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를 때는 단일 국가다. 영어로 잉글랜드로 할 때와 United Kingdom는 다르다. 잘 모르는 사람은 영국으로 생각하지만 각기 다른 국가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를 합쳐 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 한다. 이들은 같은 영어권 국가일 뿐 각자 다른 국가로 전쟁을 최근까지 했었다. 지금은 과거를 잊고 각자 살아가는 듯하지만 여전히 서로 축구 경기 할 때보면 으르릉거린다. 월드컵할 때도 서로 각자 국가팀으로 출전한다.
그 중에서도 아일랜드는 상당히 많은 작가를 배출했다.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를 비롯해서 제임스 조이스도 아일랜드 작가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로 유명한데 읽는게 극악무도하게 힘들어 쉽게 책을 선택하기 힘들다. 제임스 조이스의 책을 그나마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더블린 사람들>이다. 제목만 볼 때 몰랐지만 막상 책을 읽어보니 단편소설을 엮었다. 총 15편의 단편소설이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로 연관이 1도 없다.
공통덤을 찾자만 전부 아일랜드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곳에서 태어나 그런지 소설의 배경을 더블린으로 한 경우가 많다. 책에 나온 15편의 배경이 더블린이다. 보통 단편을 엮을 때 그 중에서 하나를 대표 제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제임스 조이스가 의도한 것은 아닐진대 너무 자연스럽게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었다. 모든 내용을 소개하기는 힘드니 그 중에서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깔끔할 듯하다.
제임스 더피가 주인공이다. 그는 주로 집에만 머물러 살아간다. 무엇보다 제임스 더피는 무질서한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자신의 통제하에 놓인 걸 선호한다. 너무 익숙한 듯 직업이 은행원이다. 은행원은 정해진 틀에서 시간을 칼처럼 맞춰 일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숫자를 세는 직업일수록 정확함이 생명이다. 하루 일상이 칼처럼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저절로 간다. 이는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의 성격을 직업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게 한 장치다.
게다가 제임스 더피는 동료도, 친구도, 교회도 나가질 않는다. 혼자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과의 만남은 아주 최소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접촉할 뿐이다. 크리스마스와 같은 행사나 경조사에만 참석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하는 행동일 뿐이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탄한 하루 하루를 보낸다. 그에게 익사이팅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길 일도 없고 하루 종일 루틴도 뻔하니 부딪칠 일도 없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일이 생겼다.
남자에게는 역시나 여자를 만나는 것만큼 흥미진지하고 익사이팅한 일은 없을 듯하다. 제임스는 극장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다소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보이는 시니코였다. 텅빈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다고 말한 시니코가 한 말을 대화로 받아들였다. 그 후로도 여러 연주회에서 다시 만난다.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한 시니코 부인이었다. 서로 몇 번의 만남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제임스는 자신의 천성을 버릴 생각이 없던 인물이다. 또는 그가 만나 시니코는 제임스를 변화시킬 정도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제임스에 비해서 시니코가 좀 더 적극적인 만남이었다. 어쩌면 그 점이 제임스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생각이 확고한 제임스 입장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서서히 스며들듯이 제임스 원 안으로 들어가 어느 순간 시니코가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제임스는 시니코가 자신에게 한 행동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생활에 함부로 침입한 사람으로 여긴 듯했다.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며 변한다. 천성은 변하지 않을 수 있어도 다양한 면에서 나이에 맞게 변한다. 남들 눈에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제임스는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삶을 더 중시한 듯했다. 시니코에 대해 그는 거절한다. 더 가까이 오려는 시니코를 의식적으로 밀어내며 관계를 끝내버리며 헤어진다.
시니코 입장에서는 좀 친해졌다고 생각한 제임스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을 듯도 하다. 자신에게 한 행동에 모멸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제임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시니코를 삭제했다. 원래대로 루틴대로 제임스는 살아가며 아주 평범하게 지내고 있었다. 우연히 부고기사를 보기 전까지는. 어느 여인이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플랫폼에 기차가 움직이는데도 철로를 걷다 사망했다. 그녀가 바로 시니코였다. 부고기사에는 2년 전부터 술에 취해 폭음하며 살았다고 한다.
제임스가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한 것일까. 자신은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고 평온하며 일상을 살고 있었다. 기억조차 못하고 있던 시니코는 전혀 딴판으로 고통스럽게 살았다. 둘 사이에 생긴 일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지금까지 아주 평범하게 살던 제임스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까. 그건 전적으로 제임스에게 달려있다. 소설에서는 제임스가 흔들리는 걸로 나온다. 해당 역사를 찾아갈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친다.
<더블린 사람들>에 나온 단편소설은 전부 끝이 뚝 끊긴다. '소설이 이제 끝났구나'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게 한다. 우리 일상은 소설처럼 마무리가 확실히 되지 않는다. 매일같이 어떤 이벤트가 끝나도 삶은 이어진다. 그처럼 소설은 전부 읽다가 순간 끝이 난다. 그는 행복하다, 슬프다. 이런 식으로 종결은 없다. 그는 밥을 먹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다. 단편소설이라 집중하며 읽을만하면 내용이 끝나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까칠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집중하는 게 조금 어렵다.
친절한 핑크팬더의 한 마디 : 여러 단편을 통해 인간을 만난다.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영미 작가로는 세익스피어에 비견될만큼 위대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20세기 영어권 문학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그나마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쉬운 편이라고 말하는 더블린 사람들을 몇 달에 걸쳐 읽었다. 잘 이해하지 못해서, 다시 읽거나 번역본을 바꿔가며 읽었고, 심지어 영문판까지 들쳐보았는데, 오래전에 정규 라디오 방송에서 다루고, 팟캐스트로도 파일이 남아있는 영미문학관에서 30여회에 걸쳐서 방송한 팟캐스트 방송과 펭귄 클래식의 해설이 도움이 되었다.
더블린사람들을 이해하려면 일단 제임스 조이스가 애증어린 마음으로 그려나간 더블린을 수도로 가진 아일랜드라는 나라가 당시 처해있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정치지도자 파넬의 죽음으로 카톨릭 민족주의자들이 품고 있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산산조각난 현실 앞에 식민통치의 그늘과 만성적 부조리의 상징이 된 카톨릭 종교, 그리고 열뜬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환멸을 제임스 조이스는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담았다.
조이스는 이 작품집을 개별 작품의 연속으로 읽지 말고, 복잡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작품으로 읽어줄 것을 바랬다. 얼핏 보면 단편집 같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제임스 조이스 스스로가 '마비'라고 명칭한 커다란 주제로 모아져, 일관된 지향점을 갖는다. 18세기 초만 해도 베네치아와 견줄 수 있을만큼 명물 도시로 자리매김했던 더블린은 연방법의 적용을 받아 그 위치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무역과 식민적 약탈적 통치로 인해 쇠퇴의 길로 들어선다. 이것은 제임스 조이스 가족의 쇠퇴와 맞물리면서, 작품과 시대와 개인을 연결시킨다. 그가 말하고 있는 더블린의 마비란 무엇인가. 궁핍과 불공정한 사회 속에서 타락하고 무능한 사람들의 마비된 양심, 마비된 진실, 마비된 존엄성, 결국은 마비된 아일랜드 정신이기도 하다.
첫 작품인 <자매>에 이어, <어떤만남>과 <에러비>로 이어지면서 주인공이었던 유년기 소년은 <이블린> <경주가 끝난 후> <두 건달> 등을 거치며 차차 청년기의 소년 소녀로 바뀌고, 마지막 <죽은 사람들>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나이와 성별과 직업과 성격이 바뀌면서 주인공들은 더블린 사회의 여러 층에 포진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지만, 그들은 그 어떤 위치의 다른 삶을 통해서도 한결같이 더블린의 만성적인 무능과 타락을 보여준다. 만나고, 허세를 부리고, 술마시고, 그 아무 일도 일어난 것 같지 무료하고 단순한 일상의 지속은 조이스가 보여주고자했던, 닦아내고 윤내지 않은 진실 그대로의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열린 결말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독자로서 우리는 <자매>의 죽은 신부가 왜 마비되었는지,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그것이 혹시 매독이라든가, 혹은 어떤 성적 타락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로지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타락한 노인은 음흉하고 저질적인 모습으로 다시 소년들의 일탈을 그린 <어떤 만남>에서 나타나, 아이들에게 섬뜩하게 성적 희롱을 하고 위협한다. <에러비>를 짝사랑한 소년은 무관심한 어른들에 의해 소녀와 가까와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아마도). 그렇게 도시의 모퉁이를 돌면 재회하게 되는 인물들의 더블린 내에서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타락한 인간 본성의 내밀한 속내를 들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작은 일상들, 동전 한 잎, 술 한잔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 이것은 200년전 더블린의 모습이지만은 않다. 선거를 앞둔 한 지역 사무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다룬 <위원실의 담쟁이 날>, 무능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이 윗사람에게 당한 수모를 시계까지 팔아 술집에서 허세를 부리며 팔다가 망신을 당한 후 집에 와서 자는 아이를 깨워 화풀이를 하는 아버지를 다룬 <짝패들>, 보잘것 없던 친구가 도시(런던)에서 성공해서 돌아오자 자괴감을 느끼는 <작은 구름>, 직업도 없이, 돈도 없이 술을 얻어 빌어먹는 다니는 건달 둘과 하녀와의 약탈적 관계를 다룬 <두 건달들>, 찬 딸을 결혼시킬 목적으로 은밀한 계략을 읽을 수 <하숙집>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 배경만 바꾸어 그대로 플레이해도 다를 바가 없을, 쌍둥이 같은 자화상이다.
그렇다, <위원실의 담쟁이달>에서처럼 선거철이 되면 얼마 안되는 푼돈을 벌기 위해 표를 모으러 다니고, 무용하고 무의미한 정치적 대화를 하는 사람들, 자기보다는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 팔자를 조금 고쳐보려고 악을 쓰고 다니는 부모들, 출세한 친구와 출세하지 못한 친구와의 재회 속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갭,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처럼 서로 등처먹고 사기치는 세상, 바로 어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왜곡된 거울에 비쳐 미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더블린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음산하고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쳐보는 거울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궁핍하고 초라한 행색을 한 사람들이 한푼의 동전과 한 잔의 술에 팔아버리고 마비시켜버리는 모든 것들을 얘기하고 싶어했다.
아일랜드의 역사적 배경은 다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영국의 지배를 받았었고 그런 점이 우리의 문학과 유사성을 갖고있다. 챕터별로 읽자면 딱히 커다란 에피소드가 기승전결로 펼쳐지는 것도 아닌데 묘하게 마음이저리고 공감된다. 개인적으로 늘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eveline은 이런저런 도전앞에서 흔들릴때마다 떠오른다. 사랑하는 연인이 타고 있는 배에 한쪽발을 걸쳐두고 망설이는 그녀는 결국 어머니의 외침과도 같은 종소리에 연인도, 자신을 옭아매는 삶의 굴레를 탈피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버린다.
20대 때는 그게 계속 못마땅했다. 그치만 지금 읽었을때는 그때와는 달랐다. 결국 어쩔수없는 운명이 아닌 선택이었던 것이다. 종소리가 엄마의 외침처럼 들렸던 것은 누군가 자신을 말려주기 바랐던 마음이었던게 아닐까하는 열린 사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또 모르겠다. 마흔의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우유부단하다고 느낄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