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1월 12일
2014년 09월 11일
괴테가 인생 일대에 걸쳐 집필을 한 소설이다. 이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만 어마어마하고 실제 역사속 사람을 모티브로 한 것이 적지 않다. 줄거리로 보면 크게 복잡하지도 않고 많은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 인간의 타락성과 그것을 물리치는 그 과정에서 뭔지 모를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소설이 아닌 희곡극이라 읽으면서 장면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읽어 나갔다. 한번쯤은 읽고 내용을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을 듯 하다.
<파우스트>는 중학 시절 읽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후 만난 괴테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번에 <파우스트>를 읽게 된 계기는 <융의 분석심리학과 신화>(융학파의 신화와 문학 비평에서 원형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영원한 여성성 그레트헨의 이미지가 궁금해서다. 지난 번 읽은 <마담 보바리> (마담 보바리 -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처럼 아니마에 대한 융학파의 설명은 문학작품을 직접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란 기대에서다. 막상 이 작품을 읽고 나니 영원한 여성성이라는 그레트헨의 이미지는 한없이 무력하게 희생되는 앳된 소녀의 이미지다. 왜 어린 여성이 희생되는가는 가부장제 사회 이래로 이어져온 남성중심 사회의 과제다.
사실 몇 달 전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스케일과 깊이에 압도돼 리뷰는 커녕 독후감조차 쓸 수 없었다. 다만 괴테가 20대부터 80대까지 60년에 걸쳐 쓴 작품이란 사실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옮긴이의 말대로 평생 곁에 두고 다시 읽으며 의미와 상징을 찾고 음미할 만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골방에서 진리를 추구하던 학자가 절망에 빠져 사탄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세상에 나와 사랑과 모험을 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이미 보통 일이 아니다. 정신의 빛과 그림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부침이 기약된 일이 아닌가. 그 후 <로쟈의 세계 문학 다시 읽기>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세계문학을 다시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책)를 읽고 파우스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뒤에 실린 역자 해설에 의하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역사적인 전설에서 비롯한 문학 전통을 가지고 있다. 파우스트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480년경부터 1540년경까지 독일에 생존했던 실제 인물로 전해진다. 이름은 요한 파우스트, 또는 게오르크 파우스트다. "파우스는 '행복한 사람'이나 '행운아'란 뜻의 라틴어 '파우스투스Faustus'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파우스트의 실제 삶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평생 여기저기 떠돌아다닌 치료사, 연금술사, 마법사, 예언자, 사이비 학자로 명성을 누렸다고 알려져 있다. 스스로 신통력을 발휘한다고 주장했다 한다. 술집에서 술통을 타고 날거나 호메로스의 등장인물을 불러내는 등 많은 기행을 부렸다고 전해지는데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전설적인 인물로 취급받기 시작했다. 실험 도중 폭발 사고로 인해 흉측한 몰골로 죽은 후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자극한 인물이다. 당시 사람들은 파우스트의 이런 죽음을 두고 사탄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많은 전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러한 전설에다 몇몇 문학작품들과 희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괴테가 자신의 문학성을 가미해 완성한 희곡이다.
<파우스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파우스트란 인물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역자는 사탄과 계약을 맺는 이야기는 중세에 자주 등장한 모티프라고 하는데, "그가 발산하는 매력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엄격한 권위에 과감하게 대항해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권위주의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파우스트형 인간은 성공을 추구하며 자기계발하는 오늘날의 인간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분별한 자원개발로 인한 폐해와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자유를 생각해보면 파우스트 형 인간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생각할 점이 많다.
남성중심적이고 일방적인 모험과 성공을 추구하고 구원을 받는 이 작품을 읽고 찾아드는 질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이청준의 소설 <밀양>(밀양, 벌레 이야기-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에서 감옥에 간 살인범이 구원을 받고 피해자 가족이 고통 받는 현실을 떠올렸다. 개인의 자유만 해도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거다. 파우스트의 업적에서 대규모 개발로 인해 자연과 대중의 희생을 떠나 생각할 수 없고, 사랑하다 버림받은 여성과 그로 인해 버려지거나 학대당하는 아이의 문제는 지금도 뉴스에 오르는 단골 메뉴다. 페미니즘 문학 비평에서 말하기를 흔히 남성중심 문학에서 남성의 성공 뒤에 희생되는 여성이 있다고 하는데 <파우스트>도 예외가 아니다. 작품이 지닌 깊이와 풍부한 문학성으로 인해 거듭 읽고 생각하기를 촉구함과 동시에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에서 로쟈가 말하는 것처럼 세계 문학을 다시 읽고 고쳐 읽어야 할 필요성과 이유를 충분히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일반적으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고 노력하는 한 앞을 향해 나간다’로 알려져있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 나오는 하느님의 대사이기도 하다. 방점은 노력, 앞, 나감 이런 긍정적인 단어에 찍힌다.
나는 인간, 방황, (다시)인간에 찍겠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괴테의 시선은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느꼈다.
이야기속 다양한 인물들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각자의 비유로 표현한다.(cf.메피스토는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다.)
파우스트를 포함한 인간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장난을 대단한 축복으로도 보기도 하고 끔찍한 저주로 보기도 한다.
그를 거룩한 신처럼 떠받들기도 하고 몹쓸 악마로 비난하기도 한다.
괴테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인간을 보여주었다 본다. 거기서 나는 인간은 어리석고 그것이 인간이구나를 느낀다.
요즘은 파우스트를 읽는 학생이 얼마나 있을까? 괴테를 아는 청소년은 얼마나 있을까? 고딩시절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독서토론을 작문 시간에 진행하고, 파우스트를 읽게 된다. 당시 범우사에서 나온 책이었는데, 솔직히 정신 없었다. 한 흐름에 죽 읽는 것도 아니고, 쉬는 시간마다 읽어서 정확하게 줄거리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 물론, 이 후에 책은 다시 읽지 않았다. 그리고 군대 시절에 아주 오래된 무성 영화로 파우스트를 구매하게 됐고, 대충의 줄거리를 다시 훑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가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책이다. 사랑, 욕망, 권력, 허영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파우스트는 담고 있다. 악마조차도 익살 스럽게 나오는 것을 보면 선악에 대한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젊어지고 싶어하는 주인공. 그리고 그 영혼을 획득하기 위해 애쓰는 악마. 그리고 사랑. 괴테의 문학적 기술은 이 복잡한 것들을 익살 스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게 진중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다룬다. 그래서 걸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