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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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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 저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그런데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자박자박 소리를 내면서 따라 걸어야만 가 닿을 듯한 길이다. 막상 그러다가 작가에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 작가라면 소리를 내면서 따라 걸어도 미처 못 느낄 것 같다. 누가 따라오는지, 왜 따라오는지, 멍한 눈빛만 보일 뿐 도리어 흠칫 물러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슬금슬금 뒤따라 가 본다.
작가는, 특히나 소설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 소설가가 될까. 아무 소설이나 쓰는 아무 소설가 말고, 그래도 남들에게 권할 만한 가치를 준다고 내가 믿게 되는 소설가를 떠올려 보자. 그들은 어쩌다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하나, 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쓰게 되었다는 말은 어떤 한계를 드러내는 말이던가. 끝내 쓰고야 말 주제의 글이라거나, 기어코 써야 할 몫이라며 발표하는 글들은 어떤 글이었던가. 그런 작가로서의 사명감이나 본분이나 책임감 같은 것들, 독자로서는 어떻게 읽고 어떻게 평가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
길지 않은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작가가 보낸 어느 날 오후. 온몸으로 받아들인 감각과 감상들.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산책길. 그 모든 시간의 결을 글로 고스란히 옮겨 놓는 재주. 왜 쓰는지. 어쩌자고 쓰는지. 읽는 나는 무엇을 읽어 내려고 이토록 용을 쓰고 있는 것인지. 장차 작가가 될 것도 아니고 작가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저 독자의 입장에서 읽는 다른 이의 의식 세계는 나의 어디에 무엇에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쓰는 일이 어떤 이에게는 선천적인 본능 같은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안 쓸 수 없어서, 써야만 살 수 있어서 쓴다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이 작가가 된다면, 좋은 글을 써 준다면 당연히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겠지. 그렇다면 이 두 가지가 겹치지 않는 경우에는 어떤 일이 생기나? 작가로서는 억지로 쓴 글, 독자로서는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이 나오는 것일 테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요즘 종종 생각해 보곤 한다. 이 작가의 경우에는? 글쎄, 섣불리 말하지를 못하겠다.
작가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책은 수상 이전에 도서관에 신청해 두었던 것이라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읽었다. 밀로셰비치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한 작가라는 것도 수상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아직은 망설이고 있다. 한 권 더 읽어 보나 어쩌나.
소설<어느 작가의 오후>, 작가의 내면이 본 흔들리는 풍경들
Written by. DdAm*
책<어느 작가의 오후>는 소설이라곤 하지만 소설이 아닌 에세이 같다. 책은 12월의 어느 날 오후, 한 작가가 그날의 글을 쓴 후 외출 후 그의 '마음'이 본 풍경들을 묘사한다.
작가, 그에게 있어 '사건'은 '내면의 언어'들로 구성돼 있다. 외부적인, 그러니까 독자의 입장에서 사건이라 부를 만한 '진짜 사건'은 없다. 위태롭고 불안하며 흔들리는 풍경들은 바깥이 아닌 작가 '안'에 있다.
그래서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풍경의 묘사들에서 '뾰족함'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풍경묘사가 아닌,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생경한 느낌…. 사실, 페터 한트케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낯섦'은 줄곧 느껴왔지만 내겐 <어느 작가의 오후>가 유달리 그러했다. 여느 작가들보다 '형식'을 중요시 여기는 그는 그래서 그것들을 파괴한다. 책 속 작가처럼 사건에 집중하기보다는 언어 그 자체에 대해 중점을 두는 그는 묘사에 있어서도 여지껏 보아왔던 것들과 '다름'을 명백히 보여준다.
모든 글들을 독백으로 볼 수 있었고, 이것이 1인극(희곡)으로 쓰인다면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할 것 같다. 결국, <어느 작가의 오후> 속 작가는 페터 한트케 자신이 아닐까(거의 명백하다고 본다)? 내면의 딜레마가 바라본 풍경들은 불안정하다. 비단 페터 한트케 그만에 국한된 것이 아닌, 작가들이라면 한 번 쯤 고충거리로 여겨졌을 법한 '내적 고뇌'들이 그려진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물들은 현실과 망상을 제대로 구분짓지 못한 채 걸어다닌다. 싸구려 음식점에도 들르고, 가판대에서 신문도 사지만 그의 흔들리는 내면은 육체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대중(독자)들을 상대로 하는 작가들은 그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 의식의 강박관념은 망상과 착각으로 이어진다. '재료보다는 구조(형식)가 중요한 것'이라 여겨왔던 작가는 모든 외부 요소들을 자유로이 놓아두고 관찰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아보인다.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검은 옷을 '입히고', "당신의 문학을 기소합니다!"라는 통고의 행동을 짓게 '만든다'. 결국 그는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오고' 그의 묘사를 읽는 나도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만난 기분'이었다.
사건이 없지만 엄청난 사건들이 작가의 망상 위에서 펼쳐지는데, 어쩌면 그 망상 혹은 상상들이 작가들의 원천(소재)거리들이 아닐까. 책을 읽는 동안 묘사에 집중하기에 앞서, 작가들의 고충에 대한 연민이 더 짙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12월, 첫눈이 내린 것이 사건이라면 사건일 것이다(그저 우리들에겐 날씨일 뿐인데 말이다). 철저히 문어체로 구사된 된 '1인칭 묘사'들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담아 낸 묘사거리들이 선사해 낸 '힐링'이 아닌 '불편'을 건넸다.
결국, <어느 작가의 오후>는 페터 한트케의 자기고백의 에세이라 결론짓고 싶다. 짧은 시간 내의 일상을 펼쳐보이는 동안, 작가는 자신의 글이 만들어지는 머리와 가슴을 '지독하게' 엮어냈다. 비틀기의 달인인 만큼, 이 책의 '언어들' 덕분에 모든 잠자고 있던 감각들을 깨워야만 했다. 더 잘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시간들이,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오래 걸렸다.
책의 서문에서 인용된 요한 볼푸강 폰 괴테의 희곡『토르과토 타소』의「……모두가 있는 곳에서, 난 아무것도 아니다」는 탁월했다. 모든 외부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 한 작가는 실질적인 외로움과 내면의 고독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정신'을 실현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그, 그리고 우리들 또한 '모두가 있는 곳'은 필요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이니 말이다.
'작가는 외부의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제시한 소설 "어느 작가의 오후"
독특한 시선으로 스치듯 지나치는 사물들을 묘사하고,
길모퉁이에선 환상을 보지만 어느 것 하나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페터 한트케는 이런 작가였구나...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럼에도 이 소설에 빠질 수 있었던 건
일상이 주는 묘한 평온함때문이었다.
작가 내부에 격렬한 파동이 일더라도
일상은 늘 같은 주파수로 파도를 타고 있기에.
이 일상이 뒤집어진다면 비로소 소설이 될테니까.
내 일상도 물론 내부적으론 소설이지만.
당신의 오후는 어땠나요?
"어느 작가의 오후"같았기를......
열린책들에서 나온 체터 한트케 작가의 어느 작가의 오후라는 책입니다.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말하는 작가의 삶에 흥미가 일어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사건 전개 없이 소소한 일상을 작가의 시선으로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작가의 하루가 끝나있습니다.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사실적인 흐름이었습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너무나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땡볕에서 농작물을 가꾸는 일을 하지 않기에 햇볕 쬐는 시간이 모자라 일부러 햇볕 쬐는 시간을 시간표에 넣어야 하고, 잘 움직이지 않아도 되기에 굳이 운동이나 산책 시간을 시간표에 넣어야만 한다. 이 책은 2000년대 이전에 쓰여진 소설이다. 지금보다 고층건물이 더 적고, 도시 안에서도 인정이 어느 정도는 넘치던. 아니 스마트폰이 없기에 사람들이 소통이 더 자주 있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이다. 작가는 타인들의 삶에 무관심한 듯 하지만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물론 다음 날이 되면 다 잊어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