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문학을 공부하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푹 빠졌던 지난 과거가 떠올랐던 이유는 막스 프리쉬를 설명한 한 줄의 문장 때문이었다. '브레히트 이후 최고의 작가'란 찬사를 받은 막스 프리쉬의 대표적 작품인 <호모 파버>는 탄탄한 구성과 밀도 높은 감정으로 비극으로 치닫는 주인공의 생애를 보여준다.
소설은 보고서 형식으로 되어 첫 번째 정거장, 두 번째 정거장으로 나눠 주인공 발터 파버의 우연이 빚어낸 필연같은 운명적 삶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더 깊이 몰입하게 해줄 수 있었던 디테일의 힘은 자전적 이야기가 가미되어 만들어진 에너지라 설명할 수 있다. 소설은 생각조차 거부하고 싶은 근친상간 모티브로 운명과 숙명이 지배하는 비극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비록 친딸 자베트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였지만 자볘트와의 만남과 사랑은 우연인듯 비극으로 치닫는다. 주인공 파버는 결국 위암 수술을 받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존재조차 몰랐던 친딸 자베트와의 사랑과 자베트의 죽음을 통해 파버는 과거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지만 중병에 걸린 그에게 남은 시간은 짧기만 했다. 파버라는 한 남자의 삶에 우연처럼 들이닥친 비극은 마치 아이러니한 인생 그 자체라는 결론을 어렵지 않게 내리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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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에게 전하는 비극의 초행길,
비극적 서사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을 ‘보통 이상의 인간을 모방의 대상’으로 정의했다. 보통 관객들과 달리 고귀하거나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한 사람의 파멸을 그리는 것이 비극이자, 이러한 원칙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것이라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크게 다를 건 없다. 잔잔하고 평범한 일상의 미디어 콘텐츠보다는 특정한 인물 혹은 집단의 몰락을 그린 콘텐츠가 더욱 인기를 얻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오이디푸스 비극의 현대적 부활이라 일컬어지는 「호모 파버」 또한, 오로지 기계 문명만을 추구하는 한 인물이 겪는 몰락의 여로를 보여주고 있다. 출판사 소개말에 적힌 ‘현대판 오이디푸스 비극’은 책을 읽는 내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떠올리게 한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오이디푸스는 어딘가 발터 파버와 닮아있다.
「호모 파버」의 주인공인 발터 파버는 유네스코 소속 엔지니어로 출장길을 비행하는 도중,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사막에 불시착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주인공 ‘발터 파버’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는 상당히 짧고 급한 전개로 이어진다. 문단마다 장면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고, 흐름이 전환될 때마다 한 문장 정도의 독백은 마치 고전 영화의 투박하지만, 매력 있는 연출 같았다. 또한, 발터 파버의 합리주의적 독백들은 그가 얼마나 기술 문명을 신봉하는 ‘도구적 인간’-호모 파버-인지 알게 해줘서 이야기를 보다 농밀하고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대체 왜 숙명이라는 것인가? ……… 중략 ……… 개연성 없는 일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간주하느라고 신비주의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수학이면 충분하다. (29쪽)
이러한 기술 문명 신봉자를 전면에 앞세워 어떤 식으로 그를 파멸시키며 인류를 비판할지 작가의 의도나 책의 후반부 내용이 더욱 궁금해지기도 했다. 발터 파버의 비극적 말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오이디푸스와 비슷하다.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오이디푸스. 그의 비행기 옆자리 승객은 오래전 소식이 끊긴 친구 요하임의 동생이었고, 심지어 한때 발터와 연인 관계였던 한나 란츠베르크는 요하임의 아내란 사실. 설상가상으로 배를 타고 유럽을 항해하던 도중 사랑하게 된 연인 자베트는 한나와 발터 사이의 딸이었다는 사실. 운명의 기구함이란 무엇인가. 도구적 인간으로서 기계 문명을 신봉한 인류의 죄였을까. 아니라면 그저 ‘신’ 따위의 지나친 농 혹은 ‘숙명’ 이었을까.
나는 「호모 파버」 읽으면서 ‘오이디푸스왕’과 더불어 떠올리게 된 인물이 있다. 바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하는 ‘오대수’. 과거 자신의 죄로 인해 감금을 당하고 처절한 복수와 사랑했던 연인이 자신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인물.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불행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 ‘주인공의 불행을 유발하는 요인은 개인의 어떤 과오나 과실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의하며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오이디푸스왕. 발터 파버. 오대수. 이들의 하마르티아는 ‘그들의 무지’ 였다. 친아버지인 걸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 혹은 딸이란 걸 몰랐기 때문에 겪는 비극적 운명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었고 결국 그들을 파멸시켰다. 「호모 파버」는 이런 비극적 서사구조와 인물 특성을 원칙에 맞게 하면서도 현대식으로 비틀어 인류와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우리에게 자연과 기술 속에서 볼 수 있는 인간들의 이기주의에 강한 경고를 보낸다. 소설은 2부,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한 발터의 담담하고 건조한 상념으로 끝맺는다.
「호모 파버」. 고전 소설이기 때문에 완독에 대해 지레 두려움을 느낄 수 있지만, 책을 읽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고 오히려 너무 술술 잘 읽혀서 번역이 정말 잘 되었다는 걸 느꼈다. 도구적 인간인 주인공의 비극적 말로를 보면서 나 또한 과학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기계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하여 막스 프리쉬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의도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인류에게 전하는 비극의 초행길 「호모 파버」를 걸어보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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