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 저
서은국 저
알베르 카뮈 저/서상원 역
루시 쿡 저/조은영 역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 저/홍지수 역
알베르 까뮈 저/최윤주 역
간만에 정말 열심히 읽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인간에 관한 인간의 어떤 힘에 대해 느끼게 하는 글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되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있었던) 그 깊은 곳에 있는 작은 희망의 빛이 있다. 심해생물이 지닌 빛과도 같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보였다 사라졌다 깜빡거리는 그 빛이 오늘은 유독 더 깨끗하고 환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바다라는 배경 자체가 주는 망망대해와 심연의 감각. 희망적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어찌보면 그냥 절망적인데 그가 놓지 않는 낚시줄에서 느껴지는 힘과 삶, 고통과 패기, 의지가 경이롭다. 희망이란 결국 그런 것이지 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게 희망 아니던가. 결국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이 책에는 <노인과 바다> 이외에도 7개의 소설이 같이 들어있다. 그중에서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란 단편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모든 것이 <nada y pues nada y pues nada(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 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갈 즈음 학급문고에서 <노인과 바다>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수업시간에도 책상 서랍에 숨기고 책을 보았는데 노인의 사투로만 그려진 이 책이 정말 재미있었다. 다 읽고서는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학급문고에 내다니.'라는 생각을 했다. 한 해 동안 없어지는 책이 많아서 학년이 끝날 때 찾아가지 못하기 때문인데 나도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서 재미있는 책을 내고는 했고 책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과 바다>는 학년이 끝날 때까지 꽂혀있었고 아마도 주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찾아갔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선생님이 내가 수업을 듣지 않고 <노인과 바다>를 읽고 있는 것을 모르셨을까 싶다. <노인과 바다>는 그 때 접했지만 헤밍웨이의 작품은 그 후로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그 유명한 <무기여 잘있거라>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도 읽어보지 못했다. 흑백영화로 tv에서 해줄 때 본 것은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도 바다에서 노인의 모습과 그 눈부신 해변의 모습만 기억이 남는다. 이웃분들이 올리시는 리뷰를 보며 나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어 삼십이년만에 다시 읽어 보았는데, 역시나 재미있는 책이었지만 웬지 처음 읽었을 때 놀라고, 기쁘던 그런 마음과는 같지 않아서 서운했다.
노인은 종종 고기를 장기간 못잡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소년의 말에서 전에도 87일 동안 한마리도 낚지 못하다가 그후 3주 동안 큰 물고기를 낚았던 적이 있다. 현재는 84일째 고기를 못잡고 있다. 다섯 살 때부터 노인을 도왔던 소년의 현재 나이는 나오지 않은데, 현재도 그리 큰 아이는 아닌 듯이 느껴지지만, 아이의 말이나 행동은 어른 못지 않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 깊이 신뢰하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노인은 말린과 사투를 벌이면서 '소년이 함께 있었다면은' 하고 바란다. 하지만 소년의 부모는 고기를 낚지 못하는 어부와 함께 배를 타지 못하게 한다. 노인이 말린을 잡아오고 소년은 이제는 함께 배를 타겠다고, 부모의 말은 소용이 없다고 노인에게 말한다. 노인도 자신의 고집을 버린다면 조금은 작지만 물고기를 매일 낚을 수 있는 어부일 것이다. 현재 노인에겐 자신의 몸을 뉘울 잠자리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소년이 준비해주는 것으로 근근히 살고 있는 샘이다. 자신의 말벗이 돼주고 자신을 염려해주는 소년과 가장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하고 소년에게 가장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말린은 자신의 증명이지만, 소년과 함께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저 그런 물고기를 잡는 어부를 소년은 바라지 않는다. 가장 큰 물고기를 잡는 노인을 소년은 믿고 따른다. 때로는 굶기를 반복하더라도 말이다. 후세대와 대화가 통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며, 가장 큰 물고기를 잡는 노인은 드문 존재다. 소년은 노인의 가치를 알아보는 아이다. 6학년 때 노인의 모습은 정말 놀랍게 느껴 졌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그때는 더욱 더 그랬다. 말린을 잡은 끈을 끊고 싶은 때가 분명 수도 없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낚시줄에 긁혀 손바닥에 피가 나도 노인은 낚시줄을 놓지 않았다. 그런 일은 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 책에는 <노인과 바다> 외에도 단편의 대가라는 헤밍웨이를 대표하는 단편 7편이 더 실려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하얀 코끼리 같은 산>,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살인자들>, <세상의 빛>, <인디언 부락>이다. 전부 혹은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작가를 느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들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것도 매우 지루한 장편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흰고래 모비딕>이랑 착각한 것은 아닌지, 한도 끝도 없는 독백이 대양처럼 이어지고 혼자서 하는 치열한 물고기와의 투쟁을 읽는 몹시도 힘겨웠었던 기억이 완전한 무에서도 자라날 수 있는 것일까? 때때로 기억은 심한 왜곡을 거쳐 전혀 새로운 사실로 태어나기도 한다지만, 노인과 바다를 지루하고 읽기 힘든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쳤는데, 단편과 중편 사이의 짧은 소설이었고, 하드보일드 문체라던 짧고 남성적인 헤밍웨이의 문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노인과 바다의 주요 배경은 대양이고, 등장인물은 노인과 그를 상대하는 거대한 물고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소년이 나온다. 제목이 노인과 바다지만 노인과 소년이라고 했어도 소년과 노인의 관계 속에서 주제를 충분히 캐어낼 수 있을만큼 소년의 존재는 이 소설에서 큰 울림을 준다. 노인은 낡은 오두막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살며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오래도록 고개를 잡지 못한 노인의 집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노인과 함께 어릴 때부터 고기잡이를 배워온 손자 같은 소년은 노인을 걱정하고 따르는 유일한 대화 상대다. 노인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를 깨우고 둘은 이제껏 함께 고기잡이를 나섰지만, 80일이 넘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낛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가 아이를 노인에게서 떼어내어 다른 고기잡이 배로 보낸다. 다른 배에서 일하게 된 소년은 여전히 노인의 집에 들락거리며, 먹을 것과 마실것, 그리고 미끼로 쓸 정어리들을 구해다 준다.
까만 새벽에 소년과 헤어진 노인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간다.
그는 언제나 바다를 <라 마르 La mar> 라고 생각했다. 그건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할 때 스페인어로 부르는 말이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때로는 험담을 하지만, 그런 때에도 언제나 바다를 여성으로 말한다... 노인은 바다를 언제나 여성으로 생각했고, 엄청난 혜택을 줄 수도 있고 거두어 가기도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바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대화한다. 바다, 물고기, 그리고 그 자리에는 없는 소년과 말하듯 혼잣말을 한다. 그의 그러한 독백이 혼자서 이끌어나가고 있는 소설에 생동감과 인물의 입체적 캐릭터를 부여한다. 미끼를 향해 움직이는 고기를 향해 대화하듯, '좀 더 먹어' '아주 잘 먹으라고' 라는 등의 말을 하다가는 거대한 고개를 낛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깨닫는 아이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다가는 소년에게 말하듯 ' 내가 저 놈을 낛싯바늘로 건 게 정오였어', '저 놈들은 좋은 놈들이야'. '함께 놀고 농담을 하고 사랑을 하지' 라는 말도 한다. 결국 혼자서 거대한 고개를 낛는 것이 힘에 부치고 몸도 다치자 다시 또 아이를 환기한다.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나를 도와주고 또한 이 광경을 함께 보았을텐데.. 사흘 밤과 낮동안 계속되는 물고기와의 사투동안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마다 노인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 그 애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다.
80여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낛지 못하는 운없는 배에서 자신과 운명을 함께 하던 아이에 대한 아쉬움과 자랑스러움, 낛시와 함꼐 했던 전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며 아이가 없다는 사실,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환기하며 아이의 부재를 깨닫는 것이다. 그는 눈밑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손가락에 쥐가 나서 오그라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자. 손가락에게도 말을 걸고, 슬슬 힘이 빠져가는 죽어가는 물고기와도 말을 건넨다. '기분이 어떠냐 손아?' '아직은 알 수가 없냐? 조금만 참아, 널 위해서 이렇게 먹는거야' 자
그가 잡은 거대한 물고기는 적으로서 대적해야 할 상대지만, 게임의 상대처럼 노인은 그 물고기를 의인화하여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나중에 상어에게 조금씩 뜯겨나가게 되면서 그에게는 다시 친구 같은 존재가 된다.
'절반 남은 고기야' 그가 말했다. '너도 과거엔 온전한 물고기였지. 바다에 너무 멀리 나가서 미안하구나. 내가 우리 둘을 망쳤어. 하지만 너와 나는 많은 상어들을 죽이고 또 다른 상어들에게 부상을 입혔어. 물고기야. 너는 얼마나 죽였냐? 창 같은 부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는 않았겠지... 그는 그 물고기를 생각했고 만약 저 물고기가 자유롭게 헤엄쳤다면 상어에게 어떻게 했을 지 상상했다.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간 노인은 잡은 물고기에게 끌려다니며 떠돌다가 잡은 물고기가 상어에 다 먹혀버릴 때까지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살아 오두막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찾아와 발견한 사람은 소년이다.소년은 매일 습관처럼 노인의 집을 들렀고, 노인이 몇일 만에 살아 숨쉬는 것을 확인하자 울기 시작한다. 노인을 위해 커피를 가지러 조용히 밖으로 나와 길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에도 계속 소년은 운다. 혼자서 바다로 나가는 노인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와 안스러움이 작품의 초반에 살짝 비쳐지지만, 이렇게 사투끝에 살아돌아온 노인을 향한 애틋함이 애잔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가 쓴 <노인과 바다>는 둔 소설로 헤밍웨이가 낛시 동호회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소설로 구상에서부터 집필까지 15년 걸렸다. 헤밍웨이가 밝힌 그 내용은 1936년 거대한 말린을 낚은 작은 조각배로 낛시하던 노인을 동료 어부들이 발견했는데, 그가 낚은 말린은 절반 이상이 뜯겨 나갔으나 남은 부분만으로도 8백파운드에 달했으며 사투끝에 잡은 고기는 상어 떼가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간 것으로 그를 발견했을 때 노인은 배에서 살점이 뜯기는 것이 가슴아파 울고 있었다고 했다.
이 책에는 <노인과 바다> 외에도, 헤밍웨이의 대표적 단편 7편 정도가 더 실려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하얀 코끼리 같은 산>,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살인자들>, <세상의 빛>, <인디언 부락>이 그것이다. 그 중 밀리만자로의 눈과 노인과 바다가 가장 인상 깊었고, 역시 가장 많이 알려진 노인과 바다가 독보적으로 알려진 작품이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헤밍웨이 스스로가 대표작이라고 밝힌 단편들과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설들이라고 역자는 밝히고 있다. 기복이 심하여, 노인과 바다 이전에 쓴 두 개의 장편 소설은 평단과 독자들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으나 <노인과 바다>로 여론을 뒤짚고 1953년 퓰리처상을 받았으나 다음 작품에 대한 부담감으로 극도의 우울증과 피해 망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62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을 떠돌며, 수많은 연인들을 사귀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불꽃처럼 살아간 헤밍웨이. 그가 남긴 유명한 '빙산' 관련 일화는 이렇다.
헤밍웨이는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이라는 논픽션에서 상징에 관하여 이런 주목할 만한 언급을 했다. 〈만약 소설가가 자신이 쓰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다면 그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생략해도 무방하다. 정말로 그가 글을 잘 써놓았다면, 독자는 마치 그것(소설가가 일부러 생략한 것)이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는 것처럼, 그에 대하여 뚜렷한 느낌을 갖게 된다. 빙산의 움직임이 위엄을 획득하는 것은 8분의 1만이 수면 밖으로 나와 있고 나머지는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생략한 작가는 그의 글 속에 공허한 공백만 남겨 놓는다.〉 |
*단편들을 제각각 읽고 감상을 쓴 거라 중구난방.. ㅠㅠ
1.
//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 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
- 노인과 바다
//
//
그는 망가진 사람들을 그동안 죽 경멸해 왔다. 그걸 잘 이해하기 때문에 그걸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것도 물리칠 수 있어,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가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나를 해치지 못해.
-
그는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했다.
아니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너무 오래 하거나 너무 늦게 하면, 옆에 사람들이 있어 주리라고 기대하면 안 돼. 사람들은 모두 가버렸어. 파티는 끝났고, 너는 안주인과 함께 남아있는거야.
- 킬리만자로의 눈
//
헤밍웨이의 작품은 노인과 바다가 전부였는데, 오랜만에 읽어서 그런가 옛날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노인과 바다 보다는 ‘킬리만자로의 눈’이 조금 더 내 취향. 내가 헤밍웨이 취향이었구나,, 느낌.
특히 킬리만자로의 눈은 진짜 좋았다. 허밍웨이의 자서전 같은 느낌.
노인과 바다에서 인간은 파괴 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킬리만자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주인공 해리가 나온다. 헤밍웨이 스스로 패배가 아닌 스스로를 파괴한 사람이었으니 조금 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을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헤밍웨이의 문학사조를 사실주의라고 해야 하나,
20세기 그 시대의 한계이면서도, 마초적인 성격의 헤밍웨이 자체의 한계일수도 있겠지만 군데 군데 보이는 여성에 대한 묘사가 거슬리기는 했다. 그렇다 해도 작품 전체에 대한 평가가 바뀌지는 않았지만,, 여성은 창녀 아니면 성녀만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생각나기도 하고.
2.
가장 흥미로운 작품은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사자 앞에서는 두려워하여 도망치지만, 상대적으로 몸집이 크기 때문에 속도가 느린 물소 앞에서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주인공이 웃겼다. 그리고 그가 물소 앞에서 용기 내 설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안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현대 문명인 지프 자동차로 인해서 물소의 속도를 뛰어 넘어서 총을 쏘아 넘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그의 짧은 인생이 물소도, 사자도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끝나게 되는 것 마저도 아이러니했음.
3.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은 이전에 읽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기시감이 느껴지는 작품 이었다.
노인이 자살을 하려고 한 이유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깊은 절망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아무것도 아닌 이유는 그가 돈이 많기 때문라는, 허무하고도 허무한 이야기. 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
//
나다 = 허무
나다에 계신 우리의 나다. 그대의 이름은 나다. 그대의 왕국이 오시고, 세상 모두가 나다이오니 그대의 뜻이 나다 속에서 나다가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나다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의 나다를 나다하오니 우리의 나다를 나다해 주소서. 우리를 나다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우리를 나다에서 구해 주소서. 아멘 나다, 나다에 가득 한 나다를 찬미하라. 나다가 그대와 함께 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