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 여성작가를 머리속에 떠올려 보자면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안타깝게도 기억나는 분이 없다.
이번 책을 읽으며 히구치 이치요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1892년 부터 작품을 발표해 약 4년여 밖에 활동하지 못하고 24살에 유명을 달리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지만 일본에서는 5000엔권의 지폐인물로 선정될 정도 이고 지금도 그녀의 책은 인기가 많다고 한다.
일본의 근대화 시기를 책을 통해 접할수 있으며 작가의 섬세한 심리묘사를 통한 등장인물들의 성장기를 느껴볼 수 있었던 대표작 키재기가 가장 인상깊었다.
을유세계문학 전집은 다른 출판사에 비해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명작들을 라인업에 계속 추가시켜 주고 있다. 이 점은 독자로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 점이다.
최근 읽었던 <무사시노 외 - 구니키다 돗포>에 관한 리뷰를 썼을 때, 이 책을 추천받았다. 지금까지 일본 근대 문학의 다수의 작가들을 접하면서 여러 작품을 읽었지만, 이 시기에 활동한 여류 작가의 작품은 접해본 적이 없어서 추천을 받고, 바로 주문하여 읽은 책이 바로 <키 재기 외 - 히구치 이치요>이다. 우리에게는 상당히 낯선 작가이지만, 일본에서는 5000엔짜리 신권 지폐의 모델일정도로 일본 근대 문학의 직업 소설가로 유명한 인물인것 같다.(그러고보니 우리나라 5만원은 신사임당, 5000엔은 대략 우리돈으로 5만원정도의 가치가 있으니, 한일 5만원 가치의 지폐에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는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 6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이다.
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작가의 환경과 당시 시대의 영향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데, 히구치 이치요에 대한 설명을 먼저 언급해야 할것 같다. 히구치 이치요는 1872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사 계급에 꿈을 갖고 그 계급으로 오르기 위하여 막대한 돈을 주고, 결국 무사 계급을 사면서 그의 꿈을 이룬듯 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단행된 계급 통폐합 정책에 의하여 그는 일반시민으로 신분이 바뀐다. 이후 그는 몇가지 사업을 하면서 과거에 그가 꿈꾸었던 상류 계급에 진입하기 위하여 노력하지만, 결국 사업은 모두 망하고 히구치 이치요가 17세가 되었을 때, 사망하게 된다. 히구치 이치요는 정혼자로부터 약혼이 파혼되며,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할 처지에 이른다. 결국 히구치 이치요는 직업 소설가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하여 글을 쓰게 된다. 초기에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지만, 23세부터 왕성한 창작 활동에 집필하지만, 의뢰를 받고 글을 쓰던 중 과로로 인하여 폐결핵 악화로 24세에 눈을 감고 만다.
히구치 이치요는 생활고와 상류 계급에 대한 갈망을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 곳곳에서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섣달 그믐>이라는 작품에서 어린 하녀는 외삼촌 부부를 위하여 부자 주인 댁에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지만, 당장의 급한 돈이 필요해 그 착한 소녀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주인집 돈을 훔치게 된다. 큰 돈도 아니었고, 심지어 하녀가 가불을 요청하였지만, 주인 마님은 그것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일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작품 곳곳에서 섣달 그믐이라는 겨울의 배경과 맞물리면서 빈자의 슬픔과 애환이 추위와 함께 더욱 가슴을 아리게 해준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의 조그만 반전으로 그래도 유쾌한 결말을 제공해준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키재기>는 작가가 생계를 위하여 유곽 근처에서 작은 상점을 열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보여진다. 유곽을 배경으로 유년기의 아이들의 이야기인데, 돈에 집착하는 승려 부부의 아들, 고리대금업을 하는 집안의 아들, 그리고, 유곽에서 유녀로 활동하는 언니를 둔 예비 유녀인 여동생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어울리기도 하고 파를 갈라서 서로를 괴롭히게 되는데, 그러한 이야기들을 통하여 유곽의 이야기라든지, 또한, 애틋한 소년과 소녀의 감정도 느끼게 해준다. 유곽이라는 배경에서 당시 서민들의 삶의 모습도 엿볼 수 있으며, 조금씩 싹트는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도 볼 수 있어서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승려가 되기 위하여 떠나는 소년의 모습과 유녀의 길을 걷게 되는 소녀의 모습에서 결국 사회의 현실에 직접 뛰어드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 작품과 비슷한 환경이지만,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의 삶을 통하여 당시 유곽의 삶을 다른 시선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 <탁류>이다. 원래 일본은 공창 제도를 운영을 해왔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다른 국가들의 시선을 감안하여 점차 규제하는 방향으로 선회를 하게 된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유녀들은 손님들에게 웃음을 팔면서 살아가는데, 그녀들의 삶을 통하여 당시의 유녀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작품으로 보여진다. 특히 유복한 상인 집안의 한 손님이 유녀에게 빠져서 결국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종국에는 아내와 아들마저 쫓아내고 결국 그 유녀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단순하게 유녀에게 홀려서 생긴 비극적인 결말은 아닌듯 하다. 유녀도 나름의 이유로 인하여 그러한 삶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고, 한 가정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본인도 마음이 쓰여왔기 때문이다. 결국 극단적인 방법으로 파국을 맞는 이 작품을 통하여 유녀의 삶과 그들을 바라보는 당시의 시선을 느끼게 해준 작품으로 보여진다.
<십상야>에서는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한 여인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우연히 명문가 남자의 청혼으로 결혼을 하여 남들이 보기에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아이를 낳은 후 여인은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잃고, 무시된다. 결국 그녀는 친정으로 오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자신이 낳은 아들을 위해서만 살기로 결심하고 다시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여자는 인력거꾼이 오래전 자신을 사모하던 남자임을 알게 되지만, 남자는 그녀가 결혼한 이후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왔고, 그녀는 겉으로는 지체 높은 가문의 여자가 된 커다란 차이로 인하여 그저 현재의 삶으로 그대로 녹아 들어갈 수 밖에 없음을 알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작품에서는 우리 조상들도 그랬던 것처럼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한 여성의 삶을 보여주고 있으며, 아마도 과거 정혼자로부터 파혼당한 작가의 고통도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는 듯 하다.
<갈림길>과 <나 때문에>라는 작품은 각각 당시 하급 계층의 여자의 삶의 모습과 중상류 계층의 가정에서 여성이 겪는 고통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서 이또한 히구치 이치요의 삶이 어느 정도 반영된 작품이라고 보여진다.
전체적으로 여성 작가의 작품답게 세밀한 묘사와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 묘사가 잘 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옮긴이의 해석에 따르면 히구치 이치요가 문어가 아닌 구어의 형식으로 작품을 써왔기 때문에 번역에 상당한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생계를 위하여 작가로의 길로 나섰지만, 그녀의 일기에서 소설을 쓰는 이유가 호구지책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으며, 그러한 영원성의 추구는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생활고와 신분 상승의 갈망을 추구하던 그녀의 모습으로 인하여 작품들이 다소 어두운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때론 유쾌한 결말로 희망을 제시하고 있고, 극단적인 결말로 그 시대의 모습을 강렬히 전달하려고하 하는 것과 같이 다양한 모습을 그녀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어서 이 책도 추천을 해주고 싶다. 또한 히구치 이치요라는 작가에 대한 생소함은 책의 뒷편에 있는 자세한 해설이 그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도 밝히고 싶다.
히구치 이치요(Ichiyou Higuchi,ひぐち いちよう,히구치 나쓰) 저'키 재기 외'를 읽고나서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히구치이치요는 이번에 처음 알게된 작가입니다. 일본 근대 여성문학의 선구자로 유명한 작가더라고요. 섣달그믐, 키재기, 탁류, 십삼야, 갈림길, 나때문에 여섯개의 이야기가 모두 재미있고 감명깊었습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