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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르는 길
<데미안>을 읽고
마침내 나도 데미안을 만났다. 불현듯 '영접(靈接)했다'고 고쳐 쓰고 싶어진다. 소설에서 싱클레어와 별개의 인물로 등장하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보여지는 데미안의 심리와 언행에서 아우라가 느껴졌다. 특히 '카인과 아벨',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등 종교적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싱클레어를 송두리째 흔들어 깨운 그를 보면서 어쩌면 싱클레어 안의 또 다른 자아 혹은 영적 존재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을 읽은 사람들의 공통된 소감은 어느 시기에, 또 어떤 감정상태일 때 읽느냐에 따라 그 감상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첫 손에 꼽는 책이지만 좀처럼 읽을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책과 서평에서 헤세가 쓴 유명한 문장들을 만나본 터라 안 읽었지만 읽은 척 했음을 고백한다. 마흔을 앞두고, 마흔을 넘긴 두 북클러버가 3월의 봄날을 맞아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듯 싱클레어가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그가 사는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27~128쪽)
너무도 유명한 문장이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소년에서 청소년을 지나 청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는 열 살 무렵에 선과 악, 빛과 어둠, 따스함과 차가움 등 대립하면서도 양립하는 가치들과, 그것들이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세계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악마와 같은 동네 아는 형님 크로머가 한 축을 담당한다. 어느날 '허름한 허세'를 부리며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한 싱클레어는 크로머의 덫에 걸려 진짜로 저금통에 손을 댐으로써 생애 첫 도둑질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과 세상 사이에 펼쳐진 모래판에서 온갖 시련들과 씨름하게 된다.
계속되는 고독과 절망에 좌절하지만 다시 일어나면서 자기가 갖힌 알의 껍데기, 즉 미지의 세계를 향한 벽을 깨부수기 위해 분투한다. 혼자만의 힘으로 알껍데기를 깨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르나, 그에게는 '줄탁동시(?啄同時)'에 나오는 어미 닭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데미안이다. 싱클레어의 멘토이자 조력자로서 가리워진 길 위의 이정표로 서서 기다리고, 익숙한 길의 왼쪽에서 방향감을 잃었을 때는 손 위에 지남철이 되어준다. 그 길 위에서 교차하고 교감한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깨달음이 담긴, 이전까지 내가 설익게 접했던 문장들을 옮겨본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내게 되면, 그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자신, 그 자신의 갈망과 필연이 그것으로 이끈 것이다.(135~136쪽)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 법이오.(156쪽)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가나는 것, 그 한 가지 말고 다른 의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174쪽)
소설과 떼어 놓고 보아도 잠언과 같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데, 이 문장들을 다시 들여다보면 책을 관통하는 주제에 대한 변주임을 알게 된다. 헤르만 헤세가 책머리에서 "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8쪽)"라고 밝혔다시피 무수히 많은 삶 가운데 그가 한평생 걸어갔던 길, 그 위에서 경험하고 사색하면서 발견한 깨달음을 독자와 나누고자 한 작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소설 말미에 헤세는 지적한다. 개인의 자아성찰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동체로 확장시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그는 데미안의 입을 빌어 개인과 개인이 모인 사회인 '공동체'에 대해서도 같은 뜻을 견지한다. 당시의 (어쩌면 오늘날도) 공동체는 '개인의 두려움과 무지'로 인해 부자들끼리, 노동자들끼리, 지식인들끼리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결국 '자신에 대한 무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가장 극단적이고 무서운 결과물이 '전쟁'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한 인간을 죽이는 데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면서도, 신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몰라. 한 시간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조차 몰라.(187쪽)
어떠한 이유로든 폭력은 인정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라마다 자국의 이념과 이권 때문에 전쟁을 불사해왔음을 인류의 오랜 역사가 말해준다. 제1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목도한 헤세였기에 전쟁에 참여한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장면을 통해 반전(反戰) 의식은 물론, 나아가 전쟁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는 전쟁이 계속 되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문득 그들의 손에 총 대신 <데미안>이 쥐어져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이제서야 데미안을 (다른 출판사의 책을 각각 읽어서 두 번 만났다고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한 번 만났을 뿐이다. 그가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 번에는 동행인과 함께 만날 것 같은데, 그때의 나 그리고 아이에게 데미안은 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아직 <데미안>을 읽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터놓은 책길을 따라 걸으며 삶을 대하는 여러 갈래의 마음가짐을 챙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무엇보다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싱클레어가 어렸을 적의 심리 묘사였다. 나도 나름 돌풍 같은 청소년기를 지났던 터라 싱클레어가 느끼는 많은 감정과 그의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들 모두에 공감이 갔다. 헤르만 헤세가 이 작품을 쓸 당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때라던데 난 주저없이 싱클레어의 청소년기에 그 영향이 나타나있다고 말하고 싶다. 후에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하는 생각에서는 내가 심리 상담을 받았을 때가 겹치며 이 부분 또한 공감이 많이 됐다. 어떻게 이렇게 현대적일 수 있을까. 이게 왜 고전인지 너무나 잘 이해했다. 전에 읽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비교하자면 서사라고 해야 하나, 외부적인 사건은 단순하고 적었지만 내적 심리 묘사가 정말 깊게 되어 있었다. 근데 또 그게 어렵지 않아서 술술 읽혔다.
1.
그에 비해서 나를 도와주고 구해 준 사람마저 마찬가지로 빨리 잊으려 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이해가 된다. 나는 손상된 영혼의 모든 힘과 충동을 모아 내 저주의 비참한 골짜기로부터, 크로머의 끔찍한 종살이로부터 예전에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지냈던 곳으로 도망쳤다.
- 어떤 사건/시절에 대한 기억이 너무 끔찍하고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 정도라면, 그 사건/시절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어한다는 게 와닿았다. 그냥 그 사건/시절과 관련된 사람은 좋든 싫든 다 그 사건/시절과 묶여있기 때문에 통째로 버리지 않으면 그 사건/시절이 없어지지 않는다.
2.
....... 나는 성인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으며 추구하는 목적도 없었다. 다만 오직 한 가지, 내 안의 목소리, 꿈의 영상만은 확고했다. 나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내 임무라고 느꼈다....... 내가 혹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못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못 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내 안에 어둡게 숨어 있는 목표를 끄집어내어 내 앞 어딘가에 그리는 일만은 할 수 없었다.
- 이렇게 자아에 대한 얘기를 할 때면 이 책이 현대에 쓰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이런 자아 발견을 위한 노력을 좀 더 어렸을 때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물론 난 지금의 내가 좋다!
3.
그 당시 나는 안전한 섬에 이르러 평화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그런 식이었다. 어떤 상태가 정겹게 느껴지고 어떤 꿈이 기분 좋은가 싶으면 곧 다시 퇴색하면서 쓸모가 없어졌다. 그것을 아무리 애석하게 여겨도 아무 소용 없었다.
- 나를 아는 것만이 항상 새로운 일 아니었을까. 우리는 매순간, 매일 변하니까.
4.
자신도 완전히 괴짜였던 피스토리우스는 내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과 용기를 갖도록 가르쳤다. 그는 나의 말, 나의 꿈, 나의 상상과 생각에서 항상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었으며 항상 그것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진중하게 논평함으로써 내게 모범을 보여 주었따.
- 내가 상담 받을 때의 느낌을 떠올리게 한 구절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만큼 느껴지나.
5.
당신이 죽이고 싶은 사람은 절대 이러저러한 특징 인물이 아니요. 그 사람은 틀림없이 위장에 지나지 않을 거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 법이오.
- 공감하면서도 찔리는 말. 내가 미워했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내가 이 사람을 이런 이유로 싫어했는데 만약 그게 내 안에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라면 부끄럽다.......
6.
'이제 저런 식으로 자신 안의 세계를 새롭게 개혁하는군!' 이런 생각과 동시에, 나는 그것이 저속하고 도덕적인 생각이라고 느꼈다. 내가 그의 꿈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어쩌면 술에 취한 그가 불안에 떠는 나보다 더 확실한 길을 갈지도 모르는데.
- 후 맞지요ㅠㅠㅠㅠ 내가 너의 꿈에 대해 도대체 무얼 알까. 그럼 난 너의 꿈에 대해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 마지막 문장 너무 취저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 쉽다고 생각했지만 살다보니 어려운 말.
7.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그 한 가지 말고 다른 의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
- 그냥 새겨놓고 싶은 말이다.
8.
그 자신의 책무는 임의의 운명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어 그 운명을 자신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살아 내는 것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어설픈 것이고 벗어나려는 시도였으며, 대중이 꿈꾸는 이상으로의 도피, 순응, 자신의 내면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었다.
- 이것도.
책을 읽는 순간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구절을 정리하며 다시 떠올리다 보니 이 책이 더욱 따뜻하게 와 닿았다. 맨 첫장이 격하게 공감돼서 인상 깊었고 맨 마지막에 데미안와 싱클레어가 입맞추는 부분도 참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내는 책이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히고, 볼 때마다 새롭고, 훗날 다시 읽힐 때를 고대하게 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생각에, 삶에 스며들어 곳곳에 이정표를 만들어낸다.
방황할 여유도 없이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다 다시 만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10여 년 전 20대 때 읽었을 때와는 아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가는 탓에 연령대를 불문하고 개인의 변화는 모두에게 강제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개인마다 제각각이다. 그 방향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변화의 길을 가야하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던 시기도 작가의 개인적 삶과 외부세계가 모두 고통 속에 신음하던 때였다. 정신없이 변해가는 오늘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변화의 혼돈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 한 번쯤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답은 결국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삶들로부터 힌트는 얻을 수 있다.
삶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지, 내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료와 지도를 이 책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세상에 나온 책이 세월을 초월하여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을 관통하는 진리를 던지고 있다. 이게 고전의 힘이 아닌가 싶다.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또다시 만날 <데미안>을 고대한다.
지금까지 아마 4권쯤의 데미안을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어린이용 문고본 포함으로 말이다.
그 중 이 번 책이 가장 맘에들었던 판본이다.
기실 나는 같은 책을 2번 이상을 잘 보지 않는 성격인데 어찌 데미안 만큼은 어찌어찌 4번이나 보게 되었다. 광적으로 좋아할 만한 내용도 아닌데 어찌 이리 읽었는지 나 스스로도 아리송할 지경.
이번에 데미안을 4번째로 읽으면서 은근 많은 생각을 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데미안에 나오는 각종 인물들에 상징이 어쩌구 아브락삭스가 어쩌구 알을 깨는 것이 어쩌구 뭐 이런 역자 후기에 나오는 말 따위를 줍줍하여 마치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양 어줍잔을 잘난 척으로 감상평을 도배했을 것이다.
근데 말이다 같은 책을 4번을 읽고 나니 이런 것들이 모두 너무나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이라고 해야 하나.
감상은 짧고 담백해 졌으며, 나의 내면의 내스스로에 대한 심상이 깊어진 격이라고나 할까.
심상이라는 단어를 쓰고 나니 더욱 오글거리고 남부끄럽긴 하지만 저보다 더욱 적절한 단어를 찾을수가 없으니 원....
여튼은 같은 책을 여러번 읽는 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된 격이라고나 할까.
어떤 책을 읽고 그것을 꼭꼭씹어 어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일 뿐이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 왔다고 하겠다.
여기서 중한 것이 있는데 같은 책을 여러번 보더라도 되도록 이면 현대판으로 촌시럽지 않은 문장으로 씌여진 가급적 최신판을 읽는 것이 좋을거 같다는 깨달음 또한 얻었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면 당연히 어떤 문장이 자연스레 마음에 숙숙 들어 오는 경우가 생기는데 국일미디어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보이는 '임자' 였나 뭐 이런 아주 옛스러워 당혹 스러울 지경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들을 마음에 아로새기는 건 좀 스타일이 안사는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 국일미디어 판의 명조체를 가장한 궁서체가 돋보이는 잃어 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좀 처분을 하고 바꿔서 새로 읽어봐야 할거 같단 생각을 했다.
성장소설이라는 데미안을 성장기라는 17살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카인과 아벨이 도대체 누구인지에서부터 막혔던 책읽기는
책장을 덮을 때까지도 이게 무슨 내용이지? 왜 성장소설이지?라는 의구심과 함께
다시 책장 속으로 들어가 잊혀졌다.
북흐북흐의 지정도서로 다시 읽게 된 데미안을 찾으며
이제는 그보다 두배는 더 살았으니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읽을 수록 더더욱 미궁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카인과 아벨에서부터 막힌 이야기는
여전히 종교가 없는 나에게는 주석이 붙어야만 그나마 따라갈 수 있는 소설이었다.
(없는 주석까지 찾기에는 책 외의 곁가지가 너무 많아 힘들었다.)
그럼에도 조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에밀 싱클레어의 글이 마냥 낯설지는 않았다.
착한 아이처럼 보이고 싶어 거짓에 전정긍긍하던 시절도 있었고,
데미안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친구와 둘만의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고,
김나지움 때처럼 반항이 멋있는건 줄 알던 허세가 있던 시절도,
싱클레어의 에바부인처럼 어느 선배를 동경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이 책이 왜 성장소설이라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던.(물론 생각하는 만큼의 어른이 된 것 같진 않지만.)
그 시절에 잠겨있을 때는 몰랐던 순간들을
아프락사스-.
한번 깨고 보니 다른 세계가 보인 것일까.
그 시절이 지나며 떠나 보냈을 데미안들을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을테니.
ps. 달걀껍질이 도데체 몇 겹인지.
몇 번의 세계가 더 나와야 나를 찾아갈까?
아니면, 아직도 깨지 못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