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진자 마지막 하편. 카소봉과 벨보 그리고 디오탈레비 이 세사람이 자신들의 이론으로 성전 기사단의 자료를 토대로 이들의 존재를 찾고 더 나아가 장미 십자단, 예수회 여기에 이들이 만든 트레스 집단까지 추가하게 된다. 그런데, 이건 순수하게 세 명이서 만든 추론 일 뿐이었다. 더 나아가 성전 기사단이 갈릴레오가 자신들의 계획에 너무 깊숙이 들어오고 있어 이를 견제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진실은 아닌데도 카소봉의 일행이 만드는 이론은 이제 마치 진실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에게 너무나 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 그러나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니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여기서 카소봉의 이론은 아내 리아는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이들이 발견히 어느 쪽지를 보고 카소봉 일행은 뭔가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을 했지만 그건 그저 식료품을 적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악마 연구가들>과 성전 기사단을 넘어 예수회까지 끌어들여 진자로 인해 오래 전부터 기사단이 계획(?)한 것이 무엇이며 또 이들이 어디로 흘러들어갔는지를 추측하는데 너무 범위가 광범위해 진다. 또, 알리에 초대로 카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는 그 저택에서 기사단을 사칭하는 아니 기사단 자체를 따라하는 모임을 보기도 한다. 그곳에서, 진짜를 잡기 위해 가짜를 찾으라는 알리에의 말에 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세 사람.
아 정말 읽을 수록 복잡해지는 과정은 물론이고 평범한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살론이 실종된었던 아르덴티 대령에 대해 말을 할 때, 그리고 그 실종 사건을 다루었던 경찰과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 주위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벨보가 왜 다급하게 파리에서 카소봉에게 연락을 취했는지를 알게 되는데 그건, 알리에의 계략으로 벨보가 열차 테러범 용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한 순간의 욕망이 일으킨 너무나 큰 댓가였다. 벨보가 사라진 후 그가 남긴 파일을 보면서 카소봉은 박물관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보게 된 모든 것의 진실....사실, 진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카소봉과 그 일행들이 만들어 낸 추론이 즉 진실이 되었고 이론 인해 카소봉, 벨보는 목숨이 위험해지게 되었다. 벨보의 죽음을 목격한 뒤 방황하는 카소봉 도움을 청하려고 했던 경찰마저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고 연락을 끊어버린다. 도대체 카소봉이 찾고 있는 기사단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죽음마저 내놓을 정도로 그렇게 벨보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카소봉은 예전 벨보의 저택을 다시 한벙 찾아가고 그곳에서 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애기했던 벨보의 이야기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결정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 순간 카소봉의 목숨도 위험함을 스스로 고백하는데 과연 카서봉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진자라는 어렵고 독특한 소재로 시작한 [푸코의 진자]는 기사단의 존재를 시작으로 진실과 거짓이 혼합되어 흘러간다. 어쩌면 현실적으로 보지 않고 자꾸 그 밀지에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그저 평범한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아, 그동안 도대체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달렸는데 아무것도 아닌것이 인간의 의해 아니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게 되면서 생각지 못한 결말이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텅 빈 비밀을 줌으로써 그들이 욕망을 일깨웠던 것이다. 우리의 비밀만큼 속이 텅 빈 비밀도 없을 것이다."
<위 도서는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에서 무료로 지원받아 작성하 서평입니다>
미남왕 필리프와 예루살렘, 교황청의 공의회에서 시작된 수백 년의 비밀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성전 기사단이라는 유치한 이름을 굳게 믿게 만들었던 수많은 수식어들, 도대체 성전 기사단과 새로운 회동이 이루어질 진영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던 기묘한 사건들. 에코가 보여준 의미의 나열과 기호학의 복잡함은 분명 독자들에게 오기가 생기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갑작스러운 정신없는 묘사에 책장을 파라락 빠르게 넘기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또한 갑작스럽게 찾아온 성전 기사단에 대한 매혹적인 묘사에 다시금 눈을 홀리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다. 매혹과 매료,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찬 글이다.
이름 모를 괴한들에게 끝끝내 붙잡힌 벨보와 그를 찾아 벨보가 남긴 아불라피아 즉, 문서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극을 시작했던 푸코의 진자는 싸늘한 주검이 된 벨보와 그의 죽음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카소봉으로 끝을 맺는다. 벨보가 끝내 살아돌아오지 못할 것을 독자들은 거의 처음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미묘한 불안감, 살아남기에는 무언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게 된 듯한 벨보의 사유 세계.
정녕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맹렬히 좇는 자들의 믿음은 두렵다. 믿음으로서 믿음을 창조하는 광신도들에게 믿음의 대상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은 광신도들의 존재 가치를 소멸시키는 단 하나의 이유. 수 세기 동안이나 광신의 늪에 빠져 있던 '그들'은 인간이 지녀야할 중요한 가치관을 드러낸다. 믿음의 이유는, 행동의 이유는,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철저한 자기 비판. 어느 순간 기호학과 철학에서 일컫는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물어 하나가 되는 최악의 오류에 빠진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보는 가장 중요한 '논증'.
그 스스로도 진실이자 진리라 믿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 진리를 추적하는 매 순간을 상세히 기록한 벨보는 불현듯 마주한 진리의 그림자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카소봉과 디오탈레비 두 명의 타인과 달리 벨보만이 진리에 다가서려 애썼다. 비록 무언가 겸연쩍은 내음새를 가득 풍김에도 최후의 의심을 두지 않았던 수많은 광신도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지만 스스로가 진자의 형태처럼 줄에 매달린 벨보는 카소봉에게 작은 영감을 전하며 산화한다.
진자가 매달린 그 중심축에 가상의 선을 그어 본다면 진자 또한 변화하는 존재일까. 아니라면 부동의 '진리'일까. 그 물음에서 출발한 에코의 내면적 사유의 기행은 진리라는 가장 심연한 존재에 대한 무지의 믿음을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의심하고 경계하라.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의 머릿속이더라도. 언제부턴가 '신앙'이자 '믿음'이 되어버린 진리의 그 너머는 되려 아무런 빛도 어둠도 없는 공허함일 수도 있는 법이다.
* 본 리뷰는 열린책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우리는, 아무런 알맹이도 없는 텅 빈 비밀을 줌으로써 그들의 욕망을 일깨웠던 것이었다. 우리의 비밀만큼 속이 텅 빈 비밀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짜라는 것만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고 있던 비밀이었으니까.(349쪽)
(하)권에 이르러서 '카소봉'과 '벨보', 그리고 '디오탈레비'는 좀 우쭐해져 있다. 그들은 "성서가 진실이라면 이것도 진실(122쪽)"이라면서, 스스로가 곧 '진실'임을 선언했다. 지금까지는 <성전 기사단>이나 '알리에'의 뒤를 따라가는 듯한 모양새에 불과했지만, 이제 스스로만의 <계획>을 설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악마 연구가>들의 연구를 훑어보면서 쌓아온 경험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꽤 흥분에 취해 있는 모양새지만, 제3자인 독자로서 지켜보기엔 어쩐지 불안하다. 지금의 그들은 바퀴 하나가 빠진 채로 엉거주춤 앞으로 나아가는 수레 같다. 하지만 아무도, 심지어는 그들 본인조차도 일의 진전을 막기 어려워 보인다. 이른바 '지구의 배꼽'을 발견하여 신처럼 군림해 보려는 결심은 그들이 가짜 문서를 주도면밀하게 재조작해 어떤 진실에 이르도록 부추긴다. 때로는 자신들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를테면 무리 중 한 명인 '디오탈레비'가 죽을 위험에 빠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무엇인가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 한낱 장난으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카소봉'의 <계획>에는 죄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아'가 지적하듯이 그들의 변덕스러운 세계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 번의 가벼운 농담 때문에 '카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는 자신들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카소봉'의 <계획>을 위해서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지식들이 전환되는 장면들은 무척 흥미롭다. 천문학적, 역사적 지식 등은 『푸코의 진자』 안에서 가뿐하게 재해석된다. 분명 사실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안 될 게 뭐야?'하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카소봉'에 대한 믿음은 오래 이어진 적이 없다. 곳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가벼운 태도로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카소봉'에게 <계획>이 번뜩이는 유희였다면, '벨보'에게는 한층 심오한 의미를 지닌다. '벨보'는 이전에도 누누이 강조했듯이 자신의 용기를 시험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인적인 신념을 끝까지 고집하지 못하고 물러섰던 경험들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계획>에 무서우리만치 집착한다. <계획>은 그가 주동적으로 <누가>, <어떻게>, <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고, 이것이 실재하기만 한다면 그는 더 이상 패배자나 비겁자로 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훗날에 알 수 있었듯이 그는 자신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임을 받아들이고 물러나야만 했다. 바벨탑을 지어 올리던 인간들이 결국은 신이 되지 못했듯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무지를 인정함으로써 살아남을 자격을 얻게 된다. 항상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 우리를 어떤 것에도 미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질문은, <암호를 아십니까?>. 대답, 곧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되는 한마디의 암호는 <아니>. 진정한 암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내가 아불라피아의 파일을 통해서 알게 된 것만큼 배울 수 있게 된다.(350쪽)
그러니까 우리가 이때까지 장광설을 참아온 것은 우리의 무지를 깨닫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질문들을 향해 어쭙잖게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아니>라고 말할 용기를 가져야만 했다. 세상에 우리의 무지와 나약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우리 스스로가 유한한 생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우리의 존재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른 것들>이 존재하기 시작할 것이란 점을 인지하는 일이다. <지혜>는 '거룩한 원리'에 있지 않았다. 그건 오히려 '리아'의 말처럼 태어나고 또 죽어가는 우리의 육체 안('지상의 왕국')에 있었다. 가까이 있던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우리는 그 먼 걸음을 아주 고되게 걸어온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책으로부터 무언가를 뚫고 나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다른 독자들이 번번이 강조하는 것처럼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역자가 만난 미국인의 대답처럼 "코가 꿰이면 읽다가 그만둘 수가 없는 게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하)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는 아, 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감각을 얻어낼 수 있었고, 지적인 책 읽기의 재미를 좀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책 읽기를 또 하겠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래,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련다.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