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다. 몸이 허약했던 지드.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고 그는 엄격한 청교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주인공 제롬의 외사촌 누나인 알리사는 실제 그녀의 사촌 누나 마들렌을 모델로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사춘기 때부터 마들렌을 사랑한 지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녀와 결혼해서 지켜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소설 속 주인공과는 달리 지드의 끈질긴 청혼에 마들렌은 결국 수락하고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고 한다.
제목 '좁은 문'은 소설 속 보티에 목사가 설교에 인용한 마태복음의 나오는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그러나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 제롬은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고행과 고통이 수반되는 '좁은 문' 너머에 있는 알리사와 함께하는 맑고 신비롭고 천사 같은 기쁨을 상상하며, 자신이 알리사에게 어울리는 자격의 인간이 되려고 덕행을 실천한다. 제롬에게 알리사는 더없이 순결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여겼기에 자신의 감정까지도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알리사 역사 제롬을 사랑하지만 재롬의 사랑과는 같은 듯하면서 다르다. 제롬처럼 순수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하지만 그녀는 제롬이 원하는 결혼을 거부한다. 지상에서 제롬과 이루는 행복보다는 성스러움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영적인 세계로 갇혀 들어가고 결국 자신이 지향하는 완전함은 제롬이 없어야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가고자 했던 '좁은 문'은 제롬과 같이 가는 길이 아니었다.
제롬과 알리사의 행복의 기준이 달라기에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알리사의 행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벽해진 상태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제롬의 사랑보다 종교적인 믿음이었다. 반면 제롬의 궁극적인 행복은 알리사와 함께하는 것에 있었다. 스스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등 알리사에게 어울리는 존재가 되기 위해 숭고한 신앙에 이르리라 생각하지만 결국은 알리사와의 행복한 삶을 이루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두 사람은 엇갈린 길은 결국 합일점을 찾지 못했다.
알리사는 과연 제롬을 사랑했던 것일까? 그녀는 분명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자신을 엄격한 틀에 가둔 채 제롬과의 영적 인 사랑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게 해 줄 것이라 생각하기에 재롬을 향한 자신의 마음도 부인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좁은 문에 들어가려 할수록 마음의 고통은 더해지고, 결국 제롬을 떠나지만 그녀는 죽기 직전 행복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일기에 적는다. 마지막 일기에는 혼자 외로움에 떨며 죽기를 바란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좁은 문에 들어가는 규율을 만들어 놓은 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하려 했던 알리사. 어린 시절 엄마의 불륜은 알리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신앙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인간의 사랑을 영적인 사랑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음이 결국 그녀를 안타까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아닐까?
제1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것으로 책을 한 권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들려주는 내용은, 내가 있는 힘을 다하여 그것을 살아 내다 보니 그만 정신적으로 진이 다 빠져 버린 그런 이야기다.
11p | 좁은 문 : 열린책들 세계문학 243 | 앙드레 지드 | 김화영 역 | 열린책들
진이 다 빠질 각오하고 읽어야 한다 (의뢰로 재밌다)
12살의 주인공 제롬과,
2살 연상의 사촌누이 알리사
이들은 아직 시험 당하지 않고,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고,
부도덕한 상처를 받지 않고
의도적으로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충분히 어린 나이였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며 말씀을 묵상하고
시를 사랑하는 이들은
완벽하게 순수하고, 그래서 용감하다.
이들과 같은 고민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나는 이 책이 어려웠었다.
막연히 동경하기도 했다.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보이고 동경의 대상이 될 정도로 나는 무지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이번에는 이들과 같은 고민을 지나쳐, 고민 자체를 잊은 때
이 책을 다시 읽으니 .....
초반과 중반에는 사실 너무 유치하고 답답하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읽기에 재미 있기는 했다.)
지지부진한 엇갈림에 답답해 하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하여튼 답답하고, 머리가 저절로 도리질을 쳤다.
하지만 후반부까지 내달아 읽고서는 그들의 고민의 진정성이 와닿았고,
고뇌에 몰입하게 되었다.
(고구마를 요령껏 배 터지게 먹은 후였다)
아마도, 지나쳐 잊었던 고민들이 그제야 생각났던 것 같다.
하나님께 종교인으로서 매달려 본 사람을 알 것이다.
신을 향한 절박한 마음과 절실한 기도제목으로 간구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자 하는 갈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리고 신의 응답이 얼마나 놀랍도록 선명한지,
하지만 의심하는 순간, 그 선명했던 응답은 순식간에 불확실해지고,
결국은 믿음의 부족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절망하게 된다.
나를 속이지 않으면서, 선명한 응답속에서 확신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나의 지난 상황들과 억지로 끼워맞춰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의 심정과 이들의 순수한 사랑의 고통은 결국 같은 것이라는데 와닿고 보니,
소설은 훨씬 깊이있게 다가왔다.
저자 앙드레 지드 역시 그러한 강렬한 고뇌로 인해 정신적으로 진이 빠져버렸고-
어떤 시대에는 종교적 확신과 합리주의 간의 갈등이 모든 문제의 기저에 있었다.
좁은 문에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가 종교적 열광의 주체라면,
제롬의 친구 아벨과, 알리사이 동생 쥘리에트는 결을 달리하는 인물들이다.
나는 특히 쥘리에트를 새롭게 발견했다.
쥘리에트는 제롬과 알리사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해했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결단력을 발휘한 쥘리에트.
쥘리에트는 혼절할 정도로 거부감을 갖다가도
결국은 원만하게 모든 사건에 순응한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냈고
취향마저도 상황에 맞춰 나갔다.
쥘리에트는 사랑의 실패자도 아니고
비겁한 도망자도 아니다.
그녀의 선택은 주도적이고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다.
시대적 한계 속에서 그녀 스스로 쟁취한 삶을 살았다.
고전은 역시, 그냥 고전이 아닌걸 깨닫는다.
읽으면 읽을 수록 다방면의 주제를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혼의 사랑, 신에 대한 갈망, 영적 결합, 희생정신을 주요 골자로 하여,
주변의 인물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으면서 무심히 보여주는 <좁은 문>
앙드레 지드가 보여주고자 했던 진정함, 명철함, 자유로움의 사상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꼭 읽고 싶은 책을 신청해서 지원 받았으며 진심을 담아 정성껏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더 좋은 서평을 쓸 수 있도록 열독하겠습니다. 서평이 힐링♡
제롬 팔리시에는 어린 시절에는 르아브르에 살았지만 의사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어머니와 미스 애시버턴과 함께 파리에서 살았다. 그러나 허약했던 제롬을 걱정한 어머니는 매년 여름이면 파리를 떠나 르아브르 퐁괴즈마르에 있는 뷔콜랭 외삼촌 댁에서 머물렀다.
외삼촌 댁에는 외삼촌 부부 외에 제롬보다 두 살 위의 외사촌 알리사와 한 살 아래의 쥘리에트, 가장 어린 로베르가 있었다.
식민지 태생의 외숙모 뤼실 뷔콜랭은 어렸을 적에 보티에 목사 부부가 거두어 르아브르로 데리고 왔었다. 그 후 외국에서 일하던 외삼촌이 집에 돌아왔을 때 보티에 집안의 양녀였던 어린 뤼실을 보고 첫눈에 반해 청혼했다. 보티에 부인은 갈수록 이상해지는 뤼실이 자신의 친자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 외삼촌의 청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뤼실은 지금도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그녀의 행실 때문에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제롬 역시 외숙모 곁에 가면 야릇한 거북함과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경계했다.
제롬은 알리사에게 이끌렸고, 그것은 그녀가 예쁘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가진 어떤 다른 매력 때문이었다. 제롬은 쥘리에트와 로베르와 주로 같이 놀았고, 알리사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롬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 뒤의 부활절 방학을 어머니와 함께 르아브르에 있는 플랑티에 이모 댁에서 머물며 외삼촌 댁을 왕래하며 지냈다.
하루는 제롬이 외삼촌 댁에서 점심을 먹고 이모 댁으로 돌아오니 어머니와 이모가 외출 중이어서 제롬은 혼자 시내를 돌아다니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다가 문득 좀 전에 헤어졌던 알리사가 보고 싶어 외삼촌 댁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준 하녀는 외숙모가 발작을 일으켰다며 제롬이 위층으로 가는 것을 말렸지만, 그는 알리사의 방에 가기 위해 하녀를 뿌리치고 올라갔다. 알리사의 방으로 가기 위해 지나친 외숙모의 방에서 제롬은 외숙모가 자신의 발치에 쥘리에트와 로베르를 세워둔 채 군복 차림의 낯선 사내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했고, 알리사는 울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제롬이 본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외숙모는 그 남자와 도망을 가버렸다.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앓아온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셨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시작된 부활절 방학 동안 제롬은 플랑티에 이모 댁에서 묵었고, 이모는 제롬에게 알리사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이 그 둘 사이를 돕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모를 따라 외삼촌 댁에 머물게 된 제롬은 이모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외삼촌 댁에 머물며 그 여름을 지냈다. 그리고 파리로 떠나기 이틀 전 제롬은 쥘리에트와 정원을 거닐며 알리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나 약혼 등에 대해 이야기했고, 예전 자신이 외삼촌과 알리사와의 대화를 엿들었던 지점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감정에 빠져 쥘리에트의 말 속뜻을 알아차릴 겨를 없이 자신의 말만 떠벌렸다. 이야기 도중 쥘리에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롬의 어깨에 기댔고, 제롬은 그녀를 끌어안고 위로했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되돌아 오려는 순간 창백한 얼굴의 알리사가 허둥대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알리사의 태도에 걱정이 된 제롬은 고민 끝에 알리사에게 약혼을 하자고 청했지만 알리사는 무슨 까닭인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자며 약혼을 반대했다. 그 후 파리로 돌아간 제롬에게 알리사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제롬에 비해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은 것과 제롬이 다른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 자신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너무 괴로울 것 같다는 알리사의 말이 적혀있었다.
이에 제롬은 군을 제대한 아벨 보티에와 함께 알리사를 만나러 퐁괴즈마르에 간다. 알리사는 여전히 차갑게 새침해 있었고, 쥘리에트는 쾌활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쥘리에트는 대화 도중 펠리시 고모가 그녀에게 어떤 포도밭 주인의 청혼을 알려왔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제롬은 그 청혼자에 대해 반감을 느낀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낸 알리사와는 대화 끝에 약혼은 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 후 파리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열차에서 아벨은 쥘리에트에게 반했다는 고백을 했고, 이 말에 제롬은 온통 숨이 막히고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신년 방학을 보내기 위해 12월 말경 아벨과 함께 르아브르의 플랑티에 이모 댁에 간 제롬은 축제일에 이모 댁에 온 알리사와 쥘리에트를 만났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이 끝내고 불이 켜진 후 알리사는 제롬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 때문에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제롬 곁을 떠나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이에 제롬은 안색이 좋지 않던 알리사가 걱정이 되어 그녀 쪽으로 가려 했지만 문간에서 반쯤 몸을 숨긴 쥘리에트에게 붙잡혀 온실로 불려가 알리사가 제롬과 쥘리에트의 결혼을 바란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데….
『좁은 문』은 제롬과 그의 외사촌 알리사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들은 서로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로 그들의 내면에서 사랑에 대한 욕망과 신앙에 대한 절제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했기 때문이다.
물론 읽으면서 제롬에게 연정을 품고 있던 쥘리에트가 둘의 사이를 방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제롬 역시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호감을 품은 남자들에게 거부감을 느낀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쥘리에트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뒤에도 알리사는 제롬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아! 슬프게도, 이제야 비로소 나는 너무나 잘 깨닫는다. 하느님과 제롬 사이에는 나 자신 이외의 다른 장애물은 없는 것이다."
p.187
후에 공증인이 제롬에게 준 알리사의 일기장에는 알리사 자신이 제롬이 덕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는 우상이 되고 있다고 했다. 자신도 역시 하느님에 대한 사랑보다 제롬에 대한 사랑이 깊음에 고뇌하고 괴로워했다. 그러한 갈등 끝에 알리사는 결국 신앙을 선택하게 된다.
알리사의 일기는 극단적인 신앙적 윤리에 집착하고 현실적인 사랑을 죄악시해 일종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오로지 하느님 말씀과 윤리 안에서 추구하고 누리는 삶 속에서만 진정하고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사의 편지를 보면 알리사는 평소 쥘리에트가 누리고 느끼는 행복이 타락했다고 보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의심을 품기도 한다.
알리사의 인생처럼 우리의 삶도 늘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알리사처럼 무조건 참고 견디는 삶만이 올바르고 행복한 삶인 걸까?
좁은 문을 선택하고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걸어간 알리사는 행복했을까?
그런 알리사로 인해 홀로 남겨진 제롬은?
평범한 결혼을 통해 현실적인 행복을 찾은 쥘리에트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고전인데 무슨 메시지나 교훈을 주는지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인 <좁은 문>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과 욕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거부하는 삶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구원의 길로 보인다. 이 작품은 이런 기독교적 종교관에 바탕이 두고 쓰여진 작품이라 비기독교인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사촌 남매간의 사랑을 다룬 프랑스 문화나 실제 사촌과 결혼했던 앙드레 지드 자신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토리 전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사촌간인 제롬과 알리사는 자라면서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문제는 제롬은 지상에서의 행복(넓은 문)을 꿈꾸는 반면, 알리사는 천상의 성스러움에 가닿기(좁은 문)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롬에게 끌리면서 계속해서 그 감정을 억누르는 알리사와, 그녀를 흠모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그녀에게 가기 위해 비슷한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는 제롬과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앙드레 지드는 두 사람의 정신적인 고투와 엇갈림의 과정을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그려 내고 있다.
제롬을 사랑하지만 의도적으로 그와 멀리 떨어지려고 했던 알리사의 행동과 그 이유가 스토리의 핵심이다. 그녀의 일기속에서 고통스러운 비밀이 알려진다. 알리사는 제롬을 사랑하고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것인데 그녀는 완전이란 사랑을 물리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알리사가 찾고 있었던 것은 그녀 자신의 행복보다도 제롬의 행복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제롬을 자기 자신에게서 떼어놓음으로써 성서에서 말하는 어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갈 수 없는 ‘좁은문’ 쪽으로 제롬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은 바람이었던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는 누가복음의 구절에서 따온 소설의 제목에서 본능적 삶과 종교적 이상간의 갈등이 느껴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 천상의 지복(영생의 삶)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윤리적, 종교적 측면에서 논란거리일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 보면 알리사가 내면적 고행을 통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끝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두고 앙드레 지드가 금욕적 종교적 열망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알리사와 달리 결혼 생활의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그녀의 동생 쥘리에트나 인기 작가가 된 친구 아벨처럼 세속의 기쁨을 추구하는 삶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결국 앙드레 지드는 특별한 판단 없이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이러한 가치 판단의 문제는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결국 인간이란 흔들리고 고뇌하면서 결국에는 선택하는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앙드레 지드가 말하는 좁은 문이란 사랑의 길이며, 배려의 길이며, 봉사의 길일진대,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좁은 문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종국에는 개개인이 절대자와 고독하게 만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면서, 다른 한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까? 주변에는 서로 사랑하며 결혼하고 신앙생활에도 도움을 주는 부부들도 많은데 알리사 방식의 신앙생활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좁은 문>은 나로서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