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노 저
임솔아 저
애나 렘키 저/김두완 역
로랑스 드빌레르 저/이주영 역
천선란 저
백온유 저
2021년 04월 15일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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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저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한때 자살을 신의 뜻을 거스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형벌에 처했다고 한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궁극의 철학적 자문을 한 번쯤은 해 본다. 이 책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자살의 의미를 좀 더 심오한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내가 꼽는 명문장 중 하나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카뮈는 그 철학적 질문 중 '자살'을 가장 진지한 문제로 내걸었다. 그는 자살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도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오히려 쓸모없는 진실이라 역설하고 있다. 문득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주체로 살아가라는 인간상을 제시했던 니체가 떠올랐는데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것도 견딜 수 있다'라며 삶을 긍정하라고 했다. 카뮈는 니체 철학의 부활을 꾀하려 했던 것 같다. 그는 불합리하고 해독이 불가능한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은 스스로 그 의미를 찾는다고 한다. 즉, 불합리한 세계와 합리적인 이성의 대면이 바로 부조리인데 그것이 인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라 설파한다. 그런 부조리 앞에서 나는 감히 용감하게 맞서고 있는가? 이 책은 몇 번이나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이 서로 영원히 대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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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항은 삶에 그 대가를 부여한다.
한 존재의 인생 전반으로 확장되는 반항이
그 존재의 위대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한쪽만 바라보지 않는 인간에게,
그를 넘어서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지성의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인간적 자부심이 보여 주는 풍경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카뮈는 모든 실존주의 철학이 도피를 제안하고 있다고 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에게 한정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신격화하고 자신의 것을 빼앗아간 것들 속에서 희망의 이유를 발견하는데, 이 강요된 희망의 본질을 종교적인 것으로 본다. 그는 여러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이론을 파헤친다. 야스퍼스와 키르케고르는 비합리를 신격화하고 있고 후설의 현상학은 부조리와 가깝다고는 하지만 결국 삶을 초월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부조리와 먼 것이라 말하고 있다. '부조리한 자유'에서는 카뮈가 부조리를 대하는 태도인 '반항'이 키워드였는데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었다. 부조리한 인간에게 '자유'란 무엇이냐고 던지는 질문은 종교가 있는 나로서는 매우 진지하게 고찰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였다. 카뮈는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부조리가 내포하는 삶의 확장이 인간 의지에 달린 것도 아니며, 그 반대인 죽음에 달려있다고 하는데, 이 주장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매개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지의 목표는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것이 삶의 원칙을 제공한다고 한다. 카뮈는 부조리로부터 반항, 자유, 열정이라는 결론을 도출시키고 있는데, 결국 이 의식 행위를 통해 죽음으로의 초대를 삶의 원칙으로 바꾸어 놓아버림과 동시에 자살을 거부한다.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자살'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부조리의 추론에 대한 결말이 자살의 거부와 살아갈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부조리를 논하는 데 있어 이러한 추론의 방식보다 더 어울릴 만한 것이 어디 있을까?
인간을 부추기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들은
모두 희망이라는 수단을 이용한다.
부조리한 인간에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실존주의적이면서도 무신론자인 이반 카라마조프의 이론이 언급된다. 대심문관에서 이반은 알료샤에게 '신은 없으므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이론을 펼치는데 이 이론은 부조리한 삶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개념이나 삶의 가치는 아무런 결실이 없는 불모성을 통해 가늠이 된다는 말은 카뮈의 실존주의와 부조리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한 예로 티르소 데 몰리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돈 후안이라는 전설적 바람둥이를 소개한다. 돈 후안은 자신의 영혼을 즐겁게 하려 한다. 그의 행동은 질보다 양의 윤리를 추구한다. 그에게는 스스로를 덧없지만 유일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랑만이 너그러운 사랑인 것이다. 세상의 심오한 진리를 믿지 않고 시간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는 자이다. 돈 후안의 이야기는 그저 카사노바로 불리기에는 모순이 있다. 카뮈가 앞서 말한 부조리한 인간의 조건을 무척 논리적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허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동 없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결말을 기다리며 희극을 연출하는 인간의 모습, 그것은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씁쓸해진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법칙을 등지고 살아가야 하는 숙명! 흐르는 물살을 가르며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가 알을 낳는 산란기를 앞둔 연어들처럼, 누군가에게는 부조리가 삶의 또 다른 방식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인간 자신이 목적이다. 그것도 유일한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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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자들은 이따금 정복과 극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두 번째 예로 연극 무대의 배우를 비유한다. 배우가 타인의 인생 속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 자신이 맡은 배역대로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배우는 '현실'이라는 시간 위에 또 다른 '상상 현실'을 부여한다. 무대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그의 육체로 수많은 영혼들의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한때 교회는 이러한, 하나의 운명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배우들을 파문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력이다'라고. 문득 '불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는 불멸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죽어서 잊히길 바랐다. 영원히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을까? 카뮈는 부조리한 인간의 세 번째 예로 정복자를 비유하는데 그들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그들이 속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며 역사의 반열에 오른다. 부조리한 인간 중 정복자가 가장 적극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그들의 역사적으로 추앙받지 못할 행위들을 놓고 보았을 때 가장 불운하고 파괴적 인물들이다. 카뮈가 제시한 이 세 가지 유형의 부조리한 인간들 이외에도 주위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희망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로 가득한 부조리한 이 세계. 그러나 '인생이란 신이 연출하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라는 아우렐리우스의 명언처럼 인생은 내가 어떻게 사는가에 달려있다. 연극 속 주인공이면 좋겠지만 조연이면 어떻고 소품이면 어떠하리, 땡볕 아래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 한 그루는 자신의 자리에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더위를 피하는 이들에겐 누구보다 고마운 존재가 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묘사하고자 하고
느낄 수 있게 하려는 경험에서 확실한 점은,
고통이란 다른 고통이 소멸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철학과 소설'에서는 나의 읽고 쓰기에 관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우주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나는 매 순간 부조리한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 세계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하려 하면 할수록 흩어져 버리는 생각들의 잔해를 모으고,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두었던 일을 멈추게 만든 것은 독서와 일기 쓰기였다. 읽고 있던 책 속의 행간에서 마치 내가 쓴 글인 듯 미처 형언할 수 없었던 구절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때때로 주체할 수없이 차오르는 어떤 감정을 덤덤하게 받아주는 것 또한 일기장이었다. 부조리한 이 세계에서 그것들은 내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 주었던 도구였던 것이다. 소설이라는 작품 속에서 인간 세계의 부조리가 구현되고 재창조 된다. 카뮈는 소설 속 구체적 감각과 묘사에 과하게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 이상의 의미는 독자에게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의 작품 <이방인>의 결말에서처럼 말이다. 최근 아티스트 웨이 수업을 계기로 쓰기 시작한 모닝페이지! 이제 두어 달 남짓 되어가는데 내게 소소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창조한다는 것, 그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라는 카뮈의 이 한 마디에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로 귀결되는 건 나뿐인가? 습관에 익숙해져 추구하고자 하는 행복보다 수단이 목적이 돼버리는 상황, 그리고 희망이라는 길 위에서 마주하게 되는 환상과 현실의 괴리감 또한 부조리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 앞에 펼쳐진 길이다.
그는 허무에 자기 색깔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그가 철학자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그의 작품 <악령>의 키릴로프는 자신의 의지를 확실하게 천명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부조리에 저항하는 듯하다. 카뮈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부조리한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며, 그를 부조리한 소설가가 아니라 실존주의 소설가라 정의 내린다. 카뮈는 앞서 살펴보았던 철학과 소설의 연장선 상에 도스토옙스키의 창조적 활동을 이끌어내고 있다. 창조적 활동이야말로 부조리한 인간의 삶의 원동력이자 인내와 통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며 소설가와 철학자의 작업이 분리될 수 없는 미학이란 말에 공감이 된다. <보르헤스의 말>이라는 책에 '작가는 시대마다 같은 책을 되풀이해서 쓰는 것이고, 영원한 책은 다 똑같은 책인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시지프 신화>를 읽는 내내 지속적으로 머릿속을 맴도는 문장이다. 나는 보르헤스를 최고의 작가이자 철학적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라 단언할 수 있는데 카뮈가 보르헤스를 만났더라면 시대와 상상을 초월하는 이론 하나는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시지프 신화>는 쉽게 읽히는 책이 결코 아니다. 실존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도 몇 번 읽다 보니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처럼, 목적이 무엇이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탄생된 인간의 본질보다 인간의 실존인 '현재 여기에 있는 나'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존주의의 궁극적 지점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감이 오는듯하다. 불분명한 목적지를 향한 끝없이 몸부림쳐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피할 수 없으며 행복과 부조리는 공존하며 동시성을 지니는 것 같다.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이 자기 삶을 향해 되돌아가는 바로 그 미묘한 순간,
바위를 향해 되돌아가는 시지프는
그 연결되지 않는 일련의 행위들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 행위들은 그의 운명이 된다.
부조리와 자살이라는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를 파다 보면 '자각'이란 단어를 내포하고 있는듯하다. 부조리에 반항하기 위한 첫걸음이야말로 '부조리의 자각'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는 교활한 자였으며 신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올리지만 굴러떨어져 다시 올려야 하는 영원히 되풀이되는 형벌에 처해진 자다. 우리 인간들의 삶 또한 시지프의 형벌과 많이 닮아 있다. 오래전 아들과 함께 보았던 픽사 제작 애니메이션 <UP>의 칼과 엘리 부부, 그들은 삶의 목표는 같았지만 현실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당시 그들을 보며 시지프 신화가 떠올랐던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과정에서 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예상치 않은 사건, 끝이 보이지 않는 해결되지 않는 삶의 과제들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은 그림자처럼 지독하게 따라다니는 내 운명이라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기꺼이 짊어질 용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쉴 새 없이 살아가다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인생의 허무함, 그 순간 나와 세계를 연결해 주던 고리마저 상실하게 되는 경험이 바로 부조리의 실체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문하고 고찰하는 것들에 대해 덤덤하게 추론하며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냉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마지막 문단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시지프의 자세와 마지막 문장의 아니러니한 희망의 메시지는 책의 첫 구절과 매우 대조적이면서도 임팩트 있는 결론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망자가 하데스가 지배하는 명계로 가면서 레테의 강에서 강물을 한 모금 마셔야 한다. 그러면 망자는 전생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전생의 번뇌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시지프 신화를 마무리하는 시점, 내가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가는 자세를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려 한다. 그것은, 불멸하려 하지 않으며, 어제의 고되었던 일상을 레테의 강에 던져버리고 묵묵히 오늘을 사는 데 있다고......
바위는 또다시 굴러떨어진다. 나는 시지프를 산 아래에 내버려 둔다! 우리는 그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와 늘 다시 만난다. 하지만 시지프는 신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우월한 성실함을 가르쳐 준다. 시지프 역시 모든 게 다 잘 됐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주인 없는 이 세계는 그에게 볼모로도, 하찮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 돌덩이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그 캄캄한 산의 광물 조각 하나도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p. 191
열린책 시지프 신화 리뷰
사실 내가 이 책을 완벽히 이해 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을 리뷰해도 될련지 잘 모르겠다... 읽게된 계기가 이 책의 저자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기대감에 읽게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용이 굉장히 어렵다. 이방인, 페스트가 부조리라는 주먹돌을 건네준다면 시지프 신화는 부조리라는 거대한 바위를 내게 냅다 던지는 느낌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보단 산 것을 잘했다 싶은게 읽는데 시간이 굉장히 걸렸다. 그리고 여러번 읽어야 제대로 이해 할 듯하다.
오구오구 페이백으로 대여한 알베르 카뮈 작가의 시지프 신화 리뷰입니다. 시지프 신화는 알베르 카뮈 저자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생각을 잘 담아내고 있는 철학 에세이입니다. 무엇보다 시지프 신화는 영원히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를 다룬 이야기죠. 바로 그 시지프를 부조리한 영웅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잘 알려져 있는데, 아렙르 까뮈 작가의 부조리 3부작 중 하나로 알려진 책의 제목으로 잘 어울리네요.
요즘 가벼운 책들만 보다보니 가끔 보는 어려운 책들이 더 어렵게 느껴지기는 하네요. 페이백이라서 별 생각없이 봤다가 보는 내내 철학 에세이라더니 온갖 사색들은 다 하게 되는거 같아서 좋기도 하고 한번 봐서는 잘 모르겠는 부분들이 워낙 많아서 나중에 다시 책으로 사서 봐야 할거 같습니다. 페이백이라 조금씩 봤는데 보면서도 느껴지는 것들이나 사색 시간들은 좋았어요