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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저/최애리 | 열린책들 | 2011년 7월 20일 한줄평 총점 8.8 (50건)정보 더 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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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영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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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1925년도에 발표되었던 장편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1996년 10월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백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지난 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그레이트 북스’에 들어갈 만큼 울프의 기념비적 작품이며 20세기 현대문학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주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울프가 전통적 글쓰기 수법을 탈피, 『제이콥의 방』과 『월요일이나 화요일』 같은 작품에서 선보였던 실험적 기법들이 처음으로 예술적 통일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20세기 문학사에서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실험적인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작가 버지니아 울프.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들의 내면세계와 시간과 공간의 긴 터널들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작가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문체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살려낸 번역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작가적 면모와 〈의식의 흐름〉 기법의 문학적 경지를 엿볼 수 있다.

중년의 여인 클러리서 댈러웨이는 기다려오던 파티를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분주하다. 평온했던 그녀의 마음은 부루톤 여사가 남편 리처드만 오찬에 초대하고, 과거의 연인 피터 월쉬가 찾아오는 등 여러 가지 일로 복잡해진다. 도착한 손님들을 응대하고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1차 대전에 참전했던 젊은이 셉티머스가 정신이상 증세를 앓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시간상으로는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들이지만, 작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이용하여 댈러웨이 부인과 주변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의식을 묘사하며 그들의 내면을 자세히 표현한다. 이 소설에 감명을 받은 마이클 커닝햄은 『디 아워스』를 써서 1999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그를 원작으로 한 니콜 키드먼,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주연의 영화 또한 2002년 제작되어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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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존재의 순간들을 위한 봉헌 :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
버지니아 울프 연보

저자 소개 (2명)

저 : 버지니아 울프 (Adeline Virginia Woolf)
작가 한마디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눈곱만 한 기회도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으로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으로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성들의 적극적인 예술 활동 참여, 동성애자들의 권리, 전쟁 반대 등 빅토리아시대의 관행과 가치관을 공공연히 거부하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사망 이후 울프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다. 1905년부터 문예 비평을 썼고,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버지니아 울프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며 다작을 남긴 야심 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픽션들은 플롯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출항』,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파도』,『현대소설론』 등과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속편 『3기니』 등이 있다. 1927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등대로』를 발표하며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올랜도』, 『물결』, 『세월』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 왔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신 질환의 재발을 우려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역 : 최애리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했고, 중세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 와일드, 아홉 가지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피에르 그리말의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공역),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 슐람미스 샤하르의 『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 예찬』,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 『생폴리앵에 지다』, 『타인의 목』, 『안개의 항구』,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 조지 허버트의 『합창』 등이 있으며, ...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했고, 중세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 와일드, 아홉 가지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피에르 그리말의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공역),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그라알 이야기』, 슐람미스 샤하르의 『제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 예찬』,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 『생폴리앵에 지다』, 『타인의 목』, 『안개의 항구』, 앙리 보스코의 『이아생트』, 조지 허버트의 『합창』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여성 인물 탐구 시리즈인 『길 밖에서』, 『길을 찾아』가 있다.

출판사 리뷰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고전이라 불리는 『댈러웨이 부인』은 〈소설사에서 몇 안 되는 진정한 혁신의 하나〉로 손꼽히는 난해한 〈의식의 흐름〉 또는 〈내적 독백〉 기법이 단순히 실험되었다는 의의를 넘어서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와 비범한 지성과 창조력이 결합된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이다. 특히 심리적 방법, 의식의 흐름을 표출하는 내적 독백 등 모더니즘 소설의 기법 면에서, 그리고 작품의 시공간적 구도 면에서 비슷한 까닭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비교되곤 한다.

더 나아가 〈방법은 성공적일수록 주목을 덜 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방법〉을 전면에 내세운 많은 실험적 작품들이 새로운 시도 이상의 의의를 획득하지 못하고 잊혀 가거나 그 난삽함 때문에 일반 독자들에게는 읽히지 않는 반면, 『댈러웨이 부인』은 그런 실험적 의의를 넘어서 널리 호소력을 가지며 문학 작품으로서도 성공을 거둔다.

물론 작가의 문장이 단순 명쾌하고 쉽게 읽혀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 레이스처럼 정교한 그 구문을 통해 작가가 그려 내는 것은 현학적이지도 난해하지도 않은,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기도 한 것은 그처럼 폭넓은 호소력과 삶에 대한 섬세하면서도 깊은 이해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1923년 6월의 어느 하루 동안 여주인공인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위해 꽃을 사러 가는 데서 시작하여 저녁의 파티에서 끝을 맺는 이야기이다. 클라리사는 오십대 초반의 상류층 여성으로 아침 일찍 런던의 길거리로 나서면서 30여 년 전 자기 앞에 놓인 삶을 향해 무한한 설렘을 가지고 뛰어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에 부풀어 있던, 세상을 개혁하려 했던, 모든 일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론을 가지고 있던, 그 발랄한 처녀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은? 바로 그날 30년 전의 첫사랑이 귀국하여 찾아오고 옛 친구가 우연히 파티에 들른다는 우연의 일치는 사실주의적인 견지에서는 개연성이 딸리는 얘기지만, 그런 설정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30년 전의 옛 시절과 현재의 삶 사이를 오가며 그 사이에 놓인 세월의 폭과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하지만 30년 전 찬란했던 청춘남녀의 모습은 어느덧 부르주아 산업가의 아내로, 사회적 낙오자로, 클라리사 자신은 〈계단 위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완벽한 안주인〉이 되어 있다. 결국 〈세상 누구에 대해서도 이렇다든가 저렇다든가 말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들고 만 것이다. 처음 시작과는 사뭇 다르게 와버린 길,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의 이쪽 끝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녀는 과연 자신의 선택이 옳았던가를 자문한다.

작가가 보여 주려는 것은 바로 이런 인생의 이면이었을 것이다.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삶, 사람들 사이의 고독, 서로의 눈에 비치는 그 인간적인 왜소함과 나약함 등.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도, 살고 있는 사회도 진정한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에서 〈나는 사회 체제를 비판하고, 그것이 가장 가열하게 작동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다〉고 쓴 바 있는데, 실제로 작가는 영국 사회를 지배하는 각종 권위에 도전하는 듯하다.

정체 모를 귀빈의 차량에 표하는 군중의 맹목적인 경외감이라든가 대영제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수상의 범용함, 여러 인물들의 허세와 속물주의 등이 그것이다. 클라리사의 파티 준비와 병행되는 또 하나의 줄거리인 셉티머스 워렌 스미스라는 인물의 광기와 자살에서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 역시 전쟁의 광기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 의사들의 횡포이다.

그렇다고 해서 『댈러웨이 부인』이 사회 고발 자체를, 인간에 대한 풍자를 목적으로 하는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억압에 굴하지 않는 삶에 대한 긍정을, 불완전한 인간들에 대한 포용을 모색하는 작품이다.

종이책 회원 리뷰 (12건)

댈러웨이 부인
내용 평점3점   편집/디자인 평점3점 | k******3 | 2023.08.31

어떻게 하면 버지니아 울프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옷 속에 무거운 돌들을 잔뜩 집어넣고 스스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가라앉아 버렸다. 그녀는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여성인권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때 개인이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문제들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외투 속의 그 무거운 돌덩이들처럼 현실의 거대한 문제들에 짓눌려 그녀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책은 거대한 삶의 공허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스치듯 이 책을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 속의 인물들은 정말 시답잖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만 몰두하는 멍청이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결코 특수한 일부의 인간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불행은 언제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문 앞에 다가와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삶의 거대한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자신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하여 그 인간을 낙오자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리고 그 고통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은 모두 그들만의 숭고함을 가지고 있다. 


댈러웨이 부인은 과거의 화려한 삶을 잊지 못한다. 귀부인이 되었지만 그 명함을 얻기 위해 그녀는 삶의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야만 했다. 더이상 그녀의 외적 매력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유일한 이성인 남편 리처드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집 안에서 그녀는 그저 뒷방 늙은이일 뿐이다.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생각들은 그러한 고통스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발생하는 반응들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과거의 파티들을 떠올린다.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리고, 아직도 자신을 잊지 못하는 피터에게 여지를 남기며 아직도 자신이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파티를 여는 행위도 그런 의미의 연장선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파티를 열며 그녀는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아직 쓸모있음을 발견하고자 한다. 

피터는 댈러웨이 부인에게 마음이 있다. 그는 세상을 떠돌며 삶을 보냈다. 중년이 되었고, 이제 정착하고 싶고, 그 정착지가 심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댈러웨이 부인이길 바라지만 그러기엔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없다. 그 역시도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잡생각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좀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으로 진취적인 삶을 살 순 없는 것인가?' 좀 더 현실에 집중하고 자신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났다면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세월을 보내는 방식과는 달리 좀 더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레치아는 셉티머스로 인해 고통받는다. 셉티머스는 너무나 멀리 가버렸다. 참전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살하려 한다. 그런 그를 사랑하기에 레치아는 버리지 못하고, 어떻게든지 삶의 밝은 곳으로 이끌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보다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그를 치료하기 역부족이었고, 결국 레치아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막다른 곳에 다다른듯 거대한 무력감 앞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삶의 비극에 대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든 것을 안고 갈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옷에 돌을 잔뜩 채운 후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 자살했다고 한다. 그녀가 얼마나 깊은 고뇌 속에서 고통스러워했을지 우리는 짐작하기 힘들다. 하지만 굳이 우리가 그녀와 같은 깊은 고뇌 속에 빠져 스스로 몰락의 길로 침잠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감당하면 될 뿐이다. (삶을 자기애로 가득 채우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갖은 결함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최선이 항상 타인의 비교 평가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유튜브에서 진흙이 섞인 물이 담긴 컵을 우리의 마음에 비유한 영상을 보았다. 진흙이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이라 가정해보자. 수저로 그 진흙을 퍼내려 할 수록, 컵 속의 물은 더욱 더 혼탁해질 뿐이다. 그 영상의 제작자가 제시한 방법은 끊임없이 깨끗한 물을 넘치도록 쏟아붓는 것이었다. 컵 속의 물을 깨끗한 물로 끊임없이 희석시켜서 물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다. 삶의 공허와 고통을 우리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제거할 수 없다. 아무리 없애려 할 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혼탁해지고 괴로워질 뿐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이 좋은 기억들을 들이붓는 것이다. 반복된 긍정적 학습을 통해 우리는 삶의 다르게 인식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자극들이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그 자극들을 해석하는 방식은 개인들마다 천차만별이다. 같은 현상일지라도 누군가에겐 고통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겐 기쁨이 될 수 있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지만 삶의 현상들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가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한 발짝 정도 떨어져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그 모든 돌들을 굳이 내 자켓 속에 들어가 있어야할 필요는 없다. 알몸으로 물 속을 헤엄치는 것 역시도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살 뿐이다. 조촐할지라도 우리는 현실을 살아갈 것이다. 공상 속에서 허우적대지는 않을 것이다. 용감하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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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죽음을 해방을 위한 선택인양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고, 작가도 말로도 결국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나는 자살은 자멸이라 생각한다. 삶을 굳이 다른 가치로 치환할 필요는 없다. 삶은 그저 삶 그 자체이면 충분하다. 삶은 대의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 존속되어야 할 의미이다.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며 새로운 결말이다. 과거의 지나가버린 시간은 결코 현재의 시간과 질적,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 밀려오는 모든 순간들을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것이다. 우리는 항상 현재를 마주하며 과거의 것들을 뒤돌아본다.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과거의 순간도, 과거의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는다면,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재는 완전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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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서평]댈러웨이 부인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로얄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책**개 | 2021.12.04

『댈러웨이 부인(최애리 옮김/열린책들)』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20세기 현대문학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줌은 물론 이전에 출간한 작품에서 선보였던 실험적 기법들이 처음으로 예술적 통일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출판사 인용) 버지니아 울프는 모더니즘 소설 기법인 ‘의식의 흐름’에 대해 『댈러웨이 부인』 발표 한달 전에 나온 평론집 『일반 독자』에서 명확히 한다. 작가는 사실주의 소설 기법에 반대해 마음속을 들여다 볼 때 삶이란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마음은 갖가지 인상들을 받아들입니다-사소한 것, 환상적인 것, 덧없는 것, 또는 날카로운 강철로 새긴 듯한 것, 사방에서 그런 인상들은 마치 무수한 원자들의 그치지 않는 소나기처럼 밀어닥치고, 그런 소나기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p.262)라는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을 한다. 울프는 글쓰는 방식에 대해서, 독자에 대해, 『자기만의 방』 출간 이후로는 페미니즘의 기수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하고 클라리사 댈러웨이는 생각했다. 얼마나 상쾌한 아침인가. 마치 바닷가의 아이들에게나 찾아오던 아침처럼 신선했다.”(p.7) 소설은 1923년 6월의 어느 날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장식할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시작되어 저녁의 파티까지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곧바로 30여년 전 삶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던 때를 소환한다. “얼마나 유쾌했는지! 마치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p.7) 열 여덟 살 그 시간은 ‘사람들’ 때문에 여전히 생생하다. 클라리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매력이 넘쳤던 친구로 ‘무슨 말이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듯’(p.47)했던 샐리 시튼과 사랑도 논쟁도 나눴던 피터 월시, 꽃집을 향해 걷던 중 스쳐간 휴 휘트브레드도 있다. 하지만 클라리사가 선택한 사람은 피터 월시가 아닌 리처드 댈러웨이였다.

 

“왜냐하면 결혼해서 날이면 날마다 한집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약간의 방임, 약간의 독립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리처드는 그녀에게, 그녀는 그에게, 그런 여유를 허용하고 있었다.(중략) 하지만 피터와는 모든 것이 공유되어야 했고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그 작은 정원의 분수 곁에서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그와 절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둘 다 파멸해 버렸을 것이다.”(p.14) 클라리사는 이 선택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감당한다. 5년만에 인도에서 돌아온 피터 월시는 ‘무슨 낭비람! 무슨 객기람! 피터라는 사람은 평생 이런 식으로 실수 연발이다.’(p.64)식의 평을 들으면서도 그 마음은 여전히 클라리사에게 향한다.

 

“남자가 자살을 하겠다니 비겁한 말이야. 하지만 셉티머스는 전쟁에 나가 싸웠지. 용감한 사람인데. 하지만 이제는 셉티머스가 아닌 것만 같다.”(p.34) 루크레치아 워렌 스미스는 남편 셉티머스 스미스 곁에서 애쓰고 번민한다. 자원했던 군에서 절친으나 휴전 직전에 죽음을 맞았던 상관 에번스는 살아있는 셉티머스를 느닷없이 공포에 사로잡히게,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끝모를 우울과 절망에 던져진 그가 결국 자신을 던질 때까지 의사들은 오히려 그를 옥죄고 방아쇠 역할을 하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던 클라리사는 그를 단번에 이해한다. ‘영혼을 강압한다고나 할까, 그래 바로 그거야-만일 그 젊은이가 그에게 갔고 윌리엄 경이 그런 식으로 위세를 부리는 인상을 주었다면’(p.241) 인생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으리라고. 클라리사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너무 힘이 들었다. 전혀 즐기고 있지 않았다. 거기 서서 자기 자신이 아닌 그저 어느 안주인의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 힘이 들었다.”(p.222)라고. 그럼에도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으로써의 역할을 넉넉히 감당했으며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 그녀답게 ‘존재’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독자에게 그 명성을 이해시킨다. 소설의 첫부분부터 독자는 이야기의 복판에 떨어진다. 하지만 엇갈리는듯한 전개에 복잡함을 느끼다 어느 시점을 지나면 읽는 행위는 체험에 맞닿는 생생함을 불러일으키고 글로 박힌 문장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듯 입체적인 볼륨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그리 낯설지 않다.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맞닥뜨리게 되는 캐릭터들, 그들의 청춘과 중년을 하루 행보로 잇대어 봄으로 독자 안에 질문과 나름의 답을 만들어 낸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이하고 보내는 하루가 얼마나 특별한 것이며, 무수한 가능성을 내포한 역동적 실체라는 인식은 새삼스러운 놀람을 선사한다. 해설에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견주고 작가 자신도 그에 대한 의견을 내고 있는데 필자는 1925년, 같은 해 출간된, 실험적인 기법으로 뉴욕의 본질을 그려낸 존 더스패서스의 『맨해튼 트랜스퍼(문학동네)』 를 떠올렸다. 인물, 사건, 시공간적 배경을 첩첩이 쌓아 맨해튼의 풍광을 삶과 긴밀히 연결시켰던 『맨해튼 트랜스퍼(문학동네)』를 두고 헤밍웨이는 유럽인이 실제로 미국에 와서 발견하게 되는 미국을 그들에게 보여준 작품이라 평했다. 이에 1차 세계대전 후 6월 어느 날, 제한된 하루 안에 무제한의 인생 의미를 작가의 런던 사랑과 조밀하게 배치해낸, 그녀의 행로를 따라 걷고 싶게 만드는 『댈러웨이 부인』은 흥미로운 연결점을 지닌다.

 

급격히 장면이 전환되고 더불어 화자의 잦은 변화로 시선이 연이어 바뀌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을 견디거나 버티고 있는, 즐기거나 의지를 다지는 인물의 심정에 이입하게된다. 작가의 예민하달 정도로 빼어난 개념정의들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늙는다는 것의 보상, 질투란, 건강이란, 균형과 전향, 삶과 죽음, 신비란, 자아는, 그리고 시간이란! 작가가 한동안은 ‘시간’을 잠정적 제목으로 삼기도 했(p.266)듯이 빅벤의 시종소리와 그 소리가 불러 일으키는 밀도 높은 생각의 파문, 시간을 주제로 하는 개념의 묶음들은 진지한 울림을 갖고 여운을 남긴다. ‘클라리사의 <더블>로 상정된’(p.273) 샙티머스의 몰락과정은 심리변화의 세밀한 조감도를 통해 심적 파동의 시각화를 완성한다. 증상과 징후와 이행에 있어서 의학서적을 보듯 적나라하고 작가의 마지막 선택과 중첩되며 고통은 물에 젖어들어가는 솜처럼 걷잡을 수 없다. 많은 밑줄들이 중요한 작품이다. 그래서 일독(一讀)은 아직 못 읽음에 가깝고 완독의 횟수를 늘려갈 때 독자는 비로소 빛나는 돌들을 수확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틀렸다. 그녀는 단지 삶을 사랑할 뿐이었다.

「난 바로 그 때문에 파티를 여는 거야.」 그녀는 삶을 향해 소리내어 말했다.(p.160)

 

그녀는 항상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며, 그렇게 다들 흩어져 있다니 얼마나 낭비인가, 얼마나 유감스러운가 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모두 함께 모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파티를 여는 것이다. 파니는 하나의 봉헌이었다. 조합하고 창조하는 것. 하지만 누구를 위해?

봉헌을 위한 봉헌이지, 아마도. 하여간 그것이 그녀의 재능이었다.(p.161)

 

언젠가 서퍼타인 연못에 1실링짜리 동전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내던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몸을 내던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겠지(그녀도 다시 가봐야 했다. 방들은 여전히 북적이고, 손님들은 계속해서 오고 있었다). 우리는(그녀는 온종일 부어턴과 피터와 샐리를 생각했다) 늙어 갈 거야. 중요한 단 한 가지, 그녀의 삶에서는 그 한 가지가 쓸데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려지고 흐려져서, 날마다 조금씩 부패와 거짓과 잡담 속에 녹아 사라져 갔다. 바로 그것을 그는 지킨 것이었다. 죽음은 도전이었다. 죽음은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그 중심이 왠지 자신들을 비켜가므로 점점 더 거기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느낀다. 가까웠던 것이 멀어지고, 황홀감은 시들고,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죽음은 팔을 벌려 우리를 껴안는다.(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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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 해설을 읽고나서야 이해했다...
내용 평점3점   편집/디자인 평점3점 | y*****6 | 2019.08.26
나의 전공은 영어영문학과이다. 영어를 처음 배웠을 때 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자연스럽게 전공까지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좋아하기만 했지 열심히는 하지 않았다. 결국 영어도 못하고 문학도 잘 모르는 애매한 상태로 졸업했다.

그런 내가 기억하는 몇 안되는 문학 용어(?) 중에 ‘의식의 흐름’ 기법 이라는 것이 있었다. 생각이 흐르는 대로 글을 써내려가는 기법으로, 그 흐름을 정신 바짝 차리고 쫓아가지 않으면 독자의 정신이 혼미해 질 수 있는 그런 기법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유명한 의식의 흐름 기법의 대표작이라 한다. 과연 첫 장을 읽을 때 부터 달랐다. 글을 읽고 있긴 한데 무슨 내용인지 잘 파악이 안되는 신기한 느낌. 한 사람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파편적으로 서술되다가 그 옆 사람의 머리 속으로 넘어가서 그 사람의 생각들이 중구난방으로 나열된다. 사실 실제 사람들의 삶, 생각은 줄거리가 있고 기승전결이 있는 전형적인 소설보다는 이런 들쑥날쑥한 짧은 생각들의 연속에 가깝다. 마치 팝콘 처럼. 이 생각 했다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생각 했다가 한다. 차라리 이런 글이 더 현실적일지도. 이렇게 어지러운 글을 쓴 작가는 천재가 아닐 까 싶다.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는 얼핏 보면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댈러웨이 부인은 상류층 사회의 귀부인으로서 밝고 우아하다.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고 늘 중심에 있다. 셉티머스는 참전 이후 정신병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택하는 젊은 사내이다. 이렇게 달라 보이는 이 둘은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댈러웨이 부인은 산다는 게 가끔 버겁게 느껴지지만 주어진 삶을 만족하며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찾아간다. 셉티머스도 죽음을 선택했기는 했지만, 그것은 삶을 포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의 삶을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주변의 의사들, 사람들이 그를 통제하려 하자,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 기 위해 몸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는 선택의 방향은 양 극단으로 달랐지만 결국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전자책이라 페이지 확인을 하지 않고 쭉쭉 읽다 보니, 아이쿠야 갑자기 역자의 해설이 등장해서 비로소 끝임을 알게 되었다. 아.. 이 책은 읽는 내내 나를 알쏭달쏭하게 만들더니, 마지막까지도 나를 당황시키는 구나. 해설을 보고서야, 그리고 저자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어떤 의미인지가 이해가 되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만 이런 어리둥절한 느낌인가 싶어 다른 독자들의 리뷰를 찾아보니... 2,3 번 읽으면 진정한 감동이 밀려온다 한다. 일단 이토록 힘겨운 책을 완독해 낸 나에게 박수를 보내며, 다음에 다시 도전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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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회원 리뷰 (13건)

버지니아 울프 - 댈러웨이 부인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파**장 | 2021.09.05

사진을 올리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무슨 오류가 난다. 열심히 썼던 글도 같이 날아갔다. 복사-붙여넣기의 중요성을 19489120번째로 깨달았다. 열과 성을 다해 작업하고 레이어를 합친 채 Ctrl+S를 눌러 절규하는 디자이너가 된 기분이다. 물론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지만. 아무튼 임시저장조차 되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다 이 말이다.

다행히 <댈러웨이 부인> 줄거리 자체는 그닥 어렵지 않다. 그저 댈러웨이 부인과 그 주변인의 의식이 안개처럼 흩날릴 뿐, 사건 자체는 간단하다. 댈러웨이 부인이 파티를 열심히 준비해 타란- 멋있게 주최했습니다. 파티 분위기는 나름 성공적이었고요. 그런데 읽기가 쉬운 책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열심히 읽으려고 할 수록 어렵다. 그래서 정신을 놓고 읽었다. 의식이 흘러가는 기법이니까, 내 의식도 반쯤 빼고 그대로 흘러가게 내비두었다. 

정신을 놓고 글을 읽는 느낌은 굉장히 색달랐다. 이 글도 정신을 놓고 쓰고 있다. 아니, 열심히 썼는데 다 날라갔으니 정신을 안 놓게 생겼나. 어떤 인물이 나오는데 그 인물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면 그냥 넘기고, 어떤 의식이 나오는데 누구 의식인지 모르겠으면 그냥 넘겼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흘려가는 의식을 억지로 막고 돌려세우기 싫었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재미가 반감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재미가 중첩되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넘기고, 이해가 되는 부분은 더 깊게 읽다보니 어느새 버지니아 울프의 실험적 기법 '의식의 흐름 기법'에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아쉬웠던 점은, 물처럼 읽다 보니 댈러웨이 부인의 감정선을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는 점이다. 아마 너무 물처럼 읽어서 그랬겠지. 댈러웨이 부인은 인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듯 하지만, 뒤로 갈수록 어딘가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혼자서는 찾지 못했지만 독서 모임을 하며 모임원들과 대화하다 보니 '통제권'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댈러웨이 부인의 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삶에는 진정한 통제권이 없었어. 그래서 그랬던거야. 이게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자기만의 방에서 그랬듯.

좋은 책이었고, 다음에 또 읽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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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 YES마니아 : 플래티넘 R*****^ | 2020.12.16
버지니아 울프는 낭만적인 글을 썼을 것 같은 오해를 많이 받는 작가인데 '자기만의 방'을 보고 무척 놀랐었다. 그녀의 소설들은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며 난해하고 읽기 힘들다고 하지만 난 머리속에서 오가는 생각들을 섬세한 텃치로 써내려 간 것 같아 재미있거나 감동적이진 않아도 크게 무리는 없었다. 여성의 입장과 처한 환경,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 등에 대한 글들로 프랑스에 '시몬느 드 보부와르'가 있다면 영국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있다는 느낌이다.

'댈러웨이 부인'의 줄거리는 별거 없다. 파티를 준비하는 상류층 부인 '클라리사'의 하루를 그린다. 클라리사는 파티를 통해 자신의 지인들에게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고 싶어한다. 남편 피터와의 관계와 셉티머스의 자살이 클라리사의 삶에 미치는 부분을 '상호주관성'에 바탕을 둔 '자유간접화법'으로 서술한다. 클라리사는 셉티머스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그의 죽음이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온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은 정상성과 비정상이 합치되고 삶과 죽음을 해체하고 포괄한다.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이 더이상 혼돈과 허무에 빠진 세계를 묘사하는 적합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혁신과 다양한 실험을 하며 등장했다. 모더니즘 문학은 전통적인 문학과의 단절이고 아리스토텔레스식 카타르시스는 없기에 모더니즘 작품을 읽는 방법은 파악하지 말고 느끼라고 한다.

독서모임에서 김영민 교수의 책을 토론하면서 무용한 것에 대한 공부는 평생 배우는 것이란 얘기를 했는데 정말 그렇다. 아직도 한참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너무 많고, 알아가며 배워도 끝이 없다. 배움이란거 참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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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댈라웨이 부인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b*b | 2020.02.12
고전이 대여로 보여서 사게 되었습니다. 그간 각종 기념, 몇 주년 리커버판으로도 종종 선택되는 책이라서 예쁜 커버인 댈러웨이 부인을 많이 봤었는데 내용은 도전하지 않았던터라 이북으로 사게 되네요.

댈라웨이 부인을 따라 하루 그녀와 그녀의 주변사람들 심리를 과거와 현재 비교해보는 책인데요. 때로는 웃기도 하고, 떨떠름 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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