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저/황가한 역
정희진 저
러네이 엥겔른 저/김문주 역
오찬호 저
구오 저
정희진 저
어떻게 하면 버지니아 울프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옷 속에 무거운 돌들을 잔뜩 집어넣고 스스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가라앉아 버렸다. 그녀는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여성인권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때 개인이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문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외투 속의 그 무거운 돌덩이들처럼 현실의 거대한 문제들에 짓눌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거대한 삶의 공허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스치듯 이 책을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 속의 인물들은 정말 시답잖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만 몰두하는 멍청이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결코 특수한 일부의 인간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불행은 언제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문 앞에 다가와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삶의 거대한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자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여 그 인간을 낙오자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리고 그 고통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은 모두 그들만의 숭고함을 가지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과거의 화려한 삶을 잊지 못한다. 귀부인이 되었지만 그 명함을 얻기 위해 그녀는 삶의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야만 했다. 더이상 그녀의 외적 매력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이성인 남편 리처드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집 안에서 그녀는 그저 뒷방 늙은이일 뿐이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생각들은 그러한 고통스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발생하는 반응들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과거의 파티들을 떠올린다.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리고,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는 피터에게 여지를 남기며 아직도 자신이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파티를 여는 행위도 그런 의미의 연장선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파티를 열며 그녀는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아직 쓸모있음을 발견하고자 한다.
피터는 댈러웨이 부인에게 마음이 있다. 그는 세상을 떠돌며 삶을 보냈다. 중년이 되었고, 이제 정착하고 싶고, 그 정착지가 심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댈러웨이 부인이길 바라지만 그러기엔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없다. 그 역시도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잡생각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좀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으로 진취적인 삶을 살 순 없는 것인가?' 좀 더 현실에 집중하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세월을 보내는 방식과는 달리 좀 더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레치아는 셉티머스로 인해 고통받는다. 셉티머스는 너무나 멀리 가버렸다. 참전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살하려 한다. 그런 그를 사랑하기에 레치아는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지 삶의 밝은 곳으로 이끌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보다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그를 치료하기 역부족이었고, 결국 레치아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막다른 곳에 다다른듯 거대한 무력감 앞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삶의 비극에 대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옷에 돌을 잔뜩 채운 후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자살했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깊은 고뇌 속에서 고통스러워했을지 우리는 짐작하기 힘들다. 하지만 굳이 우리가 그녀와 같은 깊은 고뇌 속에 빠져 스스로 몰락의 길로 침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감당하면 될 뿐이다. (삶을 자기애로 가득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갖은 결함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최선이 항상 타인의 비교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유튜브에서 진흙이 섞인 물이 담긴 컵을 우리의 마음에 비유한 영상을 보았다. 진흙이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이라 가정해보자. 수저로 그 진흙을 퍼내려 할 수록, 컵 속의 물은 더욱 더 혼탁해질 뿐이다. 그 영상의 제작자가 제시한 방법은 끊임없이 깨끗한 물을 넘치도록 쏟아붓는 것이었다. 컵 속의 물을 깨끗한 물로 끊임없이 희석시켜서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다. 삶의 공허와 고통을 우리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제거할 수 없다. 아무리 없애려 할 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혼탁해지고 괴로워질 뿐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이 좋은 기억들을 들이붓는 것이다. 반복된 긍정적 학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다르게 인식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자극들이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그 자극들을 해석하는 방식은 개인들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현상일지라도 누군가에겐 고통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기쁨이 될 수 있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지만 삶의 현상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가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한 발짝 정도 떨어져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그 모든 돌들을 굳이 내 자켓 속에 들어가 있어야할 필요는 없다. 알몸으로 물 속을 헤엄치는 것 역시도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살 뿐이다. 조촐할지라도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 것이다. 공상 속에서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용감하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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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죽음을 해방을 위한 선택인양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고, 작가도 말로도 결국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나는 자살은 자멸이라 생각한다. 삶을 굳이 다른 가치로 치환할 필요는 없다. 삶은 그저 삶 그 자체이면 충분하다. 삶은 대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 존속되어야 할 의미이다.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운 결말이다. 과거의 지나가버린 시간은 결코 현재의 시간과 질적,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밀려오는 모든 순간들을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항상 현재를 마주하며 과거의 것들을 뒤돌아본다.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과거의 순간도, 과거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완전히 새롭다.
『댈러웨이 부인(최애리 옮김/열린책들)』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20세기 현대문학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줌은 물론 이전에 출간한 작품에서 선보였던 실험적 기법들이 처음으로 예술적 통일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출판사 인용) 버지니아 울프는 모더니즘 소설 기법인 ‘의식의 흐름’에 대해 『댈러웨이 부인』 발표 한달 전에 나온 평론집 『일반 독자』에서 명확히 한다. 작가는 사실주의 소설 기법에 반대해 마음속을 들여다 볼 때 삶이란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마음은 갖가지 인상들을 받아들입니다-사소한 것, 환상적인 것, 덧없는 것, 또는 날카로운 강철로 새긴 듯한 것, 사방에서 그런 인상들은 마치 무수한 원자들의 그치지 않는 소나기처럼 밀어닥치고, 그런 소나기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p.262)라는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을 한다. 울프는 글쓰는 방식에 대해서, 독자에 대해, 『자기만의 방』 출간 이후로는 페미니즘의 기수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하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생각했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p.7) 소설은 1923년 6월의 어느 날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장식할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시작되어 저녁의 파티까지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곧바로 30여년 전 삶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던 때를 소환한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p.7) 열 여덟 살 그 시간은 ‘사람들’ 때문에 여전히 생생하다. 클라리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매력이 넘쳤던 친구로 ‘무슨 말이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듯’(p.47)했던 샐리 시튼과 사랑도 논쟁도 나눴던 피터 월시, 꽃집을 향해 걷던 중 스쳐간 휴 휘트브레드도 있다. 하지만 클라리사가 선택한 사람은 피터 월시가 아닌 리처드 댈러웨이였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날이면 날마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그런 여유를 허용하고 있었다.(중략) 하지만 피터와는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그 작은 정원의 분수 곁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그와 절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둘 다 파멸해 버렸을 것이다.”(p.14) 클라리사는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한다. 5년만에 인도에서 돌아온 피터 월시는 ‘무슨 낭비람! 무슨 객기람! 피터라는 사람은 평생 이런 식으로 실수 연발이다.’(p.64)식의 평을 들으면서도 그 마음은 여전히 클라리사에게 향한다.
“남자가 자살을 하겠다니 비겁한 말이야. 하지만 셉티머스는 전쟁에 나가 싸웠지. 용감한 사람인데. 하지만 이제는 셉티머스가 아닌 것만 같다.”(p.34) 루크레치아 워렌 스미스는 남편 셉티머스 스미스 곁에서 애쓰고 번민한다. 자원했던 군에서 절친으나 휴전 직전에 죽음을 맞았던 상관 에번스는 살아있는 셉티머스를 느닷없이 공포에 사로잡히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끝모를 우울과 절망에 던져진 그가 결국 자신을 던질 때까지 의사들은 오히려 그를 옥죄고 방아쇠 역할을 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클라리사는 그를 단번에 이해한다. ‘영혼을 강압한다고나 할까, 그래 바로 그거야-만일 그 젊은이가 그에게 갔고 윌리엄 경이 그런 식으로 위세를 부리는 인상을 주었다면’(p.241) 인생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으리라고.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너무 힘이 들었다.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았다. 거기 서서 자기 자신이 아닌 그저 어느 안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p.222)라고. 그럼에도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으로써의 역할을 넉넉히 감당했으며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 그녀답게 ‘존재’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독자에게 그 명성을 이해시킨다. 소설의 첫부분부터 독자는 이야기의 복판에 떨어진다. 하지만 엇갈리는듯한 전개에 복잡함을 느끼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 읽는 행위는 체험에 맞닿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고 글로 박힌 문장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듯 입체적인 볼륨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다.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맞닥뜨리게 되는 캐릭터들, 그들의 청춘과 중년을 하루 행보로 잇대어 봄으로 독자 안에 질문과 나름의 답을 만들어 낸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이하고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특별한 것이며, 무수한 가능성을 내포한 역동적 실체라는 인식은 새삼스러운 놀람을 선사한다. 해설에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견주고 작가 자신도 그에 대한 의견을 내고 있는데 필자는 1925년, 같은 해 출간된, 실험적인 기법으로 뉴욕의 본질을 그려낸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문학동네)』 를 떠올렸다. 인물, 사건, 시공간적 배경을 첩첩이 쌓아 맨해튼의 풍광을 삶과 긴밀히 연결시켰던 『맨해튼 트랜스퍼(문학동네)』를 두고 헤밍웨이는 유럽인이 실제로 미국에 와서 발견하게 되는 미국을 그들에게 보여준 작품이라 평했다. 이에 1차 세계대전 후 6월 어느 날, 제한된 하루 안에 무제한의 인생 의미를 작가의 런던 사랑과 조밀하게 배치해낸, 그녀의 행로를 따라 걷고 싶게 만드는 『댈러웨이 부인』은 흥미로운 연결점을 지닌다.
급격히 장면이 전환되고 더불어 화자의 잦은 변화로 시선이 연이어 바뀌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을 견디거나 버티고 있는, 즐기거나 의지를 다지는 인물의 심정에 이입하게된다. 작가의 예민하달 정도로 빼어난 개념정의들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늙는다는 것의 보상, 질투란, 건강이란, 균형과 전향, 삶과 죽음, 신비란, 자아는, 그리고 시간이란! 작가가 한동안은 ‘시간’을 잠정적 제목으로 삼기도 했(p.266)듯이 빅벤의 시종소리와 그 소리가 불러 일으키는 밀도 높은 생각의 파문, 시간을 주제로 하는 개념의 묶음들은 진지한 울림을 갖고 여운을 남긴다. ‘클라리사의 <더블>로 상정된’(p.273) 샙티머스의 몰락과정은 심리변화의 세밀한 조감도를 통해 심적 파동의 시각화를 완성한다. 증상과 징후와 이행에 있어서 의학서적을 보듯 적나라하고 작가의 마지막 선택과 중첩되며 고통은 물에 젖어들어가는 솜처럼 걷잡을 수 없다. 많은 밑줄들이 중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일독(一讀)은 아직 못 읽음에 가깝고 완독의 횟수를 늘려갈 때 독자는 비로소 빛나는 돌들을 수확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틀렸다. 그녀는 단지 삶을 사랑할 뿐이었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그녀는 삶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p.160)
그녀는 항상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며, 그렇게 다들 흩어져 있다니 얼마나 낭비인가,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파티를 여는 것이다. 파니는 하나의 봉헌이었다. 조합하고 창조하는 것. 하지만 누구를 위해?
봉헌을 위한 봉헌이지, 아마도. 하여간 그것이 그녀의 재능이었다.(p.161)
언젠가 서퍼타인 연못에 1실링짜리 동전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내던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몸을 내던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겠지(그녀도 다시 가봐야 했다. 방들은 여전히 북적이고, 손님들은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우리는(그녀는 온종일 부어턴과 피터와 샐리를 생각했다)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p.240)
사진을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무슨 오류가 난다. 열심히 썼던 글도 같이 날아갔다. 복사-붙여넣기의 중요성을 19489120번째로 깨달았다. 열과 성을 다해 작업하고 레이어를 합친 채 Ctrl+S를 눌러 절규하는 디자이너가 된 기분이다. 물론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지만. 아무튼 임시저장조차 되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다 이 말이다.
다행히 <댈러웨이 부인> 줄거리 자체는 그닥 어렵지 않다. 그저 댈러웨이 부인과 그 주변인의 의식이 안개처럼 흩날릴 뿐, 사건 자체는 간단하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열심히 준비해 타란- 멋있게 주최했습니다. 파티 분위기는 나름 성공적이었고요. 그런데 읽기가 쉬운 책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열심히 읽으려고 할 수록 어렵다. 그래서 정신을 놓고 읽었다. 의식이 흘러가는 기법이니까, 내 의식도 반쯤 빼고 그대로 흘러가게 내비두었다.
정신을 놓고 글을 읽는 느낌은 굉장히 색달랐다. 이 글도 정신을 놓고 쓰고 있다. 아니, 열심히 썼는데 다 날라갔으니 정신을 안 놓게 생겼나. 어떤 인물이 나오는데 그 인물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면 그냥 넘기고, 어떤 의식이 나오는데 누구 의식인지 모르겠으면 그냥 넘겼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흘려가는 의식을 억지로 막고 돌려세우기 싫었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재미가 반감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재미가 중첩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넘기고, 이해가 되는 부분은 더 깊게 읽다보니 어느새 버지니아 울프의 실험적 기법 '의식의 흐름 기법'에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아쉬웠던 점은, 물처럼 읽다 보니 댈러웨이 부인의 감정선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다. 아마 너무 물처럼 읽어서 그랬겠지. 댈러웨이 부인은 인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딘가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혼자서는 찾지 못했지만 독서 모임을 하며 모임원들과 대화하다 보니 '통제권'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댈러웨이 부인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삶에는 진정한 통제권이 없었어. 그래서 그랬던거야. 이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자기만의 방에서 그랬듯.
좋은 책이었고, 다음에 또 읽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