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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표지에 사용된 사진은 1915년에 찍은 것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어린 시절을 담고 있다. 사진 속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어머니인 프랑수아즈이고, 왼쪽이 첫 딸이었던 시몬, 그리고 오른쪽이 동생인 엘렌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표지를 무심하게 넘겼는데, 책을 다 읽고는 이 사진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부모 자식간의 서사는 충분히 많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그렇듯 어머니와 딸 사이도 갈등과 대립, 애증과 사랑이 범벅이 된 관계이기 쉽다. 대개 아들들이 어머니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모성애'라는 키워드로 대변되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이라면, 같은 여성으로서 딸들이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좀더 복잡미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시몬과 어머니의 관계 역시 그렇다.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상류층 집에서 자랐고, 충분히 교육을 받은 후 지성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한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 사료된다. 닮고 싶은 아버지(혹은 남성의 세계)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이분법 속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병든 어머니와 어머니를 간호하게 된 딸의 스토리라고 하면, 갈등을 화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다소 진부하고 신파적인 스토리를 생각하기 마련일텐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보부아르의 저작답게, 그런 식의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이 책은 죽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자, 보부아르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여성의 자전적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보부아르의 입장에서 어머니는 여성성, 즉 열등하고 무능력한 여성성을 대변하는 부정적인 존재였다. 아버지가 상징하는 교양과 지식,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어머니뿐 아니라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적인 세계와 화해하게 된다. 어머니가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가부장적 사회의 억압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 역시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내적으로 갈등하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보부아르가 어머니에게 건넨 사과는, 자신의 안에 내재했던 여성 혐오에 대한 자기 반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보부아르의 인식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153쪽)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다.
'피투성(thrownness , 被投性)'이라는 개념이 있다.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개념인데,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피투성이란 인간은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자각하게 되는데, 특히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즉 자신이 언젠가는 죽게 되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되면서 피투성을 자각하게 된다고 한다.
한편, ‘기투(企投)’라는 개념도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일컫는 것이다.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방식을 모색하고 '존재'로서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보부아르의 사유와 하이데거의 '피투성'과 '기투' 개념까지 모두 감안한다면, 죽음을 어떻게 대면하고, 역으로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다시 사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보부아르가 어머니와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들과 화해하고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은 보부아르가 사진 속 아이나 어머니를 극복하고자 했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사진 속 어머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나이가 아니면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부모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또 그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결코 할 수 없었던 사유나 이해가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보자면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는 매우 역설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책의 제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런 죽음이 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죽음이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