책을 구매했다.
다정소감 리뷰입니다. 좋아하는 작가분이라서 신작 나오자마자 구입했는데, 이번 작품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네요. 전작들처럼 재치 넘치고 유머와 따뜻한 배려가 가득한데다가 제목처럼 책 전반에 다정함도 가득합니다. 덕분에 다 읽고 나서 작가분에 대한 내적 친밀감이 한껏 올라가게 됩니다... ㅎㅎ 좋아서 주변에 선물도 많이 했는데, 다음 작도 기대됩니다.
책 대출기 앞에 섰다.
책 대출기란, 커피 자동판매기처럼 내가 원하는 책의 '선택버튼'을 누르면 바로 즉석에서 책을 내어주는 신개념 대출서비스 기기다. 다른 사람들이 대출해 간 책을 제외하고는 기계에서 보유 중인 책이라면 24시간 언제든 책을 빌릴 수 있다. 한참을 서성이다. 이 책을 골랐다. 저자 이름 하나보고!
<아무튼 술>과 <전국축제자랑>. <요즘 사는 맛1>까지 읽은 사람들은 안다. 각 주제를 기가 막힌 찰떡 비유에, 특유의 창의+ 유머러스함으로 글 읽을 맛 나게 해주는 작가님이다. 워낙 많이들 좋아하는 작가님이다보니 여러 사람의 손타기와 유행을 지나 이제서야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다정소감이란 책 제목이 낯설었다. 다정함도 아니고, 다정에 소감이 있을 수 있나? 뭔가 뜻은 있겠지만 어색하고 낯설게 다가오는 이 단어에 역시 묘한 게 작가님과 닮았다 생각했다. 읽다보니 당연히 이해가는 (작가님 작품의) 신조어(?)였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 중 내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붙드는 건 결국 다정한 패턴, 다정이 나를 구원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글을 쓰려고만 하면 앞 다투어 튀어나오는 바람에 몇 개만 골라내야 할 정도로. 글을 쓸 때는 뻔하다면 뻔한 패턴에 어김없이 강타당하는 나의 확고한 일관성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지만, 어제는 노트에 모인 쓰지 않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어쩐지 뭉클했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던 것처럼, 뻔하다면 뻔한 패턴의 이 이야기들은 결코 뻔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유했다. 뻔한 다정이란 없었다. ...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그래서 책 제목을 '다정소감'이라고 붙여봤다. p.220
역시나 그의 비유는 내 손이 무릎을 치게 했고, 입으로는 키득키득 웃게 했으며, 세심함으로 두루 여기저기를 뚫는 문장에 쾌감을 느끼게 했다. 미괄식의 사람에게 두괄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김솔통'이라니! 처음부터 아주 기가막힌다. 본명인가, 가명인가? 정도로 여긴 김솔통이... 김솔을 받쳐주는 통이라니 참! 거기서 글의 방향을 잡는 작가님도 참 재밌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저자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나타내는 글들은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 간 중년의 여성들의 여행을 변호하는 글에서, 조상 혐오에서 제사지내는 이들을 향한 통쾌한 디스, 맞춤법, 옛 친구의 이야기까지... 약자(모든 약자에 내가 동의할 순 없지만 어쨋든)에 대해 배려할 줄 알고, 얼굴이 화끈거릴 수 있는 일에도 글로 피하지 않고, 돌이킬 줄 아는 글에서 작가에게 있는 진솔함이 느껴졌다.
이젠 더이상 내게 집주인이란 타인은 없지만, 강한 자를 대비해서 나도 이참에 축구를 배워야 하나 싶기도 하고, 왠지 철봉에 매달려 20개씩 3세트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언니들한테 나도 조언을 좀 받고 싶어졌다. 여초직장에서 첫 비행에 지각한 내 앞에 '황금가면(김동률 음악)'(지극히 김동률님을 좋아하는 리뷰어의 사적인 생각)처럼 내게 나타나준 친구들을 보며 작가님 참 인생 잘 사셨네! 싶기도 했다. <제철음식 챙겨먹기> 글은 이전 작품에서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요즘 사는 맛1>이 아닐까?
조상혐오를 멈춰달라는 글에서는 왜 저런 생각을 못했었던가 작가의 글에 깔깔거리며 시원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조상들에게 너무 무례한 것 같다. 자기들은 스스로를 상식적이고 이해심 있는 인간형으로 상정하면서, 애먼 조상들은 자손의 피곤한 일상이나 사정 따위 헤아릴 줄 모르고 그저 밥만 찾고 인사받기만 바라는 소시오패스로 만들어버리니 말이다. 어떤 삶을 살아오고 어떤 인품을 지녔는지와 상관없이 죽어서 조상이 되는 순간 애정 결핍에, 밥 집착증에, 속 좁고 개념 없는 악귀나 괴력난신 취급을 받아야 한다니. 이거 어디 억울하고 무서워서 마음 편히 죽을 수 나 있겠나. 내가 조상이라면 밥을 못 얻어먹는 것보다, 그깟 밥 안 차려준다고 후손의 삶을 망가뜨리고 저주를 내릴 평균 이하 인격체로 취급당하는 것이 더 화가 나 제사상을 엎어버리고 싶을 것 같은데 말이다. p.85
미니멀리스트의 시련에서 존경스러워지려는 찰나, 캐리어 회사에서 캐리어를 옛날 것과 새 것 두 개나 받게 된 '금도끼 은도끼' 상황에선 웃음이 대 폭발했다. 한편으로 추억이 담긴 걸 버리지 못하는 남편과 사용 zero인 건 버리자는 나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 떠올랐다. 그때 좀 내가 양보할 걸 강행했던 게 미안해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거대한 농담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 다음 날, "본사에 신혼여행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물건이라 새것 대신 망가진 걸 그냥 받겠다는 고객님의 뜻을 전했더니 모두 크게 감동하셔서 정책상 사실 안 되지만 고객님의 물품과 함께 새 상품도 보내드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라고 메시지가 온 것이다. 뭐라고? 그래서 지금 대형 사이즈 캐리어 두 개가 함께 올 거라고? 맙소사. 그 회사는 뭐 산신령이야? 지금 이거 금도끼 은도끼야? T는 정말 감사하다며 담당자에게 신경 써서 고른 기프티콘을 선물로 보내고 있었고, 저렇게 한쪽에서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데, 낭만도 피도 눈물도 없지만 캐리어는 두 개나 갖게 된 미니멀리스트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애매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머리를 싸맸다. 이게 뭐야! p.162
무심코 지나갈 사람의 생각을 글로 훑어버리는 놀라운 세심함과 남다른 시선으로 웃음 대 폭발하게 하는 김혼비작가만의 글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놀랄 정도로 털털한 B급 유머가 살아숨는 글이 좋아서 이번에도 이책을 골랐는데, 역시나 잘 읽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약자에 대한 여러 진지한 그의 생각까지 고이 담아진 글이 기억에 남는다.
현재 코로나 앓이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여서 여기까지만,,, (뭔가 내용이 이상하더라도 용서해주세요.ㅠㅠ)
작가는 사람들의 다정에 의해서 시련을 극복한 이야기들이 많아 다정소감이라고 책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주변에 그렇게 좋은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저자도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이 정말 따뜻하고 유쾌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 김혼비에 대해 이름만 들어봤다. 여자축구, 전국축제, 술, 듣기만 해도 재밌는 주제들에 대해 글을 쓴 작가라고 들었고, 꼭 저 책들을 읽어봐야지 싶어서 아마 몇 년 전에 이북으로 구매도 해놨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산 책들 가운데에서도 이 책 '다정소감'은 가장 마지막에 사서 처음으로 읽는 책이니까 작가를 처음 만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항공 승무원 경험이 있고, 외국 이곳저곳에서도 살아봤고, 지금은 결혼도 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런데 에세이인데 이렇게 담백하게 쓸 수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본인이 글에 녹아있다. 그 정보가 두드러져서 이 작가는 자의식이 강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글을 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반가우면서도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깨달음도 준다.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데, 많은 것을 배웠다. 글에 녹여있는 유쾌함까지 내 취향이다. 아마 남은 책들도 곧 읽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 같다.
"어유 야, 놀랄 것 없어. 너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나도 네 나이 때는 딱 너 같았는데,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럼 이렇게 할 수 있다니까?"
[거꾸로 인간들]에서 이 문장을 보고, 맞아 맞아, 했다면 30대에 너무 건방진 생각을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이에도 10대, 20대의 나에게 "너 30대가 되면 그때보다 할 줄 알게 되는 게 많아져"라고 하고 싶다. 너 주 3회 운동도 할 수 있어. 영어 공부도 재미있어서 한다?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사회에서 정말 좋은 글이었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곤 하는데도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훈련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렇다. 여성들도 소리 지르고 때리고 맞는 훈련을 해야 한다.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원초적 싸움의 세계'를 경험을 통해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축구와 집주인]에서는 축구를 통해 '싸울 줄 알게 되었다는' 작가의 경험이 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남과 부딪히는 단체 운동이나 격투 운동을... 학창 시절에 검도를 배우긴 했었지만, 운동 경험이 적어서 급작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이 있을지 미지수이다. 그래, 그것도 훈련이 필요한 일이지. 요즘 여자들도 격투 운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정말 바람직한 현상 같다. 나도 기본적인 체력이 길러지면 한 번 시도해 봐야겠다.
그리고 사실 어제 어머니와 숙모, 그러니까 아버지 성씨네 남자들과 결혼한 자리에서 요즘 며느리 운운 이야기를 듣다가 명절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문구가 너무 잘 어울렸다.
'(남자네 집안)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집 여자들이 동원되어 고생해서 만든) 음식을 (해봐야 전 부치는 걸 거드는 게 전부인 남자들이) 바치어 정성을 나타내는 (남녀차별 집약적) 의식'
[조상 혐오를 멈춰주세요]에 나오는 제사의 새로운 정의다. 맞지 맞지, 그 부분이 기분이 나쁜 거라니까. 결혼 생각은 없지만, 4남의 사촌 형제들과 1녀의 여자로서 제사를 도왔던 나로서는 너무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의 글이 정말 좋았는데, 왜냐면 나는 지금처럼 비혼, 비혼주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화두에 오르기 전에도 여자들이 전업주부가 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내 의견을 잘 말하고 다니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나에게 하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는데. "나는 어릴 때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해서 결혼하면 전업주부가 되고 싶어", "저는 어릴 때 비 오면 엄마가 일해서 못 데리러 오신 게 너무 서러웠어서 제 아내는 꼭 전업주부로 아이들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말들이 잘 이해가 안 됐다. 나도 맞벌이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일하는 엄마가 있어서,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엄마가 없어서 불편하거나 섭섭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챙김'을 받지 못해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면서 엄마를 탓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고는 아이에게 미안해할 엄마들이 떠오를 때마다, 항변하고 싶었다. 전혀 쓸쓸하지 않았던 아이들 역시 많았다고.
정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 책에서 처음 봤다. 그야, 일하고 싶어하는 여성이 '나는 어릴 때 비가 와서 엄마가 안 데리러 왔어도 전혀 섭섭하지 않아서 일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라고 이유를 대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그리고 [D가 웃으면 나도 좋아]는 나에게 깨달음을 준 글이었는데. 이건 앞에 나온 [가식에 관하여]와도 관련이 있다.
언젠가부터 소위 말하는 '솔직함'이라는 것들에 지쳤다.
'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인터넷과 커뮤니티가 발달하면서일까. '내 글이나 내 댓글이 웃겨서, 자극적이어서, 참신해서, 관심받고 싶어서' 점점 표현이 과격해지고 있다. 이렇게까지 표현해야 하나? 솔직히 너무 관심이 고픈 사람들이 이런 남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는, 이전에는 쓴 적 없는 창의적(이라고 포장되는) 단어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누군가 내 글을 읽다가 외로워지는 일을 최대한 줄이는 것.
그것에 비하면 써왔던 말들을 버리고 벼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내 글이 사람들 기억에 남지 않더라도, 적어도 내 글을 읽고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일은 없어야지. 그렇게 배운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커피와 술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커피와 술, 코로나 시대의 운동].
나에게 술이 삶을 장식해주는 형용사라면 커피는 삶을 움직여주는 동사다.
형용사는 소중하지만, 동사는 필요하다.
근무일에는 커피를 동력으로 삶을 살아가고, 하루의 마무리를 술로 장식하는 나에게 이렇게 유쾌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표현이라니. 이 사람은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이란 것을 느끼게 했다.
책을 보고, 이렇게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 있구나. 전반적으로 그걸 느끼게 해준 에세이였다. 따뜻하고 유쾌하고 아름다운 에세이, 누구라도 이런 글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