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버니 저/박영인 역
닐 스티븐슨 저/성귀수 역
이다혜 저
최예슬 저/김민지 그림
하루키스트라면
<아무튼, 하루키>를 읽고
아무튼 시리즈 세계관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실존 인물을 다룬 책은 현재까지 두 권이 나왔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장국영 순으로 출간되었다. '하루키스럽다', '하루키스트', '하루키 월드' 등과 같은 신조어는 물론,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열성 팬들이 모여 결과를 기다린다는 소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루키는 현대 문학계에 살아 있는 레전드로 불리고 있다. <아무튼, 하루키>는 그의 원서를 읽기 위해 일본어를 전공하고 그의 책을 의뢰받는 날까지 번역을 계속하겠다고 말할 만큼 그를 좋아하는 저자가 쓴 '하루키스트의, 하루키스트에 의한, 하루키스트를 위한' 책이다.
책장을 넘기기 전, 책표지에 그려진 '곰'과 '맥주' 그리고 '이지수'라는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최근 읽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옮긴이로서 역자의 말에서 만났던 터라 구면이었던 것이다.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했던 곰이 하루키가 즐겨 마신다는 맥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이의 이름이 '김참새'라니 여러모로 예사롭지 않은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타나베: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미도리: 아주 멋져.
와타나베: 그만큼 네가 좋아.
(331쪽, 『상실의 시대』 中)
"맥주의 좋은 점은 말이야, 전부 오줌으로 변해서 나와버린다는 거지. 원 아웃 1루 더블 플레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야."
(24쪽,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저자는 책의 원고를 쓸 때면 하루키의 책이 등장하는 자기 인생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뒤져봤다고 말한다. 홀로 타향의 침대 위에서 읽었던 『노르웨이의 숲』을 떠올리며 청춘의 일과 사랑을 추억하고, 하루키의 미국 생활이 담긴 에세이 『이윽고 슬픈 외국어』 속 한 문장인 "외국어를 말하는 작업에는 많든 적든 '안됐다면 안됐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운' 부분이 있다"처럼 '낭패(狼狽)투성이'였던 일본 유학생활을 들려준다.
또한 육아로 인한 손목 통증을 견디며 귀중한 시간을 바쳐 읽었던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넘어선 배신감)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찐팬으로서 다음 작품은 하루키스럽길 바라며 계속 응원하기로 한다. 『1973년의 핀볼』의 문장은 반려묘 '디'와 처음 만나서부터 헤어지기까지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하는데, 하루키가 고양이에 관해 쓴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했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오래전에 죽어버린 시간의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 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속을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떄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107쪽, 「입구가 있으면 출구가 있다」-『1973년의 핀볼』中)
무엇보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는 저자가 회사와 출판사를 거쳐 마침내 번역하는 사람이 된 마법같은 순간과 번역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하루키가 어느 날 야구장에서 타자가 친 2루타를 보고 자신도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찾은 송정역 맥도날드 2층에서 저자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원문을 한 줄 쓰고 번역하기를 반복하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번역은 기본적으로 기술적인 작업이기 때문에 대체로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와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 "처음부터 독특한 맛을 내려고 노린다면 번역자로서는 이류이며, 번역의 참된 묘미는 세세한 단어 하나하나까지 얼마나 원문에 충실하게 옮기는가에 있다"는 하루키의 말들에 적극 공감하며 저자는 시대를 견디는 번역을 해나갈 것을 다짐한다.
구달: 난 일문과 학생들이 하루키 팬이라는 걸 숨기는지 밝히는지가 궁금해.
(<아무튼, 양말>을 쓴 그 '구달' 작가다.)
지수: 우리 세대는 다들 좋아했으니까 그냥 좋아한다고 말했어. 나도 일문과 왜 왔냐고 물어보면 하루키 좋아해서 왔다고 하고. 근데 다자이 오사마는 좀 다른 것 같아. 다들 다자이는 속으로만 좋아하지 겉으로는 떳떳하게 말을 못 하더라고.(웃음) 너무 자기도취에 빠진 것 같고, 풋내 나는 청춘 느낌이 있어서겠지. 하루키는 그런 면에서 자기 연민이나 자기도취 없이 담백하잖아.
(145쪽, 「작가에게 바라는 것」-『양을 쫓는 모험』中)
군복무 시절 선임의 관물대(내무반에서 옷이나 물품, 장비 따위를 정리하여 놓는 장) 한 편에 꽂혀 있던 <상실의 시대>를 보고 난 뒤 호기심이 일어서 휴가 때 찾아 읽었던 것이 나와 하루키의 첫 만남이었다. 이제는 흐릿해진 스무살 청춘의 멜랑콜리를 알려준 책이었고, 뒤이어 <해변의 카프카>와 <1Q84>를 끝으로 그의 소설은 더이상 읽지 않고, 이따금 에세이를 집어들어 하루키의 일상을 엿보고 있다. 어쩌면 책속에 저자와 출판계 친구들의 대화처럼 그 말랑말랑함이 예전엔 좋았으나 하루키도 변했고 나도 변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하루키는 하루키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난 게 아니라 작가와 번역가 그리고 루티너로서의 다양한 삶을 계속해서 작품들 속에 변주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여러 세대의 하루키 팬들 안에 잠재된 그에 관한 기억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어쨌든, 하루키>, <여하튼, 하루키>, <좌우간, 하루키>와 같은 책들로 새롭게 태어나길 바라본다.
《아무튼, 하루키》
: 그만큼 네가 좋아
이지수 지음 [제철소]
짤막한 독후기 - ‘아무튼, 하루키’
‘아무튼’ 시리즈는 특정 소재에 대한 애정을 지닌 저자가 해당 주제에 대해 글로 쓰는 프로젝트다. 연필 혹은 떡볶기 같은 일상의 소재들도 대상이 된다. 다만 이런 주제로 책 한 권을 써 내는 일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쉽지 않을 것 같다. 덕후가 된다는 것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튼, 하루키》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무겁고 버거운 주제의 책을 읽고 난 후 집어든 책이었다.
하루키와 관련하여 한 권의 분량으로 에세이를 써낸 저자는 하루키 덕후다. 학창시절에 하루키를 읽었고, 원서로도 읽고 싶어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 물류회사, 책과 관련한 직업을 거쳐 번역가로 일한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표현 그대로, 하루키의 작품들은 저자의 삶(공부와 일)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셈이다. 하루키의 모든 작품을,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그의 문장이 입에 맴도는 정도라면 진정한 ‘하루키 덕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책으로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할 테다.
저자는 불타던 학창 시절의 연애담도 솔직하고 담백하게 풀어놓았다. 나는 “슈뢰딩거의 파스타”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과 전공자의 비애다.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되었건만.. 이런 부분에서 웃다니...(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만 웃는다.) 내가 처음 하루키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일 텐데, 아마 《상실의 시대》였을 것이다. 책 전반을 흐르는 묘한 정서가 꽤 오래 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하루키를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년 전에 읽은 달리기에 관한 에세이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루키는 성실하고 노력하는 작가다.
《아무튼, 하루키》에서 저자가 반려묘와 사별한 부분을 읽을 때, 한 달 전 세상을 뜬 우리 집 반려견도 생각났다. 한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집에 온 녀석은 17년을 우리 가족과 함께 했다. 나이가 들어서 대소변을 잘 가리던 녀석이 집 안 아무데나 누기 시작하고, 걷다가도 주저앉기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항상 녀석의 소변을 밟을까 조심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우리 가족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다가온다. 식구들이 집을 나가거나 올 때면 항상 현관에서 맞아주던 반려견이었다.
번역가로서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통해 다져진 직업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매일 번역의 세계와 반려묘의 세계, 그리고 하루키의 세계를 넘나들며 분주하지만 순간순간 정성껏 살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밋밋할 수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때론 바둥거리면서도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이 먼저인 사람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었다.
누군가가 특정 대상에 대한 덕후라면, 그 대상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잡다한 지식 이전에, 그에겐 대상에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 먼저일 것이다. 대상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 모두를 속속들이 알고, ‘그럼에도’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판단기준에 그 대상이 중심이라는 것. 만약 덕후의 조건이 이런 것이라면, 저자야말로 ‘하루키’ 덕후인 셈이다.
나는 책을 사는 것만 좋아하고, 읽지는 않는 스타일이다. 오죽하면 책을 사놓고 방치해서 종이색깔이 노랑이로 변하고서야 슬쩍 서문부분만 보고 닫고, 책의 존재를 까먹어버린다.
그러다 잠실의 한 서점을 갔는데, 거기에 '아무튼' 시리즈 책들이 매대에 참말로 이-쁘게 나열되있었다. 한 눈에 사로잡힌 나는, 하나씩 제목들을 읽어보았다.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를 내고 있더랬다. 그 중에 눈에 확! 돋보였던 책은 《아무튼, 하루키》였다. 책 표지에 곰돌이가 맥주를 들고 나와 한잔 하려는 듯 보고 있고, 또 그 푸근한 인상으로 오늘 하루 어땠는지, 조근조근하게 내 얘기도 들어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게 종이가 노랑색으로 바뀔정도로 책을 펴보지도 않는데, 과연 내가 읽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집에서도 생각나면 사야겠다. 했는데, 다음날까지 책 내용이 궁금해서 예스24로 구매해버렸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광팬이었던 저자가 그 책과 연관된 자신의 에세이를 적었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잘 모른다. (표지에 끌려서 산 사람) 책 내용은 과연 나한테 재밌을까? 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 재밌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학을 모르는 알고 있을 정도의 소설가이며, 그의 책들을 읽어온 '광팬' 독자였던 작가는 그 책에 맞는 추억거리를 하나씩 풀어주었다. 에세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작가님의 이야기는 왜 이렇게 흥미진진한지 모르겠다. 성공담도 아니고, 구구절절한 아닌, 그냥 일상얘기를 하듯 하루키 책과 연결된 지난 추억을 얘기하는데, 그게 더 많은 흥미를 끌게 해주었다. 중간중간 90년대 이야기로 공감을 하기도 했고, 감명 깊어 줄까지 쳐놓을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내용도 있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다 똑같지 뭐, 라고 생각했는데, 또 완전히 똑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앞길을 먼저 겪은 인생 에피소드, 그냥 언니한테 이야기 듣듯이 보았다.
아-이래서 표지에서 곰돌이가 나한테 맥주 한잔 하자고 한걸까?
맥주 한잔하면서 보기 딱 좋은 책이라고. 그렇게 나한테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앞에서 구구절절한 사랑이야기가 아니여서 좋았다고 했지만, 사랑 이야기가 안들어가는 건 아니다. 덤덤하게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와 함께 소개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인상깊은 구절도 여기서 나온다.
p.46
우리가 서로에게 기쁨만을 주었던 시작점으로 올라가 그 애의 자전거 소리가 한밤의 기적 소리 같았다는 생각에 이르면, 이제는 그 장면이 작고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느껴진다. 흔들면 기적 소리가 나는 그 유리구슬은 가끔 꺼내 보면 예뻐서 좋지만 그 매끄러운 표면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도 가렵게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 작은 슬픔과 거대한 안도를 동시에 느낀다.
사랑에 죽고 사는 로맨스파는 아니지만, 손에 꼽는 연애(거의 안해봄)를 해봤지만, 참 공감되는 말이였다. 예전에는 그게 특별하다고 느꼈고 가슴 아픈 연애였다 싶었어도 시간이 흘러 ‘그때는 그랬지’하며 하나의 추억처럼 회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참 이쁘게 비유했다. ‘작고 투명한 유리구슬’ .
두 번을 보게 되는 마성의 아무튼, 하루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p131~p160은 그 책을 읽어본 사람만이 공감하며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을듯 하다. "양을 쫓는 모험" 나도 한번 읽고서, 다시 에세이를 읽어봐야겠다. 그럼 더 재밌어지지 않을까? 말로만 하지 말고, 바로 구매해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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